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먹히느냐 사느냐,
먹이동물들의 스트레스
인왕산 백사실계곡은 서울 4대문 안에서 유일하게 도롱뇽이 사는 곳이다. 도롱뇽은 봄이면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시내에 우무처럼 생긴 자루 속에 알을 낳아놓는다. 알에서 깬 새끼는 머리가 크고 꼬리가 길어 언뜻 올챙이처럼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네 다리가 나와 있고 나뭇가지 모양의 겉아가미가 밖으로 삐져나온 모습이 특이하다. 도심의‘비밀정원’을 흐르는 깨끗한 물속에서 도롱뇽의 봄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건 밖에서 사람이 바라본 풍경일 뿐, 물속에선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도롱뇽 새끼는 포식성이 강하다. 주로 물밑에 사는 무척추동물을 먹고 살지만, 올챙이나 형제인 도롱뇽 새끼도 잡아먹는다. 먹느냐 먹히느냐를 결정하는 건 입의 크기이다. 동료보다 빨리 자라 머리가 커진 도롱뇽은 동종포식에 나선다. 어차피 다른 먹이보다 크기도 하고 영양가도 높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물벌레를 먹던 도롱뇽을 동료에게 입맛을 다시는 포식자로 바꿔놓을까. 삼육대학 행동과학연구실 정훈 교수팀은 백사실계곡 등에서 구해온 도롱뇽 알을 부화시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이런 의문에 도전했다.
일반적으로 도롱뇽은 다른 ‘입 큰’도롱뇽의 공격을 받거나 곁에서 동종포식을 목격하는 직접적인 경험을 하면 머리가 커지는 등 변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 교수팀은 물이 드나드는 불투명한 플라스틱 수조를 이용한 실험에서 어린 도롱뇽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주변의 다른 개체들이 동료에게 잡아먹히는 화학신호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커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도롱뇽은 주변에서 동종포식이 벌어지는지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버들치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커진다는 실험결과도 얻었다. 버들치는 도롱뇽 새끼를 잡아먹는 포식자이다.
물속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포식자와 그 먹이동물 사이의 관계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포식자가 작은 동물을 잡아먹어야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포식자의 존재 그 자체가 생태계를 바꾸어놓는다. 특히 잡아먹히는 쪽의 대응이 만만치 않다. 포식자는 굶느냐 먹느냐의 문제이지만 먹히는 쪽에겐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그래서 도롱뇽처럼 약한 동물들은 포식자에 관한 화학적 단서를 감지하는 전문가로서,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 형태, 그리고 생활사까지 바꾼다.
첫 화학적 단서는 포식자의 특징적 냄새이다. 그 화학물질을 감지하느냐에 생사가 달렸다. 포식자 때문에 놀란 다른 먹이동물이 내는 화학정보도 요긴하다. 놀란 먹잇감은 종종 오줌과 함께 암모니아를 순간적으로 방출한다. 공격받은 개체의 조직이 파괴되면서 나오는 화학물질도 강력한 경고이다. 원생생물부터 양서류까지 동물들은 부상당한 동료가 방출하는 화학적 단서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포식자를 감지하면 먹이동물은 활동을 줄이고 은신처에서 더 오래 머무는 식으로 대응한다. 어떤 가재는 포식자의 단서에 집중하느라 먹이를 감지하는 능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포식성 물고기가 있는 연못의 잉어는 포식자가 삼키지 못하도록 몸의 폭을 넓히는 쪽으로 형태가 변했다. 어떤 개구리의 알은 알을 공격하는 거머리 냄새를 가하면 부화 시기가 앞당겨지기도 했다.
포식자도 쫄쫄 굶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미국 동부 미시시피 강 유역에 사는 해적농어는 이름처럼 개구리, 작은 물고기, 물벌레 등을 닥치는대로 잡아먹는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불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칸막이를 해 서로 모습을 볼 수 없는 수조를 이용한 실험에서 개구리나 물벌레는 다른 포식성 물고기가 있으면 산란을 줄이는 등 민감하게 반응을 했지만 해적농어는 전혀 개의치 않아 마치 천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해적농어가 자신의 냄새가 나지 않도록 가려 ‘유령 물고기’가 되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그 메커니즘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평화로워 보이는 물속에선 포식자와 먹이동물 사이에 진화적인 군비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승패를 좌우하는 건, 사람의 군사분쟁에서처럼 적의 동태를 감지하는 능력이다.
캐나다 과학자들이 잠자리 애벌레를 이용해 실험해봤더니, 포식자가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죽어가는 개체가 있었다. 그 효과는 두고두고 지속되어 잠자리로 탈바꿈하는 시기까지 이어졌다. 연구자들은 미국 미주리 주의 연못에 사는 잠자리 애벌레를 채집해 실험실에서 포식자인 블루길과 왕잠자리 애벌레에게 노출했다. 왕잠자리 애벌레는 물고기가 없는 연못의 최상위 포식자이다. 실험실에서는 수조에 칸막이를 해 애벌레가 포식자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지만 잡아먹히지는 않도록 했다. 포식자의 먹이로는 잠자리 애벌레를 따로 주었다. 실험결과 블루길과 자리를 함께한 잠자리 애벌레의 사망률은 포식자가 없는 수조에서 기른 애벌레보다 4배나 높았다. 왕잠자리에 노출된 애벌레의 사망률도 2.5배 높았다. 이런 결과는 포식자에게 직접 잡아먹히지 않더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먹이동물이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구진은 포식자에 노출한 뒤 살아남은 잠자리 애벌레가 탈바꿈하는 과정도 추적했는데, 정상 개체에 견줘 탈피 때의 사망률이 1.2배 높았다. 포식자 스트레스가 오랜 기간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왜 포식자의 존재로 인한 스트레스가 사망을 불러일으킬까. 연구자들은 에너지 획득의 감소와 병원체에 대한 취약성 증가를 꼽았다. 대부분의 먹이동물은 포식자가 주변에 있는 것을 감지하면 먹이 섭취를 중단한다. 따라서 포식자와 함께 있으면 성장이 억제돼 사망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늘어나면 면역력이 약화되며 부정적인 생리반응이 나타난다. 성장 억제와 잦은 감염이 사망을 부른다는 것이다.
포식자와 먹이의 관계는 생태학자들의 큰 관심거리이다. 직접 잡아먹지 않고도 영향을 끼치는 사례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미국 과학자들이 메뚜기를 들판의 사육장에서 길렀다. 새들은 사육장 위에 앉아 주변에서 잡은 메뚜기를 먹는 등 메뚜기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천적을 의식한 메뚜기는 움직임을 삼가고 풀 위로 높이 올라가지 않았다. 하지만 생존에 급급하다보니 번식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번식률은 떨어졌다.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사는 도마뱀을 대상으로 천적인 때까치가 있을 때 먹이동물의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본 연구에서도, 도마뱀이 덜 움직이는 경향이 분명했다. 평소 좋아하는 먹이를 찾아다니기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때우고 작은 먹이로도 만족했다.
최근 <사이언스Science>에 실린 메뚜기 연구는 포식자가 먹이동물의 화학조성을 바꾸어놓으며, 결국 토양 생태계까지 변화시킨다는 결과를 보고해 눈길을 끈다. 연구진은 메뚜기 사육장 두 곳 가운데 하나에 천적인 거미를 집어넣었다. 거미의 입을 접착제로 붙여 메뚜기는 잡아먹히지는 않지만 공포에 사로잡히도록 했다. 공포는 메뚜기에게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켜 몸속의 에너지 소비가 증가했고, 결과적으로 공포를 겪지 않은 메뚜기에 비해 영양물질인 질소의 체내 함량이 줄어들었다. 연구진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메뚜기와 정상 메뚜기의 주검이 분해돼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했다. 분해기간은 약 40일로 같았지만 스트레스 메뚜기의 주검은 질소 함량이 낮아 토양 미생물 성장이 억제되고 결국 토양의 영양순환이 느려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동물의 행동은 사회현상을 쉽게 설명하는 비유로 종종 동원된다. 그런데 설명이 엉뚱해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정치권, 야구, 시장 등에서 꽤 인기 있는 비유인 이른바 ‘메기론’이 단적인 예이다. 이 비유는 포식자와 먹이동물 사이의 관계를 왜곡해 설명한다. 이를테면 미꾸라지가 사는 논에 메기 1마리를 같이 넣으면 그렇지 않은 논에서보다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를 포식자 앞에서 미꾸라지는 기운이 나기는커녕 스트레스로 수명이 짧아질 것이다. 메기론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을 합리화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미화하는 치명적 약점을 지닌다. 최근의 생태 연구는 과학적으로 그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굳이 과학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과밀한 수조에 메기를 넣어 미꾸라지를 놀라게 하면 당장은 생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머지않아 산소와 에너지 고갈로 사망률이 높아질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슬픈 동물원
2013년 3월 20일 영국 런던동물원에 새로운 명물이 등장했다. 수마트라호랑이 2마리를 위해 2,500제곱미터의 터에 360만 파운드(약 61억 원)를 들여 만든 새로운 개념의 동물사가 문을 연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이 사설을 통해“(동물원이) 구경거리에서 과학을 향해 오랜 여정을 거친 끝에 도달한 정점”이라고 칭송한 사육시설이다. 이곳은‘호랑이가 먼저, 구경꾼은 나중’이라는 개념에 충실했다. 인도네시아 정글을 떠올리도록 나무를 무성하게 심고 웅덩이도 마련해 관람객들은 호랑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또한 답답한 지붕을 걷어내는 대신 지름 3밀리미터의 스틸케이블로 그물망을 만들고 높이 20미터의 기둥 4개로 받쳐 거대한 거미줄처럼 천장을 덮었다. 높은 곳에서 사방을 조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호랑이의 습성에 맞춰, 사람이 동물을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호랑이가 사람을 내려다보는 곳을 만들기도 했다. 먹이인 고기는 공중에 매달아 점프를 해서 발톱으로 낚아챌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만일 두 수마트라호랑이가 동물원에서 태어난 개체가 아니었다면 고향에 왔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1828년 런던동물학회는 리젠트공원 안에 런던동물원을 열었다. 이를 시초로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 북미의 다른 도시들도 앞 다퉈 공원에 동물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과학적인 목적으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라는 수식어가 런던동물원에 따라다니는 이유이다. 그런 만큼 이 동물원의 시설은 동물원의 산 역사이기도 하다. 동물원은 영국이 세계의 식민지를 경영하던 빅토리아시대의 분위기에 걸맞은 시설이었다. 점차 늘어나던 중산층 사람들은 여가생활에 대한 욕구가 컸고, 새롭게 개척하는 식민지에서 들여온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면서 화제가 될 새로운 지식을 갈구했다. 동물원을 바라보는 이때의 시각은 아직까지 많은 동물원에 그대로 살아 있다.
런던동물원에서 가장 유명한 시설은 1934년 건설한 펭귄 풀이다. 러시아에서 망명한 건축가 베르톨트 루베트킨Berthold Lubetkin이 설계한 이 시설은 펭귄이 2개의 나선형 경사로를 따라 오르내리는 모습을 구경꾼이 마치 미인대회를 보듯 볼 수 있도록 한 아름답고도 모던한 걸작이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당시 어느 누구도 펭귄 처지에서 이 시설을 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새하얀 경사로는 펭귄에게 너무 눈부셨고 콘크리트 바닥은 펭귄의 발에 상처를 내곤 했다. 풀의 수심은 펭귄이 자맥질하기엔 너무 얕았다. 이 시설은 2003년에야 폐쇄가 결정됐다. 새롭게 만든 펭귄 비치는 사람보다는 펭귄에게 더 편리하도록 설계돼 2011년 문을 열었다. 동물들의 감옥이던 동물원이 동물복지를 생각하는 시설로 바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닌 셈이다.
1909년 일반에게 문을 연 창경원은 우리나라 동물원의 효시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5대 궁궐의 하나인 창경궁을‘원’으로 격하한 것은 일제였다. 일제는 순종의 오락장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궁궐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웠다. 어쨌거나 창경원은 1970년대까지 그림책에서나 보던 신기한 외국 동물을 구경하고 봄철 꽃놀이를 하는 시설로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4월이면 창경원 일대는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의 1970년대는 영국에서 런던동물원이 만들어지던 1820년대 빅토리아시대와 비슷했다. 1970년 25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77년 1,012달러로 4배 뛰었다. 연간 수출액 100억 달러를 달성한 것도 당시였다. 1975년엔 승용차 보급도 170명에 1대꼴로 늘었다. 레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창경원에는 해마다 300만 명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뤘다. 이에 정부는 수도권 외곽으로 창경원을 이전하고 그곳에 대규모 국민 레저시설을 짓기로 했다. 애초에 방점은 레저시설에 있었고 동물원은 같은 규모로 이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동물원을 시찰하면서 동물원이 비좁은 전시시설에서 자연적인 공원 형태로 바뀌고 있음을 파악한데다, 평양동물원보다 더 큰 동물원을 건설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인해 서울대공원 동물원은 오늘날의 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서울대공원은 1984년 문을 열었다. 현재 동식물원이 222만제곱미터에 놀이시설인 서울랜드는 81만 7,000제곱미터의 크기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물원이고 다른 지자체의 동물원이나 사설 동물원과는 견주기 힘들 정도로 좋은 시설이지만, 국제적인 기준에는 많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4년 환경운동연합 동물복지모임인 하호가 내놓은 보고서 <슬픈 동물원>은 충격적이었다. 철창에 갇혀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하는 독수리, 물이끼로 얼룩져 녹색 곰이 된 북극곰, 바닷물이 아닌 민물에 살면서 눈에 백태가 낀 물범,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핥고 있는 기린을 비롯해 좁은 우리에 갇혀 스트레스로 인한 정형행동을 벌이는 수많은 동물이 세상에 알려졌다. 자연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시민들의 눈높이는 갈수록 높아지는데도, 입장료 수입에 의존하며 투자를 게을리하는 사이 시설은 점점 낙후되어 관람이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동물원 관계자 스스로 ‘동물원의 위기’를 말하는 상황이 왔다.
서울대공원 고릴라사. 사람의 편의에 앞서 고릴라의 안정을 고려한 관람창. |
2011년 취임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일찍이 동물권에 눈떴다는 사실은 서울동물원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제주 바다로 돌려보내고 돌고래쇼를 중지한다는 결정은 서울동물원에게 엄청난 결정이었다. 돌고래쇼는 연간 100만 명 가까운 관램객이 몰리는 서울동물원의 간판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돌고래쇼를 보기 위해 한두 시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정도였다. 2011년 433만 명을 기록하던 입장객이 이 쇼를 중단한 이듬해에는 353만 명으로 급감한 데서도 이 프로그램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동물원은 입장료 수익 대신 동물복지와 동물원의 생물다양성 보전기능을 중시하는 새로운 비전과 발전계획 수립에 나섰다. 미국 브롱스‘동물원’이 ‘종보전센터’로 명칭을 바꿨을 정도로 세계의 동물원이 변신을 모색하는 흐름을 중시한 것이다.
사실 동물원은 자연의 압축된 모습이다. 자연은 그것이 국립공원이든 동네의 야산이든 인간에게 둘러싸여 있다. 남한에서 호랑이는 이미 멸종했지만 동물원엔 적지 않은 수가 살아 있다. 세계의 야생에 서식하는 호랑이는 3,000여 마리로 추정되는데, 세계의 동물원에서 기르는 호랑이 수도 그 정도는 된다. 야생에선 밀렵꾼에 쫓기고 조각난 서식지에 머물며 고립될 수밖에 없지만 동물원들은 호랑이 정보를 교환하며 유전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국제결혼’을 주선하는 일에 열성적이다. 동물감옥에서 출발한 동물원은 이제 자연에서 사라지는 생물을 보존하는 노아의 방주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는 당신에게
깃이나 모자 끝을 북미산 너구리인 라쿤 털로 장식한 외투가 유행하자 한 동물보호운동가가 온라인 매체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동물에게 고통만 주는 이런 옷을 입지 말자’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반발하고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목소리엔 ‘인간보다 먹이사슬에서 열등한 동물이 사람 손에 죽는 게 뭐가 문제냐’,‘ 왜 동물을 사람 취급하느냐’하는 불만이 깔려 있다. 심지어 동물보호운동이 나치의 잔재라는 비난도 나왔다. 히틀러Adolf Hitler가 채식주의자였던데다 동물애호와 환경보전을 주창하고 생체실험에 반대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동물보호에 나치의 낙인을 찍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 학살은 동물에 대한 잔인한 도살과 학대에 더 가까워 보인다.
독일 사회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누군가 도살장을 바라보며 ‘그들은 동물일 뿐이야’라고 생각할 때마다 아우슈비츠는 시작된다”고 적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인간화는 동물을 무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동물보호단체 누리집의 자유게시판에 들어가보면, 동물학대를 고발하는 제보가 끊이지 않는다. 종종 엽기적이고 일상화된 이런 행위는 대체 왜 생기는 걸까? 개나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도 가족이나 이웃 또는 직장 동료에게는 살가운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외국인 노동자나 동성애자 같은 소수집단이라도 그럴까. 이것이 요즘 사회심리학자들이 던지는 ‘비인간화의 뿌리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닿아 있다.
역사적으로 내가 속한 집단 밖에 있는 외집단을 ‘동물 같다’고 바라본 예는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진주만 기습공격을 받은 미국에서 일본인은 ‘노란 원숭이’나 ‘쥐’로 묘사됐다.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일본의 토속신앙을 ‘야만 문화’라고 표현했다. 한 역사가는 “눈이 째진 일본 조종사는 총탄을 똑바로 발사하지 못하고 해군 장교는 어두울 때 앞을 잘 보지 못한다”고 적기도 했다. 외집단에 속한 사람을 인간보다는 동물에 가깝다고, 그래서 감정과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간주함으로써 동정과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로부터 외집단을 배제하고 학살하고 노예화하는 차별행동이 나온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을 구분하는 생각은 부지불식간에 인간 집단 내부에서도 동물에 가깝다고 간주되는 외집단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흑인을 원숭이에 가깝다고 느끼는 백인일수록 흑인 범죄용의자에 대한 폭력을 더 인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캐나다의 심리학자들은 최근 실험을 통해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고 굳게 믿을수록 이민자에 대한 편견도 깊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사람과 동물의 유사성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은 뒤 이민자도 캐나다 사람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과 다른 동물이 결코 분리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문제는 범죄예방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와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인 사람의 다음 표적은 어린아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연방수사국FBI의 범죄심리분석관이 장차 나타날 폭력행동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네 가지 지표 가운데 하나가 동물학대이다. 한 연쇄살인범 프로파일러는 “대부분의 살인범들은 어릴 때 동물을 죽이거나 고문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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