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 변혁과 미완의 출발
홍희담 , 「깃발」
떠난 자와 남은 자
홍희담은 1945년 서울 원효로에서 오 남매의 장녀로 태어났고 본명은 홍희윤이다. 여고 때 『학원』지에 산문이 입선되었고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여 문학 서클에서 활동했다. 졸업 후에는 교직에 있다가 베트남에서 돌아온 소설가 황석영과 만나게 된다.
나는 전장에서 멍청한 기분으로 돌아와 다시 이전의 무한하고 두렵던 가능성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전쟁을 겪은 자는 이미 젊지 않다’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나는 전투도 했고 사람도 죽였을지 모르며 그밖에 더욱 나쁜 짓을 저지르고 귀환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낮에는 자고 밤에는 멍청히 일어나 앉아 공상이나 하면서 그때를 보냈다. 심한 자기혐오감 때문에 옛 친구도 하나 만날 수가 없었고 가족들과도 말하기 싫을 정도로 폐쇄되어 있었다. 어느 날은 악몽을 꾸다가 발을 밟고 지나가던 동생의 머리를 화병으로 때렸던 적도 있었다. 참으로 끔찍하게 자폐되어 있던 나날이었다. ‘자기표현’이란 것에 굶주려 지내던 때였다. 묘하게도 이 시기의 삭막한 생활을 이겨내고 다시 글을 쓰게 된 것은, 그 무렵에 주소만 아는 어떤 상대를 향하여 밤마다 써대던 연애편지의 힘이었다. (황석영, 「나는 왜 작가가 되었나」)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던 추석 전날, 그이의 집을 찾아 나섰던 내가 골목에서 그이의 남동생을 먼저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아무튼 1971년에 우리는 결혼했다. 그뒤로 우이동 수유리 부근과 신촌에서 대림동에 이르는 여러 셋집을 전전하는 동안에 아들(작곡가 황호준)과 딸(황여정)이 태어났다. ‘전업작가’를 하겠다는 나의 철없는 각오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견뎌주었던 참을성 많은 사람이었다. 생활비는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쌀이 떨어지는 날도 있었다. 알량한 단편 몇 편을 써서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내놓고는 지방으로 싸돌아다니고, 심지어는 구로공단에 위장취업까지 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진 것은 1974년 첫 소설집 『객지』가 나오고 『장길산』이 연재되어 다달이 일정액의 고료가 나오게 된 뒤부터였다. 구금과 잠행이 이어지던 1976년 가을에 우리는 전라남도 해남으로 이주했다. 연재 원고를 쓰는 시간 이외에는 다시 농민학교운동이다 전남 현장문화운동이다 하면서 나는 해남 인근의 군을 돌아다니거나 광주로 자주 출타했고, 그이는 이제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의 어린것들을 돌보고 전국에서 나를 찾아온 활동가들과 인근 군읍의 농민들을 밥 지어 먹였다. 해남의 방 두 칸에 마루가 딸린 그 작은 집에는 언제나 식객이 서넛씩 머물렀고, 이런 일은 우리가 광주로 나가고 어머니가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살게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시인 김남주가 서울로 도피한 뒤에 그 빈자리를 그맘때에 출소한 윤한봉이 채웠다. 광주에는 4·19 이후 학생운동의 전통이 끊기는 듯하다가 내 또래로 6·3세대였던 박석무, 이홍길이 선배로 남아 있었고 그뒤를 ‘민청학련’ 세대가 잇고 있었다. 나는 윤한봉과 함께 ‘현대문화연구소’를 설립했는데 홍희담은 나중에 내게 알렸지만 해남 집을 판 돈의 일부를 기부했다. 그밖에도 야학, 청년회, 여성회, 양서조합, 문화패 등의 조직들이 있었다. 홍희담은 광주로 이사한 1978년 겨울에 연구소의 창립과 더불어 민주여성단체 ‘송백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창립할 때에 총무직과 회장직을 맡으면서 그는 단체를 성실하고 겸손하게 이끌었다. 민주화운동권 남성들의 부인들 친목모임으로 시작해 이듬해에는 운동단체로 조직을 넓히고 체계화했다. 민주인사들의 전국적인 옥바라지 사업을 하면서 정기적인 학습모임도 가졌다. 구속 또는 수배자 가족, 교사, 주부, 시민운동가, 노동자 등 다양한 여성들이 참여했다. 송백회는 바자회나 전시회 등을 열어 구속자 옥바라지와 수배자의 도피 자금을 꾸준히 제공했다.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유신이 끝난 뒤에 검거되었던 윤한봉이 풀려났고 얼마 후에 나도 계엄법 위반으로 상무대에 갇혀 있다가 기소유예 판결을 받고 나왔다. 1980년 초에 우리는 그래도 신군부가 섣불리 나서지는 못할 것이며 적어도 일 년은 ‘과도정부’를 유지할 거라고 보았다. 또한 현대문화연구소 활동을 더욱 범시민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문선대인 ‘광대’의 거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봄부터 연구소 이웃 건물 지하에 소극장을 마련하기 위해 중도금만 치르고는 조명장치와 좌석 설치 공사에 들어가 있었다. ‘광대’ 단원들은 극장 창립공연작으로 <한씨연대기>를 연습중이었다. 우리는 도청 남서쪽 기독병원 근처인 양림동에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계셨지만 문간의 사랑방은 언제나 여성회, 청년회, 문화패, 청년들로 붐볐다.
나는 1980년 5월 16일 소극장의 계약금을 받으러 상경했다. 집에는 어머니가 앓아누워 있었는데, 내가 구속되어 있던 그해 겨울에 눈길에 나섰다가 낙상하고 허리를 다쳐 입원 치료를 하다가 집에서 요양중이었다(어머니는 꼭 일 년여를 누워 앓다가 이듬해 2월에 세상을 떠난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무심하게 볼일을 보러 상경길에 올랐고 출판사에서 주말이라 은행이 닫혀 월요일에나 계약금 지불이 된다는 말에 할 수 없이 토요일 일요일 이틀을 서울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5월 17일 저녁에 신촌 근방의 주점에서 화가 여운과 앉아 있었는데 어떤 젊은이가 뛰어들어와 내게 급히 알렸다. 이화여대에서 가진 전국총학생회장단 모임이 계엄당국의 기습을 받아 많은 학생이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리영희, 고은, 이호철 등 선배들의 집에 전화하니 그들은 이미 예비검속 되었고, 연이어서 재야인사와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들까지 연행되어갔다고 했다. 나는 집에 연락해보고 싶었지만 나처럼 ‘찍힌’ 사람이 전화를 놓기가 쉬운 일이 아닌지라 집에는 연락할 길이 없었고, 연락해볼 만한 곳은 ‘녹두서점’뿐이었다. 녹두서점에 연락하니 그 부인이 김상윤을 비롯한 많은 청년들과 재야인사들이 검거되어 갔다고 전한다. 다시 우리집 근처 여성회원으로 나중에 목사가 된 김은경에게 전화를 하여 홍희담과 통화할 시간만 정하고는 그날을 넘겼다. 5월 18일 오후에 광주에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공수부대와 시위대 간의 첫 충돌인 전남대 정문 앞 사건과 공용터미널 사건이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녹두서점에서는 공용터미널에서 이미 시위대의 시체가 몇 구 나왔다고 전해왔다. 오후 늦게 통화가 된 그이는 칠팔 명의 합동수사부 요원들이 어제 집에 들이닥쳤다고 알려주었다. 어머니는 괜찮으시냐 물었더니 방마다 뒤지고 다니던 그들에게 “이놈들아, 신발 벗어!” 하고 호통을 치셨다는 것이었다. 자주 통화할 수 없을 테니 김은경을 통해 연락하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서울에서 잠행하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광주로 갈 거냐 말 거냐를 논의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은 가운데 내 역할에 대한 주위의 의견이 나왔다. 서울에서 ‘광주’를 알리는 작업과 함께 뒷일을 감당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나는 허병섭 목사 등과 함께 유인물 작업을 하여 활동가들과 더불어 서울 시내에 살포하기로 했다. 작업을 하러 문동환 목사네 ‘새벽의 집’에 갔더니 미국계인 그의 부인이 짐을 싸서 공항으로 나가면서, 미국의 견해로는 신군부가 정권을 잡을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무렵에 광주에서는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실탄사격이 시작되었고, 홍희윤은 적십자병원과 기독병원 등에서 사람들에게 헌혈을 호소하였으며, 도청 분수대의 시민 궐기대회에 나가서는 투쟁에의 동참을 연설하기도 했다. 그이는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한 뒤에는 여성들과 함께 도청에 들어가 취사를 도왔다.
소설가의 아내 홍희담은 사태 이후 시내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녀는 도청 앞 집회에서 자신을 운암동에 사는 주부라고 소개하면서 마이크까지 잡았다. 왜 싸워야 하는지, 왜 끝까지 총을 내려놓으면 안 되는지 말했다. 5월 26일, 그녀는 도청에 들어갔다. 낯익은 시민군 한 명이 손짓을 했다. “오늘밤이 고비일 것 같은데……”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 총 한 자루를 내밀었다. “나중에 무등산에나 묻어줘요.” 계엄군의 동태가 전해지면서 도청 안이 술렁거렸다. 그가 등을 떠밀었다. 홍희담은 그를 껴안으며 흐느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홍희담은 총을 내려놓고 도청을 빠져나왔다. (문화일보, 2003. 8. 27.)
당시 여덟 살 외동아들이 걸려 마지막 순간 도청에 남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그때 만난 노동자들의 그 선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 죽음을 넘나드는 절박한 순간에 꽃피던 동지애…… 홍희윤에게 그것은 평생을 안고 살아갈 자산이 됐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역사의식에 눈을 떴다.이후 홍희윤은 두 차례나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협박을 당했다. 1980년 5월항쟁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 때 송백회의 자금책으로 몰려 경찰에 시달렸다. 결국 그해 송백회는 겉으로 해체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여성노동자들과 구속자 지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엔 황석영의 평양 방문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하려던 안기부에서 닦달했다.홍희윤은 인터뷰를 지독히 싫어한다. ‘나는 한 일이 없어. 그냥 광주 시민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야.’ 수줍게 손사래를 칠 뿐이다. 하지만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한 소녀 같은 열정과,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이 어느 5월 그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쓴 글이 바로 1988년 ‘작가 홍희담’으로 세상에 첫 선을 보인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은 5월 도청에서 살아 숨쉬었던 모든 노동자들이다.”“예술가들은 날마다 들썩여.” 아들과 며느리까지도 모두 예술의 길을 걷고 있으니 자신만이라도 일상의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한다며 기꺼이 손주들을 보살피고 있는 할머니. 그래도 ‘5월은 그를 미치게 하는 그 무엇이다’. 해마다 그날이 되면 한 번씩 그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는 그 어떤 폭풍 같은…… 잠들지 않는, 잠들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한겨레, 2010. 5. 4.)
항쟁이 진압되자마자 윤한봉 등의 광주 후배들이 상경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소식도 들려왔다. 나는 그이의 항쟁 기간 활동을 듣고 있어서 통화가 되자마자 아이들과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고, 그이는 다들 잘 있다고 하면서 “상원씨가 죽었어요!”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미처 자세히 듣지 못하고 평소처럼 목에 힘주어 말했을 것이다. “애들도 있고 어머니도 계신데 당신은 가정주부야. 경거망동하지 말고……”라고 말했을 때에 그이가 여느 때와는 달리 격하게 받았다. “경거망동이요? 당신 작가야? 사람이냐구!” 수화기를 통해서였지만 나는 그이의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은 격정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현장과 떨어져 있는 곳과의 ‘거리감’이었다. 그이가 보내기도 하고 스스로 올라오기도 했던 남녀 도피자들이 십여 명이었는데, 나와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일일이 챙겨서 숨겨주어야 했다. 나는 항쟁 진압 후 한 달이 지나서야 광주로 돌아갔고 나중에 알았지만 합수부 광주 책임자가 군인이었던 고교 동창이었다. 그의 권유에 의하여 제주도에 건너가서 일 년의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거기 가서도 문화패 ‘수눌음’과 ‘제주문제연구소’를 꾸리고 제주도 문화운동 일세대가 되는 이들과 합력하여 소극장 ‘수눌음’을 설립한다.
그동안에도 홍희담은 옥바라지와 도피자들 후원을 계속했고, 내가 광주로 돌아가 광주 진상을 알리기 위한 ‘일과 놀이’며 ‘방송 테이프’ 작업을 다시 시작했을 때 그이는 항쟁 기록에 착수할 자료를 모으는 ‘르포’팀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이는 되도록 골치 아프고 복잡한 문제는 오히려 자기 선에서 끊어서 내게 넘어오지 않도록 애를 썼다. 나는 십 년 동안 연재해오던 『장길산』 작업의 끝마무리를 위해 골몰하던 때였다. 홍희윤은 현대문화연구소 사무총장을 맡은 정용화와 함께 서울에 숨어 있던 윤한봉을 미국에 망명시키기로 결정하고 나중에 노무현의 수석을 했던 정찬용의 아우에게 부탁했다. 그는 외항선원이었고 곧 레오파드호가 마산항에 들어온다고 알려왔다. 나는 홍희윤에게서 그냥 ‘윤한봉 해외로 보낼 거야’라는 귀띔만 들었고 그이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것이 어느새 활동가가 되었던 우리 부부의 원칙이었다. 그이는 신학생이던 김은경을 윤한봉에게 보내어 신혼여행처럼 가장하고 그이의 대학 친구인 마산 YWCA 총무 집에 숨겼다가 배가 출항하기 전에 선원들 틈에 끼워 승선시키도록 했다. 다른 곳에서 자세히 쓸 기회가 있겠지만 사십 일 만에 망명자는 미국에 도착했고 영양실조로 장기간의 요양을 했을 정도였다. 미국에서는 개신교회와 민주당의 케네디 인권사무소가 그의 신변을 맡았다.
우리 부부와 가까웠던 독신의 여성 화가가 있었는데 홍희윤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아틀리에에 윤한봉을 숨겨두었고, 송백회에서는 박효선과 윤한봉을 지원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 화실에 시인 이광웅, 김문자 부부가 방문했다가 윤한봉과 마주치는 사고가 일어난다. 윤한봉에게서 광주의 실상을 듣고 괴로워하고 분노한 이광웅은 군산에 내려가자마자 지역 지식인 교사들과 더불어 독서회를 만들었고 이것이 전북 도경에 포착된다. 이들에게서 수배자 윤한봉의 이름이 나오자 당국은 대대적인 간첩사건을 만들려고 한다. 이광웅 시인의 독서회사건이 터졌으니 당국은 윤한봉이 아직 국내에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홍희윤이 어느 날 갑자기 연행당하면서 서울에 연락하라는 귀띔을 했고, 나는 최권행과 통화를 하고 나서 급박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한봉을 숨겨준 홍정경 화가와 연락인 최권행은 물론 산동네에 여럿을 숨겨주었던 이동철 등이 모두 저 유명한 이근안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간 것이다. 화가 홍섬담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홍희담의 석방을 위하여 나는 광주 미문화원장을 만났다. 문화원 근무자는 내 오랜 독자로 광주사건 관계자에게 매우 동정적인 청년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문화원장을 만난 나는 미국에 이미 망명하여 에드워드 케네디 측의 신변보호를 받고 있는 윤한봉을 도피시킨 연유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만약 이대로 가면 나는 여러 매체에 글로 써서 대중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떠들썩하게 알리겠다고 말했다. 절박한 심정에 으름장을 놓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난처한 정치적 문제임을 이해했다. 아무튼 이튿날 서울에서 다른 ‘젠틀맨’들이 급히 내려왔고 나는 저간의 사정을 다시 설명했다. 그들이 ‘잘 처리하겠다’며 돌아간 뒤에 밤 열두시가 되어서야 나는 광주의 치안본부 안가에서 신병인수를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들 엄마는 초췌한 모습으로 귀가했는데, 서울에서 연행되어 조사받던 사람들도 모두 나왔다고 전화가 왔다. 그러나 군산 전주 일대의 사람들은 그대로 송치되었고 좌경혁명을 준비하던 ‘오송회’ 어쩌구 하는 얼토당토 않은 내용이 신문에 크게 실렸다. 소나무 다섯 그루 아래에서 조직을 했다나 뭐라나.
시인 이광웅은 광주교도소로 와서 살더니 시인 김남주와 같은 방을 쓰면서 몇 년을 보냈다. 그는 고문후유증으로 김남주보다 몇 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이러한 나날이었다. 툭하면 누군가 잡혀가고 우리는 연행되거나 며칠씩 진술서를 쓰거나 그랬다. 우리는 두 사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985년 4월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작고한 출판인 나병식이 지하출판으로 이만 부를 찍어 사방에 뿌리고는 검거되었고, 나도 서로 말을 맞추고 시간을 벌기 위해 한 달쯤 도망다니다가 검거되었다. 그이는 경찰이 운암동 집을 수색하기 직전에 그동안 모아둔 항쟁 자료들을 마당의 창고 슬레이트 지붕 아래 숨겼는데, 방마다 뒤지고 화단까지 파헤쳤지만 다행히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의 안기부장은 장세동이었는데, 그들은 나병식과 나를 정식으로 구속하지 않고 ‘유언비어 유포죄’ 정도의 경범죄로 다루더니, 마침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삼세계 문화제’에 초청받은 나에게 외유하라며 일 년짜리 단수여권을 내주었다. 나는 급히 서울로 올라온 아내와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가지를 사고 밥 한끼 먹고는 공항으로 나갔다.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간 나는 망명자 윤한봉과 실로 오 년 만에 상봉했다. 그와 함께 미주 한국청년연합과 재미 한국동포를 조직하기 위하여 13개 도시를 돌며 강연회를 열었고, 동포 원로들에게 그를 보증해주었다. 미국에서 문화패 ‘비나리’를 만들고 ‘통일굿’을 순회공연했으며, 도쿄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안내로 조성우를 비롯하여 교포 이삼세 청년들과 함께 같은 작업을 했다. 그후 우리문화연구소와 문화패 ‘한우리’를 조직하여 교토와 오사카에 지부를 두었고, 내가 귀국한 것은 일 년 만인 1986년 5월 말경이었다. 다시 안기부에 연행되어 행적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은 면했다.
우리는 이전에 내가 해외에 나가기 직전 서울에서 만나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집에서도 별로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광주를 떠나려고 운암동의 집을 내놓고 둘이서 서울과 수원 등지에 집을 보러 다닌 적도 있었다. 나는 1984년에 『장길산』을 끝내고는 정말로 광주를 떠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는 당대에 대한 역사적 책무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창작하는 자로서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사회의 온갖 제약에 짓눌려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말 그대로 ‘창작의 자유’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광주항쟁’을 소설로 쓸 생각은 없었다. 누가 파리코뮌이나 러시아혁명을 소설로 쓰는가. 그 모두가 역사기록과 르포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다만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쓸 수 없는 것’과 ‘쓸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자유에 의하여 결정되어야만 한다. 나에게는 세상이 온통 ‘무등산은 알고 있다’라든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이라든가 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동어반복이며 억압이었다.
우리는 너무 현실 자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고 그 불에 데었다. 나는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이는 당시에 생생한 기억들과 더불어 ‘도청’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아마도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앓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사라진 빈집을 지키면서 적막 한가운데서 문득 그이가 내린 생의 결단이 아니었을까.
그이는 ‘평온’을 말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의 무싯날 같은 그런 나날. 그이의 집요한 요구와 준비에 따라서 우리는 법원에 갔고 나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와 서울행 밤기차를 탔다. 얼마 뒤에 그이가 꾸려서 보낸 책이며 물건들을 트럭에 싣고 화가 홍성담이 내 거처에 찾아왔다. 그는 우리가 그냥 예전처럼 작업실을 따로 쓰는 줄 알고 있다가, ‘아마 그 사람은 나를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는 헤어지면서 나를 붙들고 울었다.
어쨌든 나는 1980년에서 1990년대 말까지 국내외에서 소설은 쓰지 않고 광주에서 비롯된 ‘사회봉사’에 바쳤으니까 그냥 이름과 몸으로 때운 셈이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깊은 회한이 오래갔다. 나의 갑작스런 방북은 ‘무등산’을 뛰어넘으려는 것이기도 했고 그것들의 연원인 분단이라든가, 빨갱이라든가, 사상이라든가 하는 억압을 벗어버리는 어떤 ‘글쓰기의 자유’를 확보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뒷날 그이가 나를 내보낸 것을 후회했다고 김지하 부인은 내게 전했다. 그 후 나는 다른 이와 덧없는 살림을 차렸고 (이 또한 길게 가지는 못했다), 막내 호섭이가 태어나자마자 방북과 망명생활이 이어졌다. 베를린이나 뉴욕에서 뭔가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나는 그래도 그이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다. 그이는 언제나 사려 깊은 대답을 해주었고,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 내 생각을 잘 아는 동지이기도 했다. 장남 호준이가 ‘전교조’ 교사들에 호응하여 ‘전고협’을 조직했다가 구속되고 고등학교를 퇴학 맞았을 때에 처음으로 그이는 전화기 너머로 울음소리를 냈다. 당시에 독일 정부와 협의하여 호준이를 초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출국시켜주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와 교도소에 있을 때 그이는 나와 이혼한 처지라 직계가족인 호준이를 앞세워 오 년 동안 나의 옥바라지를 했다. 나는 석방되어 나온 뒤에 아들과 만나서 ‘돌아가도 되겠는지’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한 달이 넘게 대답이 없더니 뒤늦게 말했다. “아버지 글 쓰실 때의 긴장을 이제는 어머니가 같이 견디지 못하시겠답니다. 편하게 사시도록 놔두세요.” 딸은 언젠가 말했다. 지금도 엄마는 꿈에 허둥지둥한다고. 밥상 위의 반찬들이 모두 흙이나 재로 변하거나 손님은 잔뜩 왔는데 빈 그릇뿐이어서 나의 성난 얼굴을 피하다 잠이 깬다고도 했다. 이게 내가 그이에게 저질렀던 짓들이다. 그이는 언제나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주었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되었고 보통 때도 늘 서너 명의 식객이 끊이질 않았다.
어찌 그 모든 것들을 글과 말로 할 수 있으랴. 이 역시 나로서는 소설로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희담의 「깃발」이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것은 1988년 봄이었고 이는 한 해 전에 양김의 분열에 의하여 대선에 실패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난 직후였다. “5월은 뭔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여전히 벌떡이고 불끈거린다. 아마도 5월 넋이 잠들지 못했나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와 신경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속에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내뿜는 괴이한 힘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갑자기 자다 벌떡 일어나 밤을 새우며 미치도록 뭔가를 쓰게 만드는…… 그것이 「깃발」이다”라고 그이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참에 「깃발」에서 시작하여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문밖에서」「김치를 담그며」, 그리고 중편소설 「이제금 저 달이」에 이르기까지 다시 한번 읽었다. 마치 퇴색한 옛 사진을 보는 것처럼 아련했다. 그건 마치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시기의 젊은이들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을 주었다. 나는 홍희담의 성정과 말투와 느낌의 결을 알고 있는데다가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까지도 현실 속의 누구라는 것을 대강 짐작할 정도로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세월을 잘 아는 나로서는 어쩌면 객관적인 견해를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나는 그야말로 ‘5월문학의 깃발’처럼 뚜렷한 「깃발」을 여기서 언급하려 하면서도 사실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와 「김치를 담그며」에 더욱 애착이 간다. 선연한 색으로 나부끼는 「깃발」의 너무도 뚜렷한 투쟁적 계급성보다는 다른 두 작품에 드러난 항쟁 이후의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일상의 여성성이 더욱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도 「깃발」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 나는 이 모든 중단편들을 ‘광주 연작’으로 보고 연이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깃발」은 방직공장 여공인 순분과 형자가 중심화자로 5·18 이후 도청에 이르기까지 열흘 동안의 일을 다큐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 여공들은 미숙, 영순, 철순 등과 함께 공장에 다니면서 야학에 함께 동참한 동료들이다. 이들은 시내 각처에서 공수부대의 시민 학살과 항쟁의 과정이며 무장시민군의 등장에서 수습위원회의 강온 대립과 도청에서의 최후의 항쟁 등을 각자의 목격과 체험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들이 지도해주기를 바라던 이들은 야학의 강학이며 운동권 청년인 윤강일 같은 지식인들이었건만, 윤강일은 시위가 정점에 이르는 과정에 동참했다가 총격전이 벌어지자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며 현장을 빠져나간다. 나중에 도청에서 항쟁하다 산화하는 여성 노동자 형자의 자각의 과정은 이렇게 묘사된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혁명의 사상을 지녔고, 전사였고, 선진적이었다. 그들이 보통 말하는 무장투쟁, 시가전 등등이 형자의 일상생활을 파고든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에 대한 배신감은 윤강일의 도피로 이미 맛보았지만 역시 지금도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 꼬부라져 잠들어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인가, 지식도 없고, 이론도 없고, 운동 논리도 없는 저들은 왜 도청에 들어왔는가. 그녀는 동료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자부했으나, 지식인을 향한 신뢰의 부분만큼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녀는 자신을 깊이 자책한다. 그녀는 지금 관통한다. 그녀는 바로 그들이었다. 거기에 잠깐 지식인이 끼어들었던 것이며 그것은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이번 항쟁으로 그녀는 다시 동료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학생들과 지방 향신층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가 계엄사의 요청을 받아 ‘무기 반납’을 추진하고 있었던 데 대하여 도시 하층민, 서비스업 종사자 등 이른바 ‘룸펜프로’ 계층과 노동자들은 뚜렷한 이론도 없이 총기 반납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난 며칠 동안의 시민들의 죽음을 더욱 짓밟고 모독하는 일이라고 맞서고 있었다. 몇몇 운동권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이들에 합세하여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고 도청 사수를 주장하게 된다. ‘지든 이기든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지키다가 끝을 내야만 항쟁이 완성되며, 그것만이 지난 며칠 동안 시민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는 길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이들은, 온건파인 전자에 비교하여 강경파로 기억된다. 형자는 말한다.“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 거야.”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자유는 무한히 열려 있는 가능성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분명한 당위를 뜻했다. 하나의 상황 앞엔 하나의 결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순분의 회상 속에서 그날 밤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말없이 눈만 번쩍이던 사람, 턱에 칼자국이 있던 사람, 거친 욕을 끊임없이 해대던 사람, 몸집은 작은데 손이 유난히 컸던 사람, 밥을 먹으면서도 총만은 거머쥐고 있던 사람, 해맑은 어린 사람, 사람들”이었다. 항쟁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서 사망자는 제외하고 부상자와 구속자만을 놓고 따져보았는데도 칠팔십 퍼센트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원, 세차공, 식당 배달원, 무직, 외판원, 타일공, 양복공, 세탁공, 청소부, 노점상, 점원, 가난한 주부, 운전수, 보일러공, 소상인, 막노동꾼, 고물상, 행상, 용접공, 자개공, 목공, 구두닦이.
도피하고 다니던 윤강일이 돌아왔을 때 예전 여공 제자들은 여전히 품이 넓고 따뜻했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여긴 사람도 없고 도시가 텅 빈 것 같다고 그가 말하자 철순이가 말한다. 사람이 없다니요? 쓸 만한 사람들은 다들 감옥에 갔거나 잠수 탔거나 죽었잖아? 죽은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상원이가 죽었잖아? 순분이 말한다. 그 외에 어떤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세요? 죽음조차도 윤선생님 쪽의 사람만 부상하는군요. 그제서야 이름 없이 죽은 형자의 죽음을 순분이 말해준다. 죽었다구? 언제? 어디서? 마지막 날 도청에서요. 시체는 찾았니? 못 찾았어요. 여공들은 잠든 수배자를 위하여 그의 아침 준비를 해놓고 제각기 돈을 털어 봉투에 넣어두고 출근한다. 안개 낀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동료 노동자들이 길을 메운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작업복 자락이 펄럭였다. 점점 멀어지면서 새벽 여명 속에 옷자락의 펄럭임만이 보였다. 수없는 펄럭임이었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데가 점점 크게 드러나기 시작한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를 ‘87체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진작부터 광주에서 드러났음에도 1987년 6월항쟁을 겪으면서 ‘7월 8월 노동자 투쟁’과 만나지 못했던 정치적·제도적 한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이 소설의 계급성 당파성이 교과서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재 군부에 의한 학살과 항쟁이라는 모순이 증폭된 상황에서 사회적 조건이 명료하게 드러난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소 거칠고 관념적인 곳은 있으되, 우리가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적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를 이 소설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었다.
그이가 소설가 남편과 함께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는 1976년 서른두 살이었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2004년 예순 살이었으니 광주에서 그이는 한평생을 보낸 셈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떠맡은 셈이었고, 내가 길을 떠나 새로운 것들과 대면하고 세계를 겪어가는 동안 그이는 ‘빈터’에 남아서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 이웃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뒷마무리까지 해냈다. 이것이 내가 문학과 인생에서 놓친 부분이며 그이가 채워놓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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