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파트 단지 내 어디선가 베란다 창이 깨지는 소리에, 줄곧 국가 대항 축구 경기를 보느라 환호와 박수 사이 간헐적으로 섞여 들어오는 여성의 비명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그저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경첩에 발이라도 끼였나 보다 싶은 마음으로 그 소리를 모른 척했던 주민들은, 비로소 티브이 앞을 떠나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이드라인의 10층 집에서 깨진 창문 밖으로 치솟는 화염을 보고 심각성을 느낀 이들이 신고했으나 소방차가 달려왔을 때 문제의 10층 집은 이미 불꽃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어둠과 정적에 잠겨 있었고, 거실 쪽 이중창이 깨질 정도의 화염을 누가 무슨 수로 진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집 안으로 침투한 구조대원들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쭈그려 앉아 떨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민들이 의아하게 여긴 것은, 아슬아슬한 골 실패 장면마다 터져 나온 탄식과 구별이 어려웠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전까지 들려온 비명의 주인공은 그녀였을 것인데, 정작 창밖으로 떨어진 쪽은 그녀의 아비라는 사실이었다.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숨이 붙어 있던 남자는 구급차에 몸이 실리기 전 크게 뜬 두 눈에서 피를 흘리며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자기 집 창을 가리켰으며, 병원 도착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폴리스 라인 너머에서 사람들의 추측과 의혹이 부풀었다. 여기서 보통 사람들이 당장 떠올릴 만한 장면이라면, 무언가 알지 못할 구실로 아비에게 구타를 당하던 딸이 홧김에 혹은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으로 불을 지르고 그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두 사람의 체격과 체중을 비교했을 때 현실성이 희박하다는 점, 딸의 몸에는 일방적인 폭행의 자국이 남아 있으나 아비의 몸에서는 손톱자국 같은 저항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아비의 전신을 뒤덮은 2도 화상이 난투의 흔적을 녹여버렸다고 친다면 화상 자체가 딸의 반격의 증거라고 볼 수 있겠지만, 방화행위란 자신보다 크고 무거운 사람을 창밖으로 밀어 떨어뜨릴 목적으로 저지르기에는 효율성과 정확도가 떨어지는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아비는 당하고만 있던 딸이 돌변하여 불을 놓는 데에 놀라 뒷걸음쳤을 테고 이때 창문은 팽창한 열기에 의해 깨졌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 대목에서도 상식은 제 기능과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화염이 쓸고 간 검은 흔적은 소방대원들이 딸을 발견한 거실 중앙에서 베란다까지 퍼져 있었는데 그만한 규모의 불을 일반인이 혼자 진화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화재 발생 즉시 신속 침착 정확하게 소화기 판을 뽑아 분사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으나 딸이 발견됐을 당시의 신체 및 심리 상태로 보아 그건 무리였고, 우선 가정용 소화기부터가 거실과 떨어진 다용도실 구석에 따로 손댄 흔적 없이 놓여 있었다. 이후 현장 조사에서는 전기 콘센트, 라이터와 담배, 휴대전화 및 노트북 배터리나 양키캔들 등 발화점이 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고 가스 밸브도 오래된 매듭처럼 잠겨 있었다. 다수의 사람이 분명 목격했으나 아비의 추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뭔가 진화할 때처럼 서서히 잦아드는 게 아니라 그냥 확, 두꺼비집 나간 식으로요.” ― 맞은편 아파트 같은 층의 목격자) 그 불 한가운데서, 만일 직접 불을 붙였다 치면 본인이라고 무사했을 리 없는데 딸의 몸에는 가벼운 화상조차 없었다. 호사가들은 그 아비의 몸이 불탄 것이 인체 자연발화 현상이 아닐까 떠들었지만 진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는데, 문제의 딸이 현재 어머니 곁에서 요양 중인 상태로 입을 열지 않다가 경찰의 강도 높은 추궁으로 인한 두 차례 발작 끝에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어서였다. 한편 위아래 집과 옆집에 불똥이 튀지 않았음은 물론 아파트 외벽에조차 그을음이 묻지 않아서 타인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기에도 애매한 수준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당분간 미제로 남을 전망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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