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1930년대 후반의 대표 시인으로 우리는 백석과 이용악을 주목할 수 있다. 백석이 자기 고향인 평북지방에 토착한 삶과 언어들로 자신의 독창적인 시세계를 이루었다면, 이용악은 일제에 의해 절멸한 현실주의와 서정성을 한데 아우른 시적 성취로서 돌올하다. 특별히 1930년대가 우리 근대시의 몸이 완성된 시기라는 문학사적 관점에서 이러한 성취는 더욱 값지다. 요컨대 그 몸은 정신적인 자유의 추구와 모국어의 미학적 충동이 지양된 몸으로서 우뚝하다. 따지고 보면 이용악과 같은 시인이 있어 시가 사회 역사적인 현실과 개인적인 내면을 마주 세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2014년은 이용악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용악 문학의 의의와 재조명의 필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터이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현저히 그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 이용악 시 연구의 가장 큰 원인은 새로운 연구 지평에 어울리는 이용악 전집의 부재, 무엇보다 정본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1988년에 윤영천 선생에 의해 창작과비평사에서 묶여 나온 『이용악 시전집』의 발간은 해금과 함께 이용악에 대한 시적 집중을 낳은 마중물이었다. 『이용악 시전집』의 발간과 함께 해금 이후 이용악 시에 대한 연구는 커다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의 시전집은 무엇보다 월북 이후의 이용악의 발자취를 보여줄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유통되는 『리용악 시선집』이나 북한 체제 내에서 활약한 이용악의 여러 시적 편린들은 연구 대상으로서 이용악의 시를 보는 안목과 시야를 키워 놓았고, 기존의 전집은 확대된 연구 지평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이용악시전집에 대한 요청은 안팎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같은 재북, 월북 문인으로서 북에서의 시적 여정을 포함하여 발간된 백석의 전집이 이미 재북 시기의 백석의 시를 포괄하는 연구의 지류를 뚜렷하게 형성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용악의 전집은 해방 이전의 시적 성취에만 국한하여 시와 시인을 거론할 수 없이 확대된 연구 지평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북한 문학의 지형에 밝지 않은 연구자들로서는 심심찮게 발견되는 이용악의 시들이 더욱 그 외연을 가늠할 수 없게 하여 연구 의욕을 떨어뜨리는 한편 사실상 기존의 정본인 창작과비평사판 『이용악시전집』이 절판되어 이런 사정은 이용악 시 연구에는 더욱 악재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용악의 시는 비단 1930년대에만 국한하지 않더라도 그 시적 성취가 문학사적 지형 위에서 중요하고, 분단 시대에는 서로 다른 정치 제체 위에서 자신의 시를 우뚝 세워 놓은 것으로서 더욱 주목을 요한다.
사실 그대로의 이용악의 문학적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전집의 필요성은 그러므로 절실한 것이라고 하겠다. 「북쪽」이나 「오랑캐꽃」, 「전라도 가시내」와 같은 명편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월북 이전의 이용악의 시적 성취가 더 중요하겠지만, 같은 이유로 「평남 관개 시초」도 중요하다. 월북 이전의 이용악의 시적 성취 때문에 이용악의 시적 전모는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통일시대의 문학사적 굴절을 이용악의 시보다 더 잘 담고 있는 텍스트는 없을 것이다. 이용악의 시를 통해서 이 이중의 이데올로기는 극복될 필요가 있다.
이번에 새로 발간되는 이용악 전집의 특징은 시를 포함해 산문과 기타 자료를 모두 망라하였다는 데 있다. 산문집 『보람찬 청춘』이나 ‘좌담’ 자료까지 망라된 새 전집은 이용악의 전모를 보고 싶어하는 연구자에게는 횡재라도 만난 듯한 기쁨을 줄 것이다. 물론, 이 뛸 듯한 기쁨은 편자들이 먼저 누렸던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전집은 이용악 시 연구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이용악의 시를 사랑하는 일반 독자에게도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현대어 정본을 수록한 것은 이용악의 시가 다른 시인들의 경우처럼 문학사적 연구 대상을 넘어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사랑받는 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므로 이 전집의 체제는 전체적으로 시와 산문으로 나누고, 시는 원문과 현대어 정본으로 나누어, 각각을 다시 시집의 체제에 따라 싣고 시집 미수록 시의 경우에는 월북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실었다. 이용악의 경우는 월북 이전에 이미 시선집을 간행하는 등 선집 작업이 시인 스스로에 의해서 두 번이나 이루어졌는데, 이를 시집 단위로 전집에 포함시킴으로써 중복 작품을 판본별로 비교 가능하도록 하였다. 특별히 시는 원문과 현대어 정본으로 나누어서 제시했는데, 원문은 연구자들이 편자의 가감 없이 수록 지면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차별화하였다. 또한 정본화 작업과 함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어휘에는 주석 작업도 진행하였다.
이러한 전집이 나오기까지는 만만찮은 노력과 품이 필요하였다. 늦어도 이용악 탄생 100주년에는 이용악 전집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이용악 연구자들이 모여서 일의 진행을 의논하고 충실히 그 계획을 이행한 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일일이 감사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분들의 노력이 보태어진 결과라는 점을 우선 말씀드려야겠다. 중심 편자는 곽효환, 이경수, 이현승 세 사람이지만, 중앙대학교와 고려대학교, 한양대학교, 동국대학교의 대학원 연구자들이 자료 수집과 입력과 교정에 함께 참여하였다. 이용악 전집 작업에 직접 참여한 분들은 일일이 이름을 밝혀 출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집의 발간은 일종의 집단 지성의 결과물이라고 하겠는데, 그만큼 편집상의 일관성 위에서 산만하게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배치하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가장 큰 기쁨은 비록 시어 하나일지라도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판이란 늘 인쇄와 함께 새로운 문제를 노출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전집에도 오류가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전집을 준비하는 동안 편자들은 상당히 많은 오류를 확인하고 바로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있다. 이 전집이 이전의 전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외연을 갖추게 된 데에는 많은 선행 이용악 연구자들의 도움이 있었다. 전집의 2부에 제시된 산문 『보람찬 청춘』은 인쇄물로서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이다. 산문집 『보람찬 청춘』을 기꺼이 제공해 준 원광대학교의 김재용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용악의 북한시 「산을 내린다」, 「피값을 천만배로 하여」, 「앞으로! 번개같이 앞으로!」를 찾아준 가천대학교의 이상숙 선생님, 이용악의 북한시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준 가천대학교의 신지연 선생님, 「거울 속에서」를 제공해 주신 인하대학교의 최현식 선생님, 이용악의 해방기 활동에 대해 조언해 준 고려대학교 대학원의 박민규 선생님, 이용악의 좌담회 자료와 「우리를실은배 埠頭부두를떠난다」 원문을 제공해 준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한아진 선생님, 일본의 학적 자료와 월북 이후 이용악의 좌담회 자료를 찾아준 고려대학교 대학원의 김동희 선생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이분들의 도움 덕에 이 전집이 좀 더 내실을 기할 수 있었다. 아울러 부록에 실은 이용악 연보와 작품 연보는 윤영천, 최원식, 이정애, 한아진 등 선행 연구자들의 작업을 확인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 작성되었다. 자료의 수집과 입력, 교정 등의 작업에 함께 한 고려대학교,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여러 연구자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전집을 보기 좋게 만들어주신 소명출판의 박성모 사장님과 공홍 편집장님, 안솔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새 전집이 연구자와 독자 일반에게 두루 사랑받는 일은 편자들이 갖는 단 하나의 소망이다. 이 모든 기쁨을 또한 이용악 시인에게 돌린다.
2015년 겨울 곽효환, 이경수, 이현승
오랑캐꽃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쳐들어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백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울어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