1장
책의 수도 베네치아
(…)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외국 여행객들을 가장 경탄하게 한 것은 책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수십 개의 서점이 모여 있었는데,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마르칸토니오 사벨리코Marcantonio Sabellico(최초의 저작권 수혜자이다)가 자신의 저서에 남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리알토 다리 밑에 위치한 독일인 상점 거리fontego dei Tedeschi에서 출발해 산마르코 광장을 향해 걷다 보면, 서점들이 가게 앞에 비치해놓은 매력적인 책 목록에 마음을 빼앗기는 바람에 거리의 절반도 구경하지 못했다고 한다(터키인 상점 거리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이 독일인 상점 거리에는, 직접 만든 상품을 취급하며 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중부 유럽 출신 상인들의 점포가 즐비했다).
65년 정도 앞서서, 즉 1452년에서 1455년 사이에 이동식 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나라 독일도 베네치아를 능가하지 못했다.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출간된 모든 책의 절반가량이 베네치아에서 인쇄되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즉 “출판업자들이 인쇄하는 책들의 아름다움과 수량에 있어”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당시 베네치아의 출판 산업이 아니었다면 책은 물론 현대 이탈리아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어의 발달 과정에 토스카나 출신인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작품들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문주의자인 피에트로 벰보Pietro Bembo와 출판업계의 제왕으로 그 명성이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알도 마누치오Aldo Manuzio가 인쇄한 베네치아 출판물들이 없었다면 그 결과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16세기 서점의 풍경
그럼 이곳의 한 서점으로 직접 들어가 보자. 안젤라 누오보Angela Nuovo의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서적 무역Il commercio librario nell’Italia del Rinascimento》이 당시의 상황을 알려준다. 일부 책들은 가게 밖 선반에 진열되었는데, 그리스어·라틴어 고전(후자가 더 많았다)과 종교 서적(성서나 그와 관련된 주석서)들이 표지 부분만 진열되었다(이는 절도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또 가깝거나 먼 지역의 도시 풍경, 평생 직접 만나보기 어려웠을 인물들을 묘사한 각종 판화 이외에도,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져 오늘날의 뉴욕에 비견할 만했던 베네치아를 찾은 많은 방문객들이 사용하던 다양한 외국어로 쓰인 책들도 전시되었다. 아르메니아어 책, 보헤미아의 성서, 중세 크로아티아의 글라골 문자로 기록된 책, 러시아에서 쓰는 키릴 문자로 인쇄된 책,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1516년 베네치아에 건설된 유대인 게토로 인해 히브리어 책도 여러 권 진열되었다. 많은 서점들이 인쇄소 업무를 병행했기 때문에 판매된 책들은 대부분 인쇄업자이자 동시에 출판업자인 이들에 의해 생산된 것이었다. 서점 밖 진열대와 문설주에는 직접 인쇄했거나 판매할 책의 정보를 적은, 반으로 접어 만든 서너 장의 목록이 항상 놓여 있었다. 또한 카드와 필사본들, 필사본 제작에 필요한 종이, 잉크, 펜 등의 도구를 판매하는 가게들도 있었다. 인쇄의 시대가 오자, 가게 주인들은 필경사가 필사한 책들을 기계로 인쇄한 책들로 대체했다.
이제 서점의 내부를 살펴보자. 먼저 진열장이 보인다. 투명 유리판을 제작하는 기술은 몇 세기 후에나 등장하기 때문에(16세기에 창문은 작은 유리판들을 납으로 연결해 만들었다) 진열장 위에는 햇빛과 빗물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차양이 드리워져 있었다. 절도의 위험성이 비교적 적은 진열장에는 책 전체가 놓여 있었다. 어떤 책들은 낱장 형태로, 어떤 책들은 장정되어 내용이 잘 보이도록 받침대에 펼쳐진 상태로 진열되었다. 책은 아직 상류층을 위한 물품이었으며 때로는 상당한 고가에 거래되었다. 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각 장의 시작 부분, 즉 출판업자가 여백으로 남겨둔 공간에 채식사彩飾師가 대문자를 아름답게 그려 넣었고, 본문의 각 문단이 시작되는 부분에도 작은 크기로 대문자를 그려 넣었다. 때로는 프란체스코 콜론나Francesco Colonna의 《폴리필로의 꿈Hypnerotomachia Poliphili》에 삽입된 남근 그림이나,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가 1527년에 베네치아에서 은밀하게 출간한 작품으로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분명히 포르노 서적으로 간주되었을 《음란한 소네트Sonetti Lussuriosi》에 나오는 16가지 체위묘사처럼 종교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목판화가 실리기도 했다.
서점이면서 책을 만드는 작업실이기도 했던 가게의 내부는 오늘날의 서점과는 달랐다. 16세기에 출판된 책은 낱장 형태로 판매되었으며 구매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그것을 제본하고 추가로 채식사에게 주문해 장식 문자를 그려 넣었다. 어떤 제본 방식은 값비싼 천과 금속으로 책을 장식하는 것이었기에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도원용 책은 표면이 매끄러운 양피지를 이용해 비교적 단순한 방식으로 제본했다. 물론 이 경우에도 가격은 낱장 형태에 비해 상당히 고가였다.
낱장 인쇄물들은 청색 종이로 포장된 다음 제목과 저자별로 분류되어 벽에 달린 선반에 보관되었다. 제본이 완료된 중고 서적들도 있었는데, 서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공간에 진열되었다. 제본이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중고 책은 낱장 형태의 동일 판본에 비해 두 배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중고 책들은 선반에 세워서 보관했는데 오늘날과는 반대로, 즉 책의 등 부분이 안쪽을 향하게 하여 규격이 잘 드러나도록 했다. 종류별로 벽에 기대어 전시된 책들은 일부는 수평으로, 일부는 수직으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색이 조화를 이루는 효과”를 연출했다. 제본 모양만 보아서는 책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책을 찾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서들 중에는 심지어 책의 배 부분에 제목과 저자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 것들이 종종 있다. 서점 주인은 책 내용을 잘 설명해야 함은 물론 책을 책장에 꽂거나 필요한 책을 찾아 꺼내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의 서점을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거의 모두 손님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는 서점 주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서점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계산대였다. 그 위의 책 받침대에는 주인이 필요한 것을 적는 노트가 있었다. 또 계산대 위에는 잉크병, 깃펜 등 서점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여러 일상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크고 작은 서랍에는 회계 장부와 현금 이외에도 특정한 독자층을 위해 숨겨둔 인쇄물들(예를 들면 종교개혁 지역에서 저술된 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서점 주인은 마치 자기 배의 후갑판에 선 선장처럼 계산대에 서서, 가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독하고 공손히 고객들의 말을 경청했다. 기록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의 서점은 지식인들에게 만남의 장소였으며 학술적인 대화와 논쟁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판매할 책의 진열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서점 문이나 외부 진열대에 비치한 도서 목록이 고객들의 구매욕을 자극하기도 했으나,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소비자들의 눈길은 주로 서점의 책장에 집중되었다. 우리는 당시에 책들이 어떤 기준에 따라 분류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법률 서적들은 확실히 다른 책들과 구분되어 따로 진열되었다. 그것들이 특별히 취급된 이유는 가격 때문이었다. “상품의 가치, 명성 그리고 희소성으로 인해 베네치아 출판계에서 법률 서적들은 다른 분야의 책보다 우위에 있었다.”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일상적으로 작성되었던 일일 장부 덕분에 당시 베네치아의 서점 내부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다. 프란체스코 데 마디Francesco de’Madi가 작성한 《초르날레Zornale》는 1484년 5월 17일에 시작해서 거의 4년이 지난 1488년 1월 23일에 끝난다. 프란체스코가 처음 글을 쓴 날짜에 활동을 시작했는지, 아니면 전에 쓰던 장부를 다 채워 그날 새로운 장부에 기록하기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건 그는 380종 1,361권을 상점에 진열했고(종당 평균 3.5권), 성서나 기도서 같은 책은 판매용으로 몇 권 더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482년부터 1596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16개의 서점 목록에 따르면, 서점마다 최소 104권에서 최대 3,400권의 채들이 진열되었으며 종별 평균 부수는 최소 1.8권에서 최대 6.8권이었다. 종별 보유 수가 많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 많은 자본을 묶어두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프란체스코 데 마디의 책장에 가장 많이 진열된 책(전체의 25퍼센트)은 라틴어 고전이었고, 한쪽에 소수의 그리스 저자들과 중세 저자들, 그리고 보카치오, 단테와 같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인문주의자들이 남긴 저술들이 있었다. 이러한 서적들은 주로 인문학을 가르치는 학교 교사들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학생용 라틴어 문법서는 포함되지 않았다. 반면 학교에서 강의하지 않았던 그리스어 문법서들은 진열되어 있었다. 두 번째로 많은 책(20퍼센트)은 성서와 교회의 교부들이 작성한 주석서, 연설 모음집 등 신학 서적이었다. 이 책들 역시 첫 번째 범주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성직자들을 위한 것이었던 만큼 전문 영역에 속했다. 일반 독자들이 취미로 읽는 책과 이탈리아어로 작성된 책들(16퍼센트)은 종류는 많았지만 좁은 공간을 차지했다. 기도서, 기사 문학,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저술, 라틴 고전 번역서(리비우스, 키케로, 오비디우스) 그리고 특히 주판 책 등이 여기에 속했다. 상인들의 도시에서 계산법을 배우는 책은 꼭 필요했다. 인문주의 학교에서 라틴어로 산수를 가르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책은 이탈리아어로 작성되었다. 그다음은 법률 분야로, 수는 적었지만(7퍼센트) 르네상스 시대의 서점에는 필수적이었다. 이 책들 역시 첫 번째 범주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성직자들을 위한 것이었던 만큼 전문 영역에 속했다. 일반 독자들이 취미로 읽는 책과 이탈리아어로 작성된 책들(16퍼센트)은 종류는 많았지만 좁은 공간을 차지했다. 기도서, 기사 문학,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저술, 라틴 고전 번역서(리비우스, 키케로, 오비디우스) 그리고 특히 주판 책 등이 여기에 속했다. 상인들의 도시에서 계산법을 배우는 책은 꼭 필요했다. 인문주의 학교에서 라틴어로 산수를 가르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책은 이탈리아어로 작성되었다. 그다음은 법률 분야로, 수는 적었지만(7퍼센트) 르네상스 시대의 서점에는 필수적이었다. 주석서, 도서 목록, 그리고 연구서 들은 가장 값이 비싼 책들이었으며 종수는 적어도 비교적 넓은 공간을 차지했다. 법률 분야의 서적은 몇 달간 한 권도 팔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끔은 대량 구입하고 금화로 책값을 지불하는 고객이 있었다. 예를 들어 1485년 어느 변변찮았던 9월의 총수입은 39.5두카토였는데, 이 금액의 삼분의 일은 한 고객이 법률 서적 7권을 구입하고 12.5두카토를 책값으로 지불한 결과였다. 법률 서적은 종이, 시간, 노동을 많이 투자해야 했던 만큼 규모가 작은 출판사에서는 출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충분한 규모를 갖춘 출판업자에게는 많은 이윤을 보장했다.
프란체스코의 서점에 있던 그 밖의 책들은 학교 교재, 라틴어 문법서, 대학의 철학과 의학 강의 필기집 등이었다. 베네치아에는 대학이 없었다. 만약 그 서점이 볼로냐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 있는 인근 도시 파도바에 있었다면, 의학과 철학 분야의 책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판매 도서의 일부는 책장에 아직 분류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던 중고 책이었다. 그 당시의 중고 책은 오늘날과 비교해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즉, 중고 책을 오래되고 값이 싼 것으로 간주하는 개념은 한참 후에 생겨났다. 책 가격은 제본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보존 상태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다 1580년대부터 중고 책의 거래가 확대되고 평가절하가 시작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16세기 전반기에 “새 책의 수가 급증하면서 중고 서적은 가격 경쟁력을 상실한 채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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