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맑스나 그 밖의 중요한 변혁사상가들의 글을 읽기 훨씬 이전에, 예컨대 블레이크와 같은 시인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근대문명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부조리하고 야만적인 것인가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 한번 블레이크의 문학에 경도되기 시작한 나는 그 이후에도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인, 작가, 평론가들을 차례로 발견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들은 한마디로 ‘근대’의 어둠에 맞서서 ‘삶-생명’을 근원적으로 옹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책머리에’ 중에서)
블레이크의 급진적 상상력과 민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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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상상력의 시인’ 혹은 ‘에너지의 시인’으로 일컬어져온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에 대한 관심은 근년에 이르러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직은 블레이크의 작품을 읽고 따져보는 일에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 여유가 있는 독자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비록 한정된 범위의 독자들이지만, 그 독자들이 느끼는 블레이크의 중요성은 이제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억압과 비참을 제도화해온 산업문명의 위기와 모순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삶의 상황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여타의 시인, 작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와 산문에 개진된 사회적·정치적·철학적 발언들은 유럽 근대 지성사 전체의 맥락 속에서도 최고 수준의 심오한 사색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작품들이 삶의 다양한 국민들에 대한 이러저러한 부분적·파편적인 관심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의 발흥으로 뿌리로부터 뒤틀려온 인간생존의 현실에 관한 가장 근원적이며 포괄적인 지적·도덕적·정신적 성찰에 토대를 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성찰은 블레이크 자신의 평생에 걸친 ‘인간해방’에의 강력한 실천적 관심에 결부되어 있었다.
실제로, 블레이크의 시적 노력은 언제나 ‘억압받고 있는 자들의 해방’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다른 시인이나 작가들보다도 일반 대중 속에서 널리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보다 많이 갖고 있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의 작품은 극히 소수의 독자들 사이에서만 그 존재가 알려져 왔다. 물론 이런 현상은 블레이크라는 특정 시인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낭만주의시대 이후 서구의 예술에서 두드러진 현상이 된 대중과 예술 사이의 간극이라는, 보다 폭넓은 사회사적 요인에 따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술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현상은 예술가들 개인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사태였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경우, 예술가들 자신이 이 소외현상의 심화에 상당한 정도로 기여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고립화의 경향을 합법화하고 이념화하는 개인주의적·엘리트주의적인 성향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고립’은 그러한 개인주의 혹은 엘리트주의적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그는 실제 생활이나 작품활동에서 여하한 개인주의적·엘리트주의적 입장에 대해서도 늘 강한 거부감 내지는 적대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블레이크의 시, 특히 후기 작품들이 극히 난해하고, 그 결과 일반 독자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결코 블레이크의 엘리트주의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이 문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후기 서사시들에 있어서의 블레이크의 난해성은 기본적으로 양심적인 사회적·정치적 발언이 극도로 봉쇄되어 있던 당대의 언론 상황에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짐승과 매음부가 거리낌 없이 활개 치고 있는” 시대로 통매하였다. 블레이크 자신의 말을 빌리면, 불의와 불경不敬이 만연한 시대에 “바이블을 옹호한다는 것”은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될 정도로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K. 388. 그것은 당대의 지배체제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반역 행위였고, 따라서 거기에는 가혹한 징벌이 수반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블레이크가 ‘바이블을 옹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인간 불평등을 합법화하고 지배와 억압의 구조를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국가종교State Religion의 위선과 허위를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블레이크 당대의 ‘국가종교’란 체제의 버팀목으로 기능하고 있는 기독교 교회였다. 블레이크가 이해하는 당대의 기독교 교회는, 간단히 말하면, ‘사탄’이었다. 블레이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보다 인간의 보편적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옹호하는 것이었지 결코 인간 차별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블레이크에 의하면, ‘정치와 종교는 하나’이다. 따라서 국가종교에 대한 그의 격렬한 규탄은 민중 위에 군림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에 맞서는 그의 언설은 지배세력으로부터 늘 감시를 당하고, 때로는 혹독한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작품과 발언에는 사상적 검열을 의식한 상당한 정도의 난해성이 포함되는 게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작품의 난해성에 관련해서는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여기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현대의 지식인 독자들이 아니라 블레이크의 다수 동시대인들에게도 과연 블레이크의 작품이 그렇게 난해한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블레이크의 난해성은 기본적으로 그가 계승한 급진적 민중문화의 전통에 친숙하지 않거나 거기로부터 등을 돌려온 현대의 많은 지식인 독자들에게 어쩌면 더 큰 책임이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른바 주류의 비평가나 학자들이 블레이크를 불필요할 정도로 난해한 시인으로 부각시켜왔고, 그 결과로 블레이크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상당한 정도로 저지돼왔다는 것은 전적으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비평가나 학자들의 개인적 자질 문제 이전에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보다 일반적인 지적·정신적 풍토에 연유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게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행해지는 문화적 활동 및 학문 연구는 일반적으로 급진적 민주주의의 전통에 입각하여 인간 현실을 묘사해온 ‘진보적’인 문학자와 예술가들의 업적을 폄하·왜곡하거나 과소평가하는 뿌리 깊은 경향을 드러내왔다. 이러한 경향은 아마도 현대적 문화나 학문 연구의 근저에 있는 ‘노예근성’ 혹은 매판성에 그 궁극적인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오랫동안 블레이크와 같은 ‘급진적’ 시인이 정당한 이해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부르주아적 문화체제의 지배 밑에서 형성된 사고습관이나 편견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한 사고습관 혹은 편견 중에서 블레이크에 관련하여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은 전통에 대한 해석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한 문화체제는 단 하나의 공식적 전통을 유일한 전통으로 인정·옹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공식 문화의 전통과는 별개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한다기보다는 그것과는 다른 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사물은 누가 어떤 처지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의 ‘인식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관해서는 블레이크 자신이 일찍이 극히 인상적인 비유를 가지고 간파한 바 있다. 블레이크는 “바보들의 눈에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한 닢의 금화로 보이겠지만 상상력의 눈으로 보면 천사들이 합창하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말했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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