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비난
그 피는 어디에서 묻었지, 캐롤?
_데이비드 프랭클린
1장
방금 전
조부모가 썼던 오래된 식탁 앞에 앉은 리즈 재럿이 고개를 들었다. 거칠고 들쭉날쭉하게 치솟은 아드레날린이 온몸에 흘렀다. 손가락을 더듬어 휴대폰을 쥐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다. 망할! 의자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리즈는 샤워실로 향했다. 물이 데워지길 기다릴 새도 없이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부터 벗었다. 찬물로 정신부터 차려야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커피에 애더럴adderall,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치료제.을 섞어 마시며 밤새 책과 컴퓨터를 들여다본 후였다.
이번이 두 번째로 보는 시험이다.
이번에도 망칠 수는 없어. 3개월 전에 본 시험 생각을 하자 위장이 불타오르는 작은 덩어리가 되어 콱 뭉치는 느낌이었다. 통과해야 해. 찬물을 뒤집어쓰면서 리즈의 독백은 이렇게 바뀌었다. 통과할 거야. 난 똑똑해. 할 수 있어.
리즈는 스물아홉 살이었고 더 이상 젊지 않았다. 오리건주립대학교 법학대학원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법학 학위를 받으려고 그 대학에 모인 학생들 중에 리즈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처음에 리즈는 삼십 대나 그 이상인 학생들을 연민과 감탄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윌슨빌시에서 온 할머니가 입학 절차를 통과한 걸 알고 ‘귀엽다’고도 생각했다. 진심이야, 리즈? 그게 뭐 어때서? 늦은 나이에 시작해 죽어라 공부하고 있는 사람한테 귀엽다고? 언젠가 네 모습이 될 수도 있어. 꿈을 좇지만 그 꿈에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눈앞에서 달랑거리는 당근을 향해 손을 뻗지만 손가락이 겨우 스칠 뿐일 수도 있었다.
움직여.
미친 꼭두각시처럼 샤워실에서 뛰쳐나온 리즈는 변기 위 선반에서 수건을 한 장 잡아챘다.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할 시간도 없었다. 보송보송한 흰색 테리 수건으로 갈색 머리의 물기를 대충 닦아내며 거울을 보았다. 보통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부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보면 실제 모습보다 나아 보이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약에 취한 듯한 거울 속의 모습에 리즈는 움찔했다. 윽, 겨드랑이에 데오도란트를 바르는데 두 손이 덜덜 떨렸다. 현기증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변기에 앉아 팬티를 입었다. 화장실 안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디즈니랜드에 가서 회전목마를 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리즈는 속이 메슥거려 오빠에게 올칵 토하고 말았다. 오빠 지미는 그날의 기억을 종종 상기시켜주곤 했는데, 그때의 메슥거림과 똑같은 느낌이 지금 밀려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험장으로 가야 한다. 당장. 시험장은 비버턴시의 어느 호텔 회의실로, 여기서 차로 세 시간 넘게 걸렸다. 늦지 않으려면 속도위반 딱지를 끊을 각오를 해야 한다.
겨우 청바지를 입고 웃옷을 걸쳤다. 신발을 한 짝밖에 못 신고 다른 한 짝을 찾아 온 집안을 절뚝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발을 헛디디고 문설주에 기대섰다. 이놈의 신발이 어디 갔지? 한참 헤맨 후에야 침실 뒤쪽, 오웬이 잘 때 쓰는 침대 자리 옆에서 찾아냈다.
오웬! 당장 남편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나를 계속 자게 내버려뒀을까? 식탁에서 자고 있는 나를 왜 흔들어 깨우지 않았을까? 이게 얼마나 중요한 시험인지 알 텐데. 이 시험은 그녀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그녀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꿈을 이룰 권리가 있음을 증명할 기회이기도 했다.
신발을 마저 신는 동안 오웬이 아침에 한 말이 생각났다. 얇은 베일 너머로 밀려든 기억이었다. 어젯밤의 일에 관한 부분은 전부 흐릿했다. 애더럴. 커피. 리즈는 목이 쉬도록 큰 소리로 판례법을 외웠다. 레드불보다는 더 기운이 날 거라며 오렌지 주스를 찾아 냉장고를 뒤진 기억도 났다. 하지만 실은 사다놓은 레드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맞다. 아침에 오웬은 리즈를 깨우려 했다. 그랬다. 끝내주네. 이렇게 시간이 늦어버린 것은 리즈 본인 탓이었다.
오웬은 그녀를 식탁 의자에서 붙잡아 올리기까지 했다.
“당신 아주 맛이 갔어. 그만 졸아. 씻고 출발해.” 오웬은 힘 좋은 손을 리즈의 겨드랑이에 집어넣고 안아 올렸다.
“자야 해. 시험은 내일이야.” 리즈는 그의 팔을 물리고 도로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이야. 지금부터 네 시간 후잖아. 그렇지?”
리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건조한 눈이 따끔거렸다. 그런 리즈의 모습은 언뜻 마약중독자 같았을 것이다.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뜨거운 금속 롤러 위에 놓인 핫도그를 쳐다보며 마치 물 위로 뛰어오르는 고래를 보듯 황홀해하는 마약중독자 말이다.
“네 시간 후?”
오웬이 휴대폰을 내밀어 시간을 확인시켜주었다.
“망할! 얼른 가야겠어.”
“그래, 얼른 가. 나도 나가봐야 해. 데이먼이랑 다른 투자자들을 아침에 만나기로 했어. 시간 맞춰 가야 해.”
양쪽 신발을 다 찾아 신는 동안 리즈는 오웬이 자신을 깨우려 했다는 걸 떠올렸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남편이 이번에도 그녀보다 본인의 입장을 우선시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그랬다. 게다가 그는 이제 자신들이 호화롭게 살게 될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리즈가 변호사가 돼서 능력을 발휘해 그렇게 되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쌔고 쌘 게 변호사야.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 이제는 기술이 최고라는 뜻이야. 그렇게 될 테니까 두고 봐.” 그는 몇 번이나 이런 말을 했다.
리즈는 기술을 증오했고, 가끔은 오웬도 증오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지나칠 정도로 굳건했다. 자신이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 거창한 무언가를 목표로 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회사의 주식 상장을 앞두고 오웬은 주식 상장을 통해 들어올 돈으로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페라리 구입하기. 피지 바다의 수상 초가집에서 한 달 살기. 목록은 끝이 없었다. 리즈는 오웬과 괜한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그의 꿈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어차피 그 꿈은 이뤄지거나 이뤄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목록에 적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강가에 위치한 그들의 작은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린다는 계획이었다. 그나마 그것은 날이 갈수록 길어지는 목록에서 최우선 항목에 있지 않았다. 리즈는 그가 그 계획에 대해 차츰 잊어버리기를 오랫동안 바랐다.
물론 집 자체에 문제가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목재가 푸석푸석해지자 집을 떠받치는 기둥들도 약해졌다. 주방 바닥도 심하게 기울어서 한번은 리즈가 방울토마토 한 알을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주방 구석으로 빠르게 굴러갔다. 마치 〈폴터가이스트〉집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초자연 현상을 다룬 미국의 공포영화.라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 가족의 역사가 이 집에 담겨 있어.”
리즈가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오웬은 마치 당신을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듯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우린 우리만의 역사를 만들어야지. 누가 다른 사람의 꿈속에 살고 싶겠어?”
(중략)
리즈는 집과 차고 사이, 자갈 깔린 옥외 통로를 지나 서둘러 차고로 향했다. 눈앞이 흐릿했다. 차고로 가면서 오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었다. 리즈는 차고 문 버튼을 눌렀다. 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동안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오웬! 나 늦었어! 이 시험이 나한테, 우리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아. 나라면 당신이 이렇게 늦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내가 일어나 움직이는 걸 확인도 안 하고 나가버릴 수 있어?”
리즈는 얼른 운전석에 앉아 도요타 라브4의 시동을 켰다. 라디오가 같이 켜지면서 요란한 팝송을 쏟아내자 리즈는 깜짝 놀랐다. 비명이 나오려는 걸 참고 볼륨 버튼을 찾아 손을 허우적거렸다. 음악 소리를 거의 다 줄인 후에도 심장이 엄청나게 쿵쾅거려서 자낙스신경안정제의 일종.라도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찬물로 샤워를 했는데 목 뒤쪽에 벌써 땀이 맺혔다. 급히 자낙스를 찾았다. 각성제를 먹어 흥분 상태인 데다 밤새 꼬박 공부한 탓에 머리가 멍해서 어떤 약으로 혈액을 더 오염시킨다고 해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망할, 오웬!
기어를 후진으로 놓고 발볼로 액셀을 밟았다. 차고를 빠져나간 순간 쿵 소리가 나면서 무언가를 들이받는 느낌이 났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쿵 소리는 멎었지만 뒷범퍼로 무언가를 친 것은 확실했다. 개나 고양이를 친 모양이었다.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조그맣게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아, 맙소사! 동물을 해쳤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2년 전 늦여름, 그녀를 태우고 운전하던 오웬이 고속도로를 벗어나다가 폭스테리어 개 한 마리를 쳤는데 리즈는 아직도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 오웬은 차를 세우라는 리즈의 말을 무시했고, 마지못해 정차했지만 운전석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결국 리즈가 차에서 내려 자신의 재킷에 폭스테리어를 감싸 들고 왔다.
“불쌍해서 어떡해.” 열어놓은 조수석 문 쪽으로 돌아선 채 리즈는 바들바들 떠는 개를 보며 속삭였다.
“아, 젠장. 안 돼. 난 그놈을 수의사한테 데려갈 생각 없어.” 오웬은 리즈가 품에 안은 개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웬, 그게 아니라, 얜 누군가의 소중한 애완견이야.” 리즈는 몸을 옆으로 돌려 겁먹은 개의 갈색 눈을 오웬에게 보여주었다. “당연히 데려가야지. 이대로 두면 당신은 뺑소니 혐의로 기소당해.”
리즈는 닥쳐올 결과를 과장하여 알려줘서라도 남편을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웬 재럿은 내키지 않아도 규칙은 준수하며 사는 사람이니까.
리즈는 조수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오웬은 그녀가 무릎에 앉힌 개를 쏘아보았다.
“이런 거에 돈 쓰고 싶지 않아, 리즈”
“언제나 돈 타령이네.” 리즈가 쏘아붙였다.
“치사하게 깎아내리는 말 하지 마.”
개가 조금 더 낑낑거렸다.
“차로 동물을 쳤으면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우리 개였으면 어쩔 거야?”
오웬은 리즈를 쳐다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우린 개 안 키우잖아.”
“만약에 우리가 개를 키웠으면?”
“알았어. 알았어. 그 개를 빌어먹을 수의사한테 데려가자고.”
오웬은 기어를 넣고 평소보다 천천히 차를 몰았다. 구역질 나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수의사를 만나기 전에 개가 죽기를 바라고 일부러 천천히 운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리즈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오웬에게 그런 행운은 오지 않았다.
폭스테리어는 치료를 받았고 개 주인과도 연락이 닿았다. 리즈는 누군가에게는 그 개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오웬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알고도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개 주인이 어느 노부인이나 어린아이일 수도 있는데. 오웬은 그저 돈 걱정뿐이었다. 어쩌면 개 때문에 자신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옳은 일을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 무렵 리즈는 벤드시 동물애호협회에서 자원봉사를 지원했다. 리즈는 늘 동물을 사랑했다. 물론 말은 예외였다. 말은 리즈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최악이었던 날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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