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부활한 예수는 어디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유대인들의 ‘구약 시대’를 톺아본 뒤, 예수의 출생 이후 2000년에 걸쳐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믿음의 세계와 그 이름으로 저질러진 추악한 탐욕의 세상을 함께 짚어왔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의 실체적 진실과 통하려면 공식적인 교리와 더불어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를 동시에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서이지요.
2000년 동안 기독교는 평화와 해방의 창문이기도 했지만 침략과 수탈의 창끝이기도 했습니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의 비중이 더 컸는가의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기독교인에게는 당연히 전자가, 비기독교인-특히 이슬람교인-에게는 후자가 당연하지 않을까요? 새삼 그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더불어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근본주의의 위험성
서기 2000년을 맞을 때, 온 세계인이 환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갈등과 대립의 지난 1000년을 묻고 새로운 1000년을 맞자는 덕담들이 지구촌의 거의 모든 나라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에 봇물처럼 쏟아졌지요.
하지만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가 미국 항공기 네 대를 납치해 ‘자살 테러’를 벌임으로써 뉴욕을 상징하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모두 무너지고,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펜타곤)도 일부 파괴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건국 이래 본토의 중심부가 외부 공격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지요. 세계무역센터 건물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항공기 승객들을 비롯해 무려 2800~3500명이 숨졌습니다. 이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벌어지고, 곧이어 이라크 침략이 이뤄지지요.
* 알카에다Al-Qaeda는 1979년 소련(현 러시아)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을 때 ‘아랍의용군’으로 참전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라덴이 1988년 결성한 무장 조직입니다. 알카에다는 아랍어로 ‘근거지’라는 뜻이지요. 1991년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에 군대를 주둔시킨 뒤, 본격적으로 반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대부호 집안 출신인 오사마 빈라덴이 자금을 댄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국제 이슬람 전선’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직원은 3000~5000명으로 추정됩니다. 빈라덴은 도피 중이던 2011년 파키스탄 은신처에서 미군 특수부대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빈라덴의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고 발표했지요. 미국은 빈라덴을 사살하는 작전을 모두 동영상으로 촬영했으나 국가기밀로 분류해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시민 단체의 공개 요구에 대해 미국 법원은 이를 공개하면 외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새로운 천년의 첫 10년대 내내 ‘종교 전쟁’의 양상이 나타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석유 자원 장악에 ‘본심’이 있었듯이, 모든 걸 ‘종교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두 유일신 종교의 충돌이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 이후 끊임없이 이어져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지배 세력이 권력을 강화하거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종교적 차이를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종교도 더는 ‘이용’당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겠지요.
영국 버밍엄 대학의 신학대 학장 앤드루 윙게이트 신부는 근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면서 “(근본주의가) 깊은 생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도 또렷하게 제시합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젊은 세대는 확실성을 추구하는데, 이들에게 간단하지만 그만큼 쉽고 명료한 ‘해답’을 근본주의가 주고 있다는 거죠.
노르웨이의 10대 청소년을 ‘사냥’하듯 살해한 30대 금발 테러범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십자군을 들먹이며 자신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자부’한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서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위험합니다. 근본주의는 ‘본질적인 것의 절대적 진리’를 강조하는데요. 기독교의 성경이나 이슬람교의 코란을 문자 그대로 ‘신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더러는 행동으로 옮겨 공격합니다.
근본주의라는 말은 20세기에 나왔지만, 예수 이후 2000년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자기가 믿는 신만 옳다는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는 세계사를 피로 물들여왔습니다.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선 유대교 성직자들부터 ‘근본주의자’이지요. 예수가 신을 모독했다며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으니까요.
상대가 신을 모독했다고 살의 담긴 눈을 번득이는 종교인이 대체로 유일신을 믿는다는 사실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일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서는 상대를 죽이는 일조차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심지어 같은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학살이 저질러져왔습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다른 기독교인을 처형하는 야만이 역사에서 되풀이되어 왔지요. 여러 기독교로 나누어져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기독교만 옳다는 생각으로 저지른 범죄들입니다.
만일 자신이 믿는 신이 ‘유일신’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상대가 ‘다른 신’을 믿더라도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근본주의는 자신과 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을 인정하지 않거나 말살하려는 극단적 인간을 길러내지요.
세상을 기독교인(우리)과 불신자(적)로만 구별하는 근본주의자에게 ‘다름’은 곧 ‘틀림’입니다. 이교도는 “개종되고 전향하고 치유되어야 할” 대상이자, “박멸해야 할” 질병이고 원흉이지요. 신학을 전공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는 저서 『지상의 위험한 천국』에서 그들의 언행은 “믿어라, 따르라, 그리고 행동하라”는 로마의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주의자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이 되면서 자기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청소년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회자들이 실제로 제법 많으니까요.
물론, 자기 인생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방황하거나 좌절할 때 자신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은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사람들이 끌리는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이지요.
그런데 자신이 ‘신의 뜻’을 알았다고 ‘확신’하는 사람, 자신이 ‘신의 선택’ 또는 ‘명령’을 받았다고 믿는 기독교인의 공통적 문제는 교만이고 오만입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국가적 차원이든 국제적 차원이든 그런 오만은 다른 사람, 다른 국가의 불행을 불러오지요. 끝내는 자신의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편견 없이 냉철하게 짚어보지요. 자신이 신의 뜻을 파악했다고 자부하거나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어쩌면 바로 그들이야말로 ‘유일신’을 능멸하는 자들 아닐까요?
신의 명령을 따른다며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나 미국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며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폭파해 2천여 명의 민간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빈라덴이나 자신이 믿는 ‘신의 뜻’을 따랐다고 생각했겠지요. 근본주의를 경계해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는 신의 선택(또는 은총)을 받았고 다른 사람을 ‘선교’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 신앙,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마녀’로 사냥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이 한국 사회에 퍼져가는 데 있습니다.
북유럽 사람들이 말하는 기독교의 고갱이
바로 그 점에서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Phil Zukerman이 덴마크와 스웨덴에 14개월 동안 머물면서 15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겸허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커먼은 북유럽 국가들에는 미국처럼 기독교 근본주의적 열정 같은 분위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합니다.
물론, 거기에도 10대를 상대로 한 노르웨이 테러범 같은 근본주의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미국에 견주어 상당히 약하지요. 그런데 주커먼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근본주의적 열정이 보이지 않는 북유럽 사람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문명사회의 기반이라고 확신하는 미국인보다 복지, 교육, 건강, 인권, 평등, 범죄율, 부패지수, 자살률과 같은 모든 분야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북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평등, 일인당 국민소득, 기대 수명, 아동 복지, 양성 평등, 정치가와 공무원의 청렴도, 범죄율 등 유엔이 내놓은 <인간 개발 보고서>의 여러 항목에서 최상위권이지요.
필 주커먼은 자신의 발견을 『신 없는 사회』라는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주커먼은 신이 없는 사회만이 행복하다거나, 신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회는 불행하다는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주커먼은 평균적인 북유럽 사람이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다른 태도를 세 가지로 간추립니다.
첫째, 합리적 회의주의입니다. 그들은 초월적 존재가 우주를 창조했다는 창조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윈과 그를 잇는 진화론자들이 인간의 생명과 우주의 탄생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지요.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부활을 믿는 기독교만이 죽음의 공포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합리적 회의주의자는 죽음을 자연현상으로 차분하게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으며 위안을 찾지는 않습니다. 주커먼이 인터뷰한 사람들은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확실해요. 옛날에 우리 생물 선생님은 항상 우리 몸을 구성하는 화학물질들의 가치가 덴마크 돈으로 4크로네* 정도라면서 최대한 빨리 그 돈을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라거나 죽음은 “내 몸이 분해돼서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 덴마크 화폐 1크로네는 한국 돈 195원 안팎이니 4크로네면 1000원이 채 안 됩니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 해부학 교수 할리 먼센은 인간의 몸이 칼슘 2.25㎏, 인산염 500g, 칼륨 252g, 나트륨 168g에 소량의 마그네슘과 철, 구리로 되어 있고, 체중의 65%는 산소, 18%는 탄소, 10%는 수소, 3%는 질소로 되어 있다며 모든 물질의 값을 셈하면 89센트(한국 돈 950원 안팎)라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에 의지하는 사람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두려워하며 자기 인생에 죄책감을 느낀답니다. 기독교인 상당수가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천국’에 가지 못할까 걱정한다는 거죠. 그런데 주커먼이 만난 대다수 북유럽 사람들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의 삶도 죽음과 함께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고, 그에 따라 현재의 삶에 충실합니다.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며 ‘지금, 여기’를 마음껏 누린다는 거죠.
둘째, 이상적 세속주의입니다. 주커먼이 어느 북유럽인에게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질문했을 때, “인생의 의미? 나는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렸어요. 그 시간을 최대한 잘 보내는 것이 나의 의무죠. 정말이지 훌륭한 세월을 보냈어요”라는 답을 듣습니다. “삶의 의미라는 건 그냥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요”라거나 “의미야 모든 곳에 있죠. 자신의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거죠. 그걸 할 수 없다면 먼저 자기 인생을 정비해야 할 거예요”라는 답에도 주커먼은 잔잔한 감동을 받았답니다.
인생의 의미를 “내게 묻는다면 생이 즐거웠다고 말하겠어요. 원칙적으로 삶은 모두가 받은 기분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는 북유럽인, 삶의 궁극적 의미에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주커먼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안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의문을 품습니다. 과연 종교학자들 주장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사색만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이 종교를 지탱하는 원동력일까요? 주커먼이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셋째,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인주의입니다. 회의적이고 세속적이지만 북유럽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에 무관심하지 않은데요. 거기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라는 사실이 깔려 있지요.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두려워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잘 유지하기 위해 사회에 참여하고 공동체 윤리를 따릅니다. 그러니까 삶의 궁극적 의미도 어느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죽음 앞에 인간은 더없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도 투영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연약한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생활 방식을 만들어온 거죠.
주커먼이 미국-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나라, 예수와 신을 찬양하는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가 세 대에 한 대꼴인 나라, 예배와 기도를 권고하는 광고판이 도심 곳곳에 서 있는 나라,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나온 목사들이 죄악에 물든 세상을 개탄하고 이교도를 저주하는 나라, 신이 없는 나라는 부도덕과 사악함이 판칠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라-에 던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은 곧바로 한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성경을 많이 사랑하는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빈곤을 사실상 퇴치한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많은 구성원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어린이와 노인, 고아의 복지를 위해 전문적인 보살핌을 제공해 주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요컨대 루터교의 전통 속에서 오래 살아왔던 대다수 북유럽 사람들은 성경이 신의 말씀을 그대로 적은 책이라거나,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뒤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더는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북유럽 사람들이 말하는 기독교의 고갱이입니다.
우리 시대에 부활한 예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쓰고 있는 지금, 여기까지 함께한 독자는 차분히 자문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는 부활했다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그리고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걸까요?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친 예수가 부활한 뒤 지금까지 2000년 넘도록 하늘에서 신 옆에 가만히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한 예수를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짐작한 독자도 있겠지만, 이미 예수는 자신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이 책의 앞에서 ‘예수는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이미 인용한 ‘신의 말씀’에 나오지요.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을 명확하게 일러준 마태의 기록을 다시 또박또박 옮깁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고 예수는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말하지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예수가 “분명하게” 말해주었는데도 부활한 예수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면, 그것은 만날 의지가 없는 사람이겠지요.
아직도 미심쩍어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말을 마저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예수 또한 되풀이해서 강조했거든요.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복음 25:31-46)
* 예수는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나요?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는 중요합니다. 실제로 성당과 교회 안팎에서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합니다. 누구에게 어떤 기도를 해야 옳은지 궁금할 텐데요, 예수가 살아 있을 때도 그게 궁금했던 제자가 있었지요. 제자가 예수에게 어떻게 기도하는 게 좋은가를 묻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기도문을 일러줍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가 직접 기도하는 방법을 또박또박 가르쳐줍니다. ‘주기도문’으로 알려져 있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마태복음 6:9~13)
기독교인이라면 익히 아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바로 앞에는 주목할 만한 예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지요. ‘외식外飾'은 겉으로 꾸미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덧붙이지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회당은 성당이나 교회이지요. 다른 사람들 눈에 띄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경계한 예수는 이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한글로 번역된 성경의 주기도문은 히브리 성경의 원문과 차이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의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의 히브리어는 “빚을 탕감해 준”입니다. 여기서 빚을 탕감해 주라는 구체적 의미는 모세가 전한 ‘신의 말씀’에 또렷하게 나옵니다(신명기 15장). 빚을 탕감해 주라는 말씀 뒤에 “가난한 사람이 있거든 너희는 인색한 마음으로 돈을 움켜잡거나 그 가난한 형제를 못 본 체하지 마라. 손을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주어라”(신명기 15:7~8)고 ‘명령’합니다. 이어 “너희가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가 사는 땅에는 너희 동족으로서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이 어차피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너희 손을 뻗어 도와주라고 이르는 것이다”(신명기 15:11)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가 제자에게 “이렇게 기도하라”며 가르쳐준 기도문에는 명확하게 “빚을 탕감해 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거죠. 그것을 한글 성경은 “죄를 사하여”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 성경 ‘원문’으로 주기도문을 읽을 때, 예수가 살아서 강조한 ‘사랑’의 뜻이 더 또렷하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