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 역사의 물결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14세기 중반 흑사병이라 불리던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망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 여파에 대해서는 상세한 연구들이 진행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거시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미시적 관점, 즉 역사의 물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결정권을 지닌 정치가들 개개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뜻밖에 찾아 온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거물급 정치가 한 사람이 역사의 진행 방향을 좌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가 없었다면 20세기의 유럽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지 않았더라면 냉전 시대가 평화롭게 종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8쪽)
바빌로니아에서의 죽음
요절한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323년 6월, 대열을 갖춘 병사들이 죽음을 앞둔 이가 누워 있는 병영 앞을 느린 걸음으로 행진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관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막을 행군했고, 높고 험한 산을 올랐다.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힘든 일도 무수히 겪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위해 고난을 감내했고, 굶주렸고, 용맹하게 싸웠으며, 11년 동안 쉬지 않고 전장을 누볐다. 그의 뛰어난 지도력 덕분에 병사들은 전쟁에서 매번 승리했다. 병사들은 신이 자신들의 지휘관과 한편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지휘관이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아들이라고도 생각했다. 오늘 이 자리에 도열한 병사들은 수많은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은 이들이다. 수천 명의 전우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사막에, 지중해 해변에, 인도의 밀림 속에, 힌두쿠시 산맥에 묻혔다. 병사들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질병과 죽음이라는 패배보다 더한 고통을 경험한 역사상 가장 강인한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유프라테스 강 계곡 위로 따스한 빛을 뿌리고 한낮의 열기가 물러난 자리를 서늘한 저녁바람이 채우고 있는 바로 지금, 오래된 문명의 입김이 서린 바빌로니아 땅에 서 있는 병사들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병영에 누워서 사열을 받고 있는 남자는 힘없이 손을 흔들거나 보일락 말락 고개를 까딱였다. 그것은 지휘관이 부대원들을 알아보았으며, 이 인사가 영원한 작별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동방과 서방 사람들이 한 나라, 한 제국에서 같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저물었다. 또한 (그때까지 알려진) 세상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단 하나의 문화 속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들겠다는 비전, 학문과 예술, 문학과 철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를 창출하겠다는 비전도 사라졌다. 다시는 그와 같은 지도력과 의지를 갖춘 지휘관은 탄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함께 찬란한 꽃을 피운 헬레니즘 시대는 이후 몇 세대 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로마제국과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 문명에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거대한 권력을 쥔 인물 하나가 역사의 물길을 바꾼 사례는 지금까지 종종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젊은 군주 알렉산드로스와 동서 문화의 교류와 융합을 이루어낸 헬레니즘 시대의 전설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나폴레옹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무수한 영웅담을 써내려간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 시절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버금갈 만한 영웅은 찾아보기 어렵다. 2세기 무렵의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는 영웅들을 둘씩 짝을 지어 각자의 인물 됨됨이와 인생 여정, 업적 등을 비교한 《비교열전Bioi Paralleloi》이라는 저서를 남긴 바 있다. 《영웅전》이라는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그 책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견줄 만한 인물로 카이사르를 지목했다. 하지만 군대의 수장이자 전략가, 독재자로서 발군의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카이사르조차도 완전히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공화정 체제 하에서 로마의 영토를 확장했고, 기원전 44년 사망하면서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시대의 개막을 알렸을 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두 얼굴의 지배자였다. 당시 유럽 내 최대 제국인 페르시아에 대적하여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페르시아군을 용맹하게 무찌른 천재적 전략가였으며, 페르시아를 멸망시켰으나 이미 수많은 이들의 가슴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페르시아 문명을 존중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꽃피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기도 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나 개혁가들이 흔히 그렇듯 알렉산드로스 역시 천재적인 면모와 더불어 어두운 면모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족적은 폭력과 피로 물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레바논 땅이 된 항구도시 티로스Tyros가 대왕에게 맞서 항전하다가 몇 달 뒤 결국 항복 선언을 한 적이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복수극을 펼쳤다. 너무나도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라 역사적 기록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수백 년 뒤 기록된 어느 문서에 따르면 당시 8,000여 명의 남자들이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되었다고 한다. 2,000여 명은 십자가에 매달렸고, 1만 3,000여 명에 달하는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정복자가 분노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준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알렉산드로스는 매우 충동적이었다. 그는 당시 부어라 마셔라 하던 그리스식 관습에 따라 술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았으며, 과음을 했을 때면 어김없이 돌발행동이나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오랜 벗이었던 클레이토스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기원전 328년 어느 여름날 열린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알렉산드로스가 창으로 클레이토스를 찔러 죽였다. 클레이토스는 그날 ‘무엄하게도’ 알렉산드로스의 생활습관이 페르시아와 아시아의 관습을 닮아간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아시아인들은 야만인이요 멸시의 대상이었다그런가 하면 그리스인들은 아테네, 테베, 스파르타 사람들과 더불어 마케도니아인들을 멸시하기도 했다. 술에서 깬 알렉산드로스는 몇 주 동안이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자책감에 빠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동시대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몇몇 이들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대왕의 정복욕에 부담을 느낀 이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알렉산드로스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동방과 서방의 분기점에서 있던 고대 제국의 역사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물론 무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 역사의 물결이 어디로 흘러갔을지를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고대에 일어난 사건이나 그 시절을 살았던 영웅들이 유럽의 문화뿐 아니라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친 것만큼은 분명하다. 또한 지중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 확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헬레니즘 문명을 이어받은 로마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테베르 강 인근에 위치한 로마가 그리스-로마-서아시아 제국 내 수많은 대도시들 틈새에 낀, 그저 그런 도시쯤으로 전락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일 강 서편에 위치한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부상하지는 않았을까? 영국과 소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로마 영토인 유대 땅에 로마제국의 군대가 대규모로 주둔하지 않았다면 어느 목수의 아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약 600년 뒤 무함마드라는 선지자가 이슬람교를 창시할 수 있었을까? 이런 역사적 가정은 끝도 없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바빌로니아에서의 죽음’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초석이 되었고, 만약 대왕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더 뛰어넘는 결과가 탄생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대 문명은 철학, 문학, 예술 분야에서 걸출한 작품들을 남겼다. 건축 분야의 업적은 더더욱 눈부시다. 나일 강 부근의 각종 명소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이탈리아의 포룸 로마눔은 지금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고대 문명의 유적지들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폭력의 시절이기도 했다. 쾰른, 빈, 트리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경계 지역 같은 도시들 역시 관광객들의 발길을 꾸준히 끌고 있지만 그 장소들은 모두 길고도 지루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현재 지도상으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 같은 작은 지역 내부에서도 도시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아테네의 숙적이었던 스파르타처럼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국가도 있다. 쉽게 말해 그 시절은 폭력과 개혁, 전쟁과 창의력이 병존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356년 7월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삶도 그와 비슷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시절,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살해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필리포스 2세는 결혼식 연회에 참석했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젊은 왕자 알렉산드로스와 왕비 올림피아스가 그 암살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떠돈 것이다. 만약 그날의 혼인이 성사된다면 왕비와 왕자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의혹은 더 크게 불거졌다. 하지만 왕의 호위병이자 헤어진 연인이던 파우사니아스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가 살인범으로 체포되고, 그 즉시 다른 호위병에 위해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파우사니아스의 죽음 뒤에 또다른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왜일까? 암살자들은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부친의 사망 이후 왕좌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전쟁에 돌입했다. 우선 도나우다뉴브 강 인근에 위치한 이웃국가 트라키아부터 친 다음, 그리스 도시국가 대부분을 무력으로 복속시켰다. 알렉산드로스의 항복 요구를 거절한 보이오티아Boeotia의 도시들은 결국 마케도니아 군대에 정복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테베에서는 6,000여 명이 죽어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도시 전체를 파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당시 알렉산드로스가 높이 평가했던 테베 출신의 시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시인의 집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테베는 알렉산드로스와의 전쟁 이후 철저히 파괴되었고, 아직 정복당하지 않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그 모습을 보며 두려워했다. 이후 그리스 도시국가들 대부분은 페르시아 원정동방 원정에 동행할 병사들을 모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복수극이라 선동했지만, 페르시아 전쟁은 이미 150년도 더 이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방 원정은 기원전 334년에 시작되었다. 약 4만여 명의 알렉산드로스 부대가 쳐들어왔지만 그라니코스 강 인근에 집결해 있던 페르시아 군대는 겁먹지 않았다. 거대한 헬레니즘 제국은 건설하겠다는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에 반대하던 그리스 용병들이 페르시아로 대거 합류한 덕분에 수적으로 훨씬 더 우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케도니아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단박에 무찔러버렸다. 그 전투에서도, 그 이후의 전투에서도 알렉산드로스는 늘 대열의 선두에 서서 군을 통솔했다. 그만큼 강인한 체력과 담대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의 10년 동안 쉬지 않고 전투를 치르면서 건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기원전 333년 여름에는 건강에 이상이 생겨 몇 주간 진군을 멈추고 킬리키아Kilikia, 현재 터키 영토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폐렴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그것에는 친한 이들끼리 함께 모여 와인을 한껏 마시는 ‘심포지아Symposia’라는 그리스 문화가 한 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와 그 측근들에게 있어 술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들은 전투를 마치면 밤마다 둘러앉아 음주를 즐겼을 것이며, 이들에게 숨은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가 화재로 소실된 이유가 술 때문이라는 기록도 있다. 기원전 330년 5월 페르시아의 수도를 점령한 알렉산드로스가 승전 파티를 벌이던 중 술에 취해 페르세폴리스를 태우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후 한참 뒤에 작성된 궁정일지 형식의 기록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진 않지만 당시 과음을 즐겼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알렉산드로스의 최측근 참모이자 친구인 헤파이스티온도 기원전 324년 디오니소스 축제 때 열병에 걸린 상태에서 와인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며 헤파이스티온을 반신半神이라 선포한 후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담당 의사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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