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수많은 것들이 보인다. 책상, 몸, 사람, 구름.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지만 인지적으로 아는 것들이 있다. π, 힉스입자, 완벽한 원. 마지막으로 내면에서 더 잘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자아, 기억, 감정, 사랑. 이 모든 것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존재한다는 것. 그런데 이들은 어떤 이유로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우선 ‘나’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 존재의 원인은 부모일 것이다. 내 부모 역시 그들의 부모 덕에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고. 이렇게 지구 모든 인간들의 과거를 추적해보면 우리 모두 약 40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 살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약 46억 년 전 탄생한 지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나, 지구, 1,000억 개가 넘는 은하, 우주의 모든 것들은 약 137억 년 전 거대한 우주 폭발, 빅뱅을 통해 탄생했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이론이다.
그럼 우주는 왜 탄생한 것일까? 우주 그 자체의 존재 원인은 무엇일까? 뉴질랜드 마오리족들은 우주가 최초의 부부인 랑기Rangi와 파파Papa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중아프리카에서는 붐바Bumba라는 신이 외로움 끝에 토해낸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믿었고, 안데스의 잉카인들은 비라코차Viracocha 신이 티티카카 호수에서 나와 바위에 바람을 불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는 각각 우주가 물, 불 또는 무한無限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빈 공간에서 창조됐다고 생각했다. 유대교는 야훼 신이 형태가 없는 무질서tohubohu에서 우주를 만들었다고 여겼다.
로마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기독교는 타 종교들과 차별된, 조금 더 혁신적인 우주생성론이 필요했다. 2~4세기 초기 기독교 지식인들은 전통 헬레니즘의 신플라톤주의, 이단적 그노시스주의(1~2세기 기독교에 맞선 지적·신비주의적 종교사상운동)와 철학적 주도권을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플로티누스, 포피리, 이암블리코스 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형태 없는 빈 공간에서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특히 ‘하나의 존재The One’라는 이론을 제시한 플로티누스는,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 세상의 이성적 존재들이 인간 세상에서도 표현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마키온, 아펠레스, 마니 같은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세상은 잔인하고 불행하므로 이런 추한 세상을 만든 데미우르고스는 절대 자비로울 수 없고, 존재는 바로 사악한 신 이알다바오트를 통해 창조됐다”라고 주장했다.
유대-기독교의 단일신이 데미우르고스나 이알다바오트보다 우월하다는 증명이 절실했던 이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신은 절대적 기능과 권한을 가졌으므로 우주 창조에 자비와 의지 외에 그 아무것도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존재는 무에서 창조되었다creatio ex nihilo, 신 외에 그 아무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먼저 일찌감치 루크레티우스가 『De ret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말한 ‘무에서는 아무것도 창조될 수 없다ex hinilo nihil fit’라는 식으로 질문할 수 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를 무에서 창조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신의 절대 능력을 증명한다”라고 쉽게 답했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0점, 아우구스티누스 1점. 그렇다면 조금 더 어려운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 원인이 바로 신이라면, 신의 존재 원인은 무엇인가? 신은 왜 존재하는가? ‘끝없는 질문’. 어린아이들은 가끔 끝없이 이어지는 “왜?”라는 질문으로 어른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초콜릿 먹으면 왜 안 돼?”“이 상하니까.”“이 상하면 왜 안 돼?”“음식을 못 먹으니까.”“음식 못 먹으면 왜 안 돼?”“아파 죽을 수 있으니까.”“죽으면 왜 안 돼?”“엄마 아빠가 슬프니까.”“슬프면 왜 안 돼?”“……”
아리스토텔레스는 끝없는 질문을 종결시킬 수 있는 논리적 방법을 제시했다. 우선 A의 원인은 B, B의 원인은 C, C의 원인은 A라는 순환적 논리를 써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A의 원인은 A라는 말과 같다.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논리로는 어린아이도 설득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해보는 방법이 있다. 이런 논리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모든 것에는 언젠가는 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왜’라는 질문을 어딘가에서 무작정 끊어볼 수도 있다.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하니까 너는 아프면 안 돼. 끝.”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모든 질문의 최종적인 답과 모든 존재의 원인을 Ω(오메가)라고 생각해보자. 무작정 ‘끝’ 같은 제멋대로의 방식으로는 Ω가 설득력 있는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을 Ω와 그 외에 모든 존재, 두 갈래로 나누었다. 모든 존재들은 논리적이고 조건적이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원인인 Ω 자체는 앞의 존재들을 위해 논리적으로 필요하므로 원인이 필요 없다. 라이프니츠는 ‘신’을 바로 논리적으로 필요한, 절대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Ω라고 가설하고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신이며, 신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도 역시 논리적 문제가 뒤따른다. 흄과 칸트가 지적했듯 세상에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은 있지만, 논리적으로 필요한, 다시 말해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무의미한 난센스로 취급하게 됐고, 18세기부터는 수학이라는 절대 증명을 요구하는 물리학적 질문들로 탈바꿈했다. 라이프니츠의 논리적 모순을 잘 알던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그래서, 우주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시작점이 있을 수 없다는 가설을 선호하게 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가 중력으로 인해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신의 방정식에 불필요한 상수 하나를 추가해 ‘영원한 우주 모델’을 구해보려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인슈타인의 영원한 우주는 환상에 불과했다.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지 불과 몇 년 후 우주는 명백히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급기야 우주의 모든 것들이 약 137억 년 전 빅뱅이라고 불리는 대폭발을 통해 무한히 작은 점에서 시작됐다는 이론이 제시된 것이다. 급기야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빅뱅 이론을 창세기의 과학적 설명이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거’라고까지 선언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어린아이 같은 질문들을 해볼 수 있다.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빅뱅은 왜 일어난 것일까?
일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각각 중력을 통한 거시적인 간격들과, 플랑크 간격 사이에 일어나는 미시적인 현상들을 설명한다. 그런데 만약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단 하나의 점에서 시작됐다면 양자역학적 원리들이 우주 전체에 적용되어, 수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직관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중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설명은 우주가 무에서 아무 이유 없이 랜덤으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의 의미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이해가 필요하다. ‘무’를 직관적인 정의에 가까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라고 생각해보자. 루크레티우스는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플랑크 크기의 ‘무’에 가까운 공간에서도 양자파동을 통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충분히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플랑크 크기의 빈 공간에 가까운 ‘무’에도 여전히 공간과 양자역학이라는 자연의 법칙들이 작용한다. 호킹은 그래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양자우주론과 양자중력학을 이용하면 공간 그 자체가 양자파동적으로, 다시 말해 아무 이유 없이 랜덤으로 생산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현대 물리학의 답은 단순하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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