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고대 한국 사회와 도서관
1. 역사서술의 구분과 도서관의 정의
역사 연구에 있어 시대 구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문자 발생 이전의 선사시대와 문자로 남겨진 기록을 통해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문자 이후의 역사시대로 나뉘며, 우리에게 익숙한 고대, 중세, 근대 등의 시대 구분은 역사시대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고대는 문명의 형성 또는 국가의 발생이 나타났던 시기와 관련이 있으며, 한국사의 경우 1960년대 이전에는 신라 말과 고려 초기를 고대로 보는 경향이 일반적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고조선과 초기 삼국으로 그 시기가 재인식되었다. 한편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고대의 시간적 범위를 선사시대로부터 고려 성립 이전까지로 보고 있다.
백린白麟의 『한국도서관사연구韓國圖書館史硏究』에서는 왕권의 교체와 정치의 변동을 중심으로 삼는 일반 사학가들의 구분방법을 따라 고조선, 삼국, 고려, 이씨조선, 대한제국의 다섯 시기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교과과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대의 시간적 범위를 수용하여 역사시대로 구분되는 고조선에서 고려 성립 이전까지를 한국사의 고대로 보고 이 시기 동안 도서관과 관련된 역사를 백린의 『한국도서관사연구』와 관련하여 기술하였다.
백린은 『한국도서관사연구』에서 ‘도서관’에 대한 정의는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국가 전적을 총괄하던 왕실 문고를 위주로 하여 다루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의 서적 전래로부터 역사 기술을 시작하는 것에서 보건대 영어의 ‘library’가 책을 읽거나 학습을 위해 모아 둔 책의 집합을 가리키거나 그러한 책들이 모인 방이나 건물을 뜻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책들이 모인 장소’로서의 도서관으로 그 역사를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서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 서적을 두는 장소의 명칭은 중국의 경우 석실石室, 각閣, 관館, 루樓, 고庫, 당堂, 정亭 등을 고유명사나 기타 어휘에 연접하여 사용하였고, 우리나라도 원院, 관館, 전殿, 각閣, 고庫, 루樓, 실室, 관館 등을 사용하였다. 이후 19세기에 접어들어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서관書館, 종람소縱覽所 등의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하다가 광무 10년1906에 대한도서관 설립 발기회를 통해 ‘도서관’이라는 명칭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2. 고조선 시대의 책과 도서관
낙랑 유적과 문서고
고조선의 본래 이름은 조선이며,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관자管子』라는 중국의 역사책을 통해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고조선이 중국으로부터 8천 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특산으로 하는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8천 리는 물리적인 거리라기보다는 멀다는 형용격의 서술이라고 보아야 하며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 중국의 교역 대상으로서 국가 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은 이미 이 시기에 고대국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고조선에서 도서관의 모습을 찾고자 한 시도는 백린의 『한국도서관사연구』가 유일하다. 백린은 『한국도서관사연구』에서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서적 전래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간주하고,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의 뿌리를 중국에서의 서적 전래 시기부터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서적의 전래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으로 언급되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자조선箕子朝鮮설은 오늘날 사학계에서 인정하고 있지 않은 학설이다. 기자조선설은 은殷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5천 명의 사람을 이끌고 건너와 조선을 세웠으며, 중국의 예禮, 악樂, 시詩, 서書, 의약醫藥, 복서卜筮, 점술 등의 문물이 함께 전해졌다는 기록이다. 따라서 백린은 중국으로부터의 서책의 전래를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어 있었던 대동강 일대의 낙랑樂浪 유적을 통해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전한시대 낙랑군의 소재지가 지금의 대동강 남안 대동강면大同江面 토성리土城里이고, 여기서 출토된 봉니封泥와 인장印章, 와전瓦塼 등의 유물을 통해 서책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봉니는 보통 나무를 깎아 글을 적은 후 덮개를 대고 노끈으로 묶어 촛농이나 진흙을 붓고 채 굳기 전에 그 위에 인장을 눌러 봉한 것으로 오늘날의 우편물편지과 같은 것인데, 토성리 일대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이라는 문자가 적힌 와당瓦當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이라고 압인한 봉니가 다량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백린은 한사군을 다스리던 낙랑태수의 인장이 찍힌 통신문서가 존재했었고, 건물의 지붕에 사용하는 기와의 일종인 와당의 존재를 들어 이러한 문서를 보관하는 문서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한사군의 위치가 조작된 것이며, 출토된 유물의 가짜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과 이도성을 비롯한 일부 사학자들은 결코 한반도에 있었다고 추정하기 어려운 한사군의 위치가 평양으로 굳어진 것은 한국 역사를 중국 식민지와 일본 식민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인식하게 하려는 식민사관 때문이며 조선사편수회의 의도를 따른 국내 식민사학자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중국 본토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봉니가 2천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깨끗한 보존 상태로 발굴된 것을 의심하는데, 봉니는 열면 바로 부서져 버리기 때문이다. 개봉도 하지 않은 다량의 봉니가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문헌에도 없는 현의 이름이 찍힌 봉니가 다수 섞여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이것이 진품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사군과 한나라의 도서관 제도
백린은 낙랑이 한나라의 속국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한나라의 문물이 수입되면서 책과 도서관 제도도 일부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우선 백린은 『한서漢書』 소하전蕭何傳에 실린 글에서 문서고로서의 석거각石渠閣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 내용은 한고조가 진나라 수도 함양을 공격했을 무렵에 그의 참모였던 소하가 먼저 입성하여 진나라의 법률집과 도서를 거두어 이를 석거각에 모아두었다는 것이다. 또한, 반고班固의 『한서』 예문지藝文志에는 성제成帝가 내시부에 명령해 시중에 흩어져 있는 책들을 모으게 했는데 사방에서 많은 책이 나와 이 서적들을 모아서 서부書符에 두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 국가 장서 관리의 시작은 한무제漢武帝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물론 하간헌황河間獻王 역시 조정에 필적할 정도의 많은 책을 사재를 털어 모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한무제는 민간에서 널리 책을 모으고 전문 부서를 설치해 그것을 베껴 쓰게 함으로써 100년 사이에 조정에 산더미만한 책을 쌓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설치된 전문 부서는 장서부藏書部이며, 사서관寫書官을 임명하여 서적의 소장과 보관을 책임지도록 하였는데 이것을 비서제도라고 한다.
그 후 한나라의 장서사업은 더욱 발전하여 여러 곳에 장서각을 설치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기린각麒麟閣, 천록각天祿閣, 석거각石渠閣, 석실石室 등이다. 기린각은 한나라 왕실의 궁전인 미앙궁未央宮 안에 있었던 것으로 한무제 때 건립되었다. 천록각은 궁중에 있었던 장서각이며, 어느 때 건립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기린각과 천록각은 모두 한나라 시대의 국가도서관으로 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 규장각의 내각과 같은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처럼 한나라 시대에 이미 국가의 장서 관리가 시작되어 국가도서관이 설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고조선에 전래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즉, 고대사에서 기록으로서의 책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은 다양하게 남아있지만 아직은 이 내용을 고증할 수 있는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