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만화와 어린이는 불가분의 관계지만 사실 만화가 어린이용 매체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 만화는 성인용 세태풍자 만화로 먼저 발달했고, 만화의 원류가 되는 연속 그림 양식 역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지, 어린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이도 즐길 만큼 접근성이 뛰어난 매체라서 어린이용 작품들이 많아지기 시작하고, 어느 틈에 만화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한국 현대 사회의 흔한 양육 방식에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어릴 때 즐겨 하던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괴상한 사고가 포함되어 있기에(“아직도 애처럼 그런 걸 하고 있냐?”가 그 대표), 만화가 어린이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 편견은 더욱 발전하여, 어린이와 만화의 교집합으로 교훈적 학습 아니면 유치함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어린이와 만화는 그보다 훨씬 풍부한 재미를 주는 결합이 가능하다. 어린이들에게 유익한 만화를 추천하는 것이 아닌, 어린이라는 키워드를 지니고 여러 가지 재미를 얻을 수 있는 만화를 몇 가지 발굴해 보자.
아이 같은 상상력은 유치한 것이 아니다
『아기공룡둘리』 김수정 지음
우선 가장 커다란 편견부터 깨면서 시작하자. 어린이가 할 법한 상상이라고 해서 그게 유치한 것은 아니다. 그저 현실의 인과적 제약이 덜 반영된 상상일 뿐이다. 아이 같은 상상력에는 가장 원형적인 즐거움과 경이에 대한 추구가 종종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기에 유치하고 미숙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흐뭇한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많다. 상상력이 가득한 만화를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꼬기보다는 모험과 소동과 화해의 이야기 속에 펼쳐지는 분방한 상상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좋다.
명작 『아기공룡 둘리』를 예로 들어 보자. 이야기의 뼈대는 다소 가부장적이지만 번듯한 가장 고길동, 그리고 그의 집에 눌러 살며 집안 살림 파괴를 일삼고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객식구 4인방(공룡, 외계인, 타조, 아기 조카)의 일상이다. 이야기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소동, 그리고 갑자기 떠나게 되는 이세계異世界 모험으로 나눌 수 있다. 일상 이야기는 사회 고발 르포가 아니고, 모험 이야기는 『반지의 제왕』이 아니다. 하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오징어가 끄는 라면 박스 썰매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배달하는 장면을 보며, 자유로운 상상력을 유치하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정글에서 식인종에게 잡혀 갔다 도망치면서, 평소에 아무리 티격태격해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버린 식구들을 슬랩스틱 코미디를 맘껏 보여 주며 데리고 나오는 대목은 속 깊은 감정선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기공룡 둘리』를 비롯해, 분방한 상상력의 명작들은 적지 않다. 다양한 캐릭터, 잘 버무려진 유머 감각, 유연한 연출 속에서 어린이 같은 상상으로 가득한 작품은 성인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어린이용이라서 유치한 것이 아니라,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일 때 유치한 것이다.
어린이를 빙자해 성인 감성을 담다
『어덜트 베이비』 토미사와 치나츠 지음, 대원씨아이
『크레용 신짱』 요시토 우스이 지음, 학산문화사
어떤 작품은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어린이 만화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실상 그 속에는 어린이의 모습을 한 성인 취향이 담겨 있기도 하다. 어린이가 주인공이고 어린이의 주변환경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고 해서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성인들을 위한 즐거움을 비유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담아낸다.
『어덜트 베이비』는 30대 야쿠자 조직원이 엉뚱한 사연으로 비명횡사하고는 어른의 정신 그대로 아기로 환생한 후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코미디다. 어른의 속마음을 지닌 아기라는 설정은 1980년대 영화 〈마이키 이야기〉를 비롯해 여러 장르에서 다뤄졌는데, 이 작품의 경우는 성숙함의 괴리는 물론이고 에로틱개그 코드까지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성인물임을 명확히 했다.
이런 성격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크레용 신짱』이다. ‘짱구는 못말려’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가 원제목 그대로 다시 출판된 이 작품은, 말썽꾸러기 유치원생 신노스케(신짱구)와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일상을 다루고 있다. 신노스케는 중년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 대처 능력이나, ‘예쁜 여자 밝힘증’을 보여 주는데, 그렇다고 정말로 음흉하다기보다는 엉뚱하고 순진한 유치원생일 따름이다. 이런 괴리나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정서 등은 성인 독자의 유머 코드에 더 걸맞은데, 여기에 유치원 중심의 일상이나 어쩌다가 한 번씩 이세계 모험 이야기를 섞어 넣으며 어린이 독자도 포섭한다. 어른들의 세계를 패러디해 어린이들의 세계를 표현하는 솜씨 역시 양쪽의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부분이다.
어린이를 관찰하다
『요츠바랑!』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대원씨아이
『토끼 드롭스』 우니타 유미 지음, 양수현 옮김, 애니북스
분방한 상상과 과장의 즐거움이 없다고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어린이의 세계가 중심에 있는 작품에서 가능한 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관찰이다. 나름의 복잡한 사연도 있겠지만, 즐겁고 솔직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관찰하는 흐뭇함은 정서적 치유를 주는 듯한 만족감을 자아낸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반응을 더 현실적이고 자세하게 보여 줄 때 독자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요츠바랑!』은 호기심 많고 발랄한 여자아이 요츠바와 그 주변 어른들의 일상을 그린다. 커다란 시련이나 모험도 없고, 분방한 상상력으로 세상이 흔들리지도 않는다. 집에서 피자를 시켜 먹고, 옆집 언니의 학교 축제에 놀러 가고, 밤을 줍기 위해 뒷산에 올라간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험이고, “매일이 가장 즐거운 날”이다. 즐겁게 사는 아이, 그 아이를 억지로 깨우치기보다는 다른 꼬마와 어른들 역시 즐거움에 동참하게 된다.
이보다 좀 더 어두운 면이 있긴 하지만 마음을 상쾌하게 해 주는 작품으로 『토끼 드롭스』가 있다. 독신 청년 다이키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갔다가 그가 노년에 남긴 딸, 즉 자신의 이모가 되는 여섯 살 꼬마 린이 지낼 곳이 없어지자 집으로 데려온다. 조숙하지만 어린 꼬마 린, 갑자기 아빠 아닌 아빠 역할을 하게 된 다이키치의 생활 속 크고 작은 사건이 이어진다. 그 속에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갑갑함을 위로받는다.
어린이를 매개로 통찰을 시도하다
‘스누피’시리즈 찰스 M. 슐츠 지음, 종이책
『마팔다』 끼노 지음, 조일아 옮김, 비앤비
어린이를 중심에 놓는 작품 가운데 가장 야심찬 기획은 어린이를 등장시키면서 진지한 철학적 화두를 담아내는 것이다. 두 가지를 잘 버무리는 것은 힘들다. 어린이들의 사회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세상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면서도 어린이 탈을 쓴 어른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고, 애초에 통찰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정점에는 ‘스누피’ 시리즈가 있다. 늘 뭔가를 시도하지만 실패투성이인 찰리 브라운과 그의 이야기를 냉정하게 들어 주는 루시의 심리 상담 소꿉놀이,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 작가를 꿈꾸는 강아지 스누피, 성숙한 편이지만 담요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라이너스 등 현대인의 여러 모습과 아이들의 순박함을 적절하게 녹여낸 캐릭터가 가득하다. 서사가 있는 이야기 만화 형식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되는데 반세기가 넘도록 전 세계 독자에게 즐거운 통찰을 선사했다. 또한 좀 더 피상적으로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는 귀여움으로 욕구를 충족해 주었다. 이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날카로운 정치 사회 풍자를 담아낸 이야기 만화『 마팔다』도 비슷한 범주로 볼 수 있다.
아이들을 중심에 놓는 작품이거나 어린이 독자가 보는 만화라고 해서 반드시 아이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보여지는 수준의 즐거움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좋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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