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10대와 노동이라는 ‘미지의 세계’
“노동요? 막노동 말이죠? 그거 무척 힘들잖아요.”
“그런데 그 얘기를 왜 하는데요?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문제에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인터넷 강의 하나라도 더 듣는 게 낫지 않나요?”
“앞으로 노동 같은 거 안 하고 편히 살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노동에 대해 알아보자고 하면 10대들 상당수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다. ‘노동’이라는 낱말부터가 살아오면서 자주 듣기 어렵지요. 더러 들어 본 사람이라도 그 뜻을 정확히 모를뿐더러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을 거예요. 나아가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리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런데도 저는 10대 여러분에게 노동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제가 20년 남짓 노동 운동을 하면서 쌓아온 그에 관한 식견을 알려 주고 싶어서만은 아니에요. 노동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공부하는 국어, 영어, 수학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노동 문제를 제대로 아는 게 국·영·수보다 우리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사람, 그러니까 ‘경제 활동 인구’ 가운데 대다수는 ‘노동자’예요. 경제 활동 인구는 2,500만 명쯤 되고, 그 가운데 노동자가 1,700만 남짓이니 70%를 헤아립니다. 이 얘기는 여러분의 부모님 가운데 열에 일곱은 노동자라는 뜻이에요. 노동자가 이렇게 많다니 좀 놀랐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동안 노동이나 노동자에 대해 뭔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얘기예요. 흔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예요. 따라서 우리 사회 구성원 중 가장 많은 노동자에 대해 이제라도 제대로 아는 건 무척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노동, 특히 노동 인권을 잘 알아야 하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요. 우리들은 대부분 학업을 마친 뒤 노동자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현재 우리나라 경제 활동 인구의 70%가 노동자라면 사회가 급변하지 않는 이상 우리 세대 또한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딴 사람은 몰라도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절대 노동자로 살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내가 왜 노동 인권을 알아야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친구도 있을 겁니다. 그럼 한번 물어볼게요. 노동자가 싫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요? 법조인, 의료인, 공무원, 교육자, 방송인, 과학자, 엔지니어……. 이것 말고도 여러분은 좀 더 ‘폼 나는’ 직업을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어쩌죠. 나중에 보겠지만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대부분 노동자예요. 역시 놀라운가요?
저는 ‘어쨌든 노동자는 되기 싫다’는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해요. 노동(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생각은 여러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자신이 노동자인데도 그 사실을 모르거나 애써 부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여러분이야 오죽할까요.
그래도 여러분 대다수가 앞으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더욱이 우리가 희망하는 직업도 알고 보니 노동자라면, 애써 부정하기보다는 정확히 알아보는 게 합리적 태도 아닐까요. 노동자는 여러분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딱한 처지에 있지만은 않아요. 한번 볼까요. 방송인도 다수가 노동자라고 했죠. 그들 처지가 딱하던가요? 물론 어렵게 사는 방송인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많은 10대가 방송인을 선망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방송인을 꿈꾼다면 방송인이 누리는 혜택이 궁금할 겁니다. 봉급은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근무 시간이나 복지 제도는 어떤지도 알고 싶겠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노동자의 권익이에요.
이렇듯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노동자라는 점, 무엇보다 우리 대부분이 앞으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점에서 노동과 노동자, 노동 인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노동자는 어렵게 산다’는 편견에 갇혀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어요. 요컨대 ‘노동자로 살아도 괜찮을까’를 놓고 씨름하는 대신 ‘내 꿈을 이루려면 어떤 노동자가 될지’ 깊이 생각하는 게 현명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노동자가 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들 가운데 30%쯤은 노동자가 아닌 삶을 살아갈 겁니다. 어떤 경우일까요? 여러분 가운데는 “나는 경영학을 공부해서 기업가(사장)가 되겠다”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겁니다. 기업가를 꿈꾸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풍요가 크겠지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부자를 꿈꾸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부유하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에요. 재산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심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이나 심인성 질환 같은 질병에 걸리기 쉽고, 자신의 처지에 불만인 상태가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경제적 안락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행복감은 되레 줄어든다고 해요. 그저 부자가 되고 싶어서 기업가를 꿈꾼다면 이 점을 거듭 새겨 봐야 할 거예요.
기업가는 노동자가 아닙니다. 거꾸로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죠. 그럼 기업가를 꿈꾸는 사람은 노동(자)에 대해 몰라도 될까요? 이 또한 어리석은 물음이죠. 노동자가 의욕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해야 경영 성과도 좋아요. 노동자를 그렇게 이끌려면 노동(자)을 깊이 이해해야 하겠지요. 갈수록 노사 관계(노동자_사용자 관계)가 중요해지는데 사용자가 노동 인권을 침해한다면 비난 여론이나 노사 분쟁을 부를 수밖에 없죠.
흔히 ‘자영업자’라 하는 계층 또한 노동자로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가족 또는 직원 몇 명과 함께 일하며 자기 사업을 꾸려 가죠.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게 주인, 즉 보통 ‘사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죠. 자기 땅 또는 빌린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자기 배 또는 빌린 배로 어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영업자는 전체 경제 활동 인구의 23.5%입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산업이 더 발달하고 경제가 안정된 나라들은 자영업자 비율이 10%가 안 된다고 해요. 자영업자 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 수준이 낮고, 고용 사정이 불안하다는 뜻이에요.
처음부터 자영업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하는 게 보통이에요. 사업이 실패하면 다시 직장을 구해 노동자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많고요. 그러니 ‘한번 노동자는 영원한 노동자’ 또는 ‘한번 자영업자는 영원한 자영업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노동자였다가 농업인(자영업자)으로 바뀐 경우고요.
요약하면, 우리들 대다수는 앞으로 노동자가 될 테니 앞날을 대비해 노동과 노동 인권에 대해 알아 두자는 것입니다. 설령 노동자가 되지 않더라도 노동(자)과 연관될 수밖에 없으니 기본적 이해는 필요해요. 더구나 10대들 가운데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노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흔히 ‘알바’라 부르는 아르바이트생 말이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전국의 고등학생 1,681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2011년 6월)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등학생 10명 중 4명 꼴(37.4%)로 아르바이트를 해 봤다고 합니다. 중학생은 이보다 적지만 그래도 20%대는 되는 듯해요. 그만큼 10대 청소년 상당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사용자들은 학생이라고, 어리다고 봐주지 않아요. 오히려 무시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하는 경우가 많지요. 세상 물정 모르고, 실정법과 제도에 어둡다는 점을 악용하는 거예요.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인권을 침해하거나 법이 정한 근무 조건을 어기는 사례가 언론 매체에 꾸준히 실리는 형편이죠.
말이 ‘아르바이트’여서 그렇지 하는 일은 다른 ‘노동’하고 다를 게 없어요. 위의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절반이 ‘경제적 이유’, 그러니까 돈을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든, 다른 사정이 있어서든 수입을 목적으로 일을 한다면 어른들의 노동과 다를 게 없지요. 그렇다면 10대 아르바이트생한테도 당연히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아니, 어른보다 힘이 약하고 미숙하니까 더 특별히 보호해야죠. 실제로 노동법은 그런 규정을 두고 있어요. 문제는 일부 고용주들이 그걸 무시하고 부당한 대우를 한다는 점이에요. 10대 청소년들이 노동(자)과 노동 인권을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특성화(전문계) 고등학생의 현장 실습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현장 실습을 들여다보면 ‘교육’ 취지는 거의 사라지고 ‘노동’만 남은 경우가 많아요. 당연히 법과 제도를 바로잡고, 실질적 노동에 대해서는 합당한 처우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불법·부당 행위가 판치고 있어요. 전문계 고교생들은 더더욱 현장 실습 관련 규범과 그 바탕이 되는 노동의 가치를 잘 알아 두는 게 좋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장래 직장 생활에 대비해서도, 당장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노동(자)과 노동 인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어떤 면에선 국·영·수보다 더 중요한 공부죠. 따라서 그 내용은 학교 교과 과정에서 다뤄야 마땅해요. 실제로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에는 그 내용이 일부 실려 있어요. 하지만 분량이 너무 적은 데다 잘못된 내용도 있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해요. 그러니 하루빨리 노동 인권 교육을 개선해야겠지요. 학교 교육 과정을 바꾸고, 새로운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해요. 특히 ‘사회 문제’라는 시각에서 노사 갈등, 노동 쟁의, 노사 협조 따위만 다룰 게 아니라 노동의 가치, 노동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다뤄야 합니다.
학교 교육 과정을 개편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려면 복잡한 절차와 오랜 시간을 거쳐야 해요. 그렇다고 그때까지 부실하고 문제 많은 교육 내용에 얽매어 있을 순 없겠지요. 교과 내용이 개편되기 전이라도 학생과 교사, 그리고 민간 차원의 다양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창의적 재량 활동’ 시간을 활용해 나름의 창의적 노동 인권 수업을 진행할 수도 있겠지요. 관련 단체나 전문가들 또한 강연회를 비롯해 강좌, 토론회, 도서 출판 같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방법도 있고요. 이 책도 사실 그런 노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가운데는 처음 이 책을 보면서 ‘별 흥미도 없는 노동 문제를 굳이 따로 책을 내면서까지 다룰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이 글을 읽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 궁금하군요. 적어도 ‘우리가 꼭 노동과 노동 인권을 알아야 해?’ 하지는 않으리라 믿고 싶어요. 이 책을 통해 노동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두루 이해하고, 미래의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 의식을 다지기 바랍니다.
1부 노동, 그리고 노동자
1. 노동이란 무엇일까요?
‘노동’ 하면 떠오르는 것
먼저 물어볼게요. ‘노동’ 또는 ‘노동자’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아마 ‘신성하다’거나 ‘보람차다’ 같은 긍정적 느낌보다는 뭔가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 클 거예요. 실생활에서 별로 쓰지도 않거니와 듣게 되더라도 막노동, 중노동, 노동의 고통 따위의 부정적 어감이 강한 게 많아요.
그러다 보니 10대 여러분이 많이 물어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노동이냐?’는 거예요. 이 물음에는 ‘노동은 원래 힘든 건데, 공부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니까 노동 아니냐!’는 속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여러분은 무의식중에 ‘노동은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물론 공부는 노동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하지만 학자나 연구원처럼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경우엔 노동입니다.
그런 탓인지 노동에 대한 우리나라 10대들의 생각은 몹시 부정적이에요. 몇 년 전 서울 지역 고등학교 2학년 4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2005, 전교조 실업위원회) 에서 ‘노동자 하면 주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55.3%가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다’는 이미지를 떠올렸고, 가난하다 34.7%, 불쌍하다 33.6%, 나는 되고 싶지 않다 39.4%였어요. 반면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다’라는 응답(35.2%)은 꽤 됐지만 ‘자랑스럽다’(3.2%)거나 ‘미래의 내 모습’(5.0%)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죠.
이 결과를 종합하면 ‘노동자는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지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가난하고 불쌍하므로 나는 되고 싶지 않다’는 게 우리나라 10대들이 흔히 하는 생각이라 할 수 있어요.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성인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노동은 고통스런 과정’이라거나 ‘되도록 노동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높게 나타났어요.
이렇게 된 데는 학교 교육이 미친 영향도 커요. 노동 문제를 다룬 교과서에는 노동에 대해 나쁘게 묘사하는 내용이 적지 않아요. 그 결과 노동(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심어 준 것이죠. 현실이 이러니 ‘나는 커서 노동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그런데 우리 10대 가운데 70% 정도는 앞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가난하고 불쌍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정녕 믿고 싶지 않은 얘기죠?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거나, 노동(자)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요. 과연 어느 쪽일까요?
노동이 뭐길래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노동의 ‘개념’은 아직 알아보기 전이에요. 그렇다면 노동이란 무엇일까요.
알다시피 노동은 일할 로(勞)와 움직일 동(動)으로 이루어진 한자 낱말입니다. 먼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또는 간단히 ‘몸을 움직여 일을 함’으로 풀이해 놓았어요. 노동은 순 우리말 ‘일’에 해당합니다. ‘일’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으로 풀어 놓았어요. 노동과 그 뜻이 거의 비슷하죠.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개념어 다수가 그렇듯 ‘노동’ 또한 일본을 거쳐 들어온 근대 번역어예요.
노동은 사람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이루는 핵심 요소예요. 정체성이란 어떤 것의 변치 않는 고유한 속성을 뜻해요. 다시 말해 누가 무슨 일(노동)을 하는지를 알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거죠. 근대 이전에는 신분과 성별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했어요. 어떤 사람이 귀족(양반)이냐, 중인이냐, 평민이냐, 천민이냐가 그 사람을 식별하는 일차적 기준이었죠. 특별한 변고가 없는 한 그 지위는 대대손손 이어졌고요. 이 점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영주^성직자-기사-평민-농노로 이어지는 위계질서만 다를 뿐이었죠.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이렇듯 어떤 신분으로 태어나느냐, 그리고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했습니다.
하지만 근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신분제는 차츰 사라져요. 이에 따라 사람의 정체성을 가르는 기준도 신분이 아닌 ‘그가 무슨 일을 하느냐’로 바뀌게 되죠. 신청서, 원서 따위의 서식을 보면 보통 성별과 함께 직업을 적는 칸이 있잖아요. 이는 직업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걸 보여 줘요. 명함을 보더라도 이름 앞에 보통 직장과 직업(직위)을 표시합니다. 직업 활동 자체를 노동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노동은 인격의 일부가 되는 셈이죠.
그럼 노동이 무엇인지, 그 본질적 속성을 알아볼까요. 앞에서 살펴본 노동에는 ‘사람이 하는 짓’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그런데 모든 생물은 자연의 산물을 거둬들이고 이용합니다. 식물은 땅속의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고, 동물은 식물이나 다른 동물을 먹이로 삼아요. 원시 인류도 과일, 곡물 같은 야생 식물을 채취하거나 물고기, 짐승을 잡아먹고 살았어요. 그 공통점은 자연물을 그대로 섭취한다는 거예요. 물론 좀 수고스럽긴 하지만 노동보다는 ‘소비’에 가까워요. 사실 이렇듯 단순한 소비 행위는 노동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자연물에 변화를 주어 새로운 쓰임새를 만들어 낼 때에야 노동이라 할 만해요. 이 점에서 새나 벌, 개미, 애벌레 같은 동물이 자연물을 옮기거나 변형해 집을 짓는 일도 노동의 일종이라 할 수 있죠. 더구나 이들 동물의 ‘건축 노동’은 놀랍도록 정교해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연환경에 딱 맞게 집을 짓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그것만 보면 사람보다 훨씬 수준 높은 노동이에요. 하지만 이 노동은 어디까지나 본능적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능은 배워서 익히는 게 아니라 지니고 태어나는 능력이에요. 자극에 한 가지로만 반응하죠. 예컨대 고치를 반쯤 지은 누에는 그 반쪽이 없어지더라도 나머지 반쪽만을 짓는다고 해요.
사람의 노동이 동물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것은 자신의 구상에 따라 실행한다는 점이에요. 같은 건축 행위라도 본능대로 하는 동물과 달리 사람은 미리 설계를 하고 건축을 시작하죠. 사람의 노동은 이렇듯 원재료를 변형해 새로운 쓰임새를 만들 뿐 아니라 미리 생각해 둔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할 일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 본(구상) 뒤 손과 도구를 써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실행) 거죠. 인간의 노동이 동물의 노동보다 뛰어난 것은 ‘구상과 실행의 통일’이라는 목적의식적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구상과 실행이 통일된 활동이라고 해서 다 노동은 아니에요. 같은 활동이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맥락에 따라 노동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죠. 예컨대 같은 낚시질이지만 어떤 경우는 노동이고, 어떤 경우는 취미 활동이에요.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도 노동이냐?” 하는 거예요. 어떤 행위가 노동이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 무상이 아닌 수입(소득)이 생긴다. 둘째, 나름대로 힘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심심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한다. 넷째, 어딘가에 유용하게 쓰이는 활동이다. 다섯째, 특정한 규율이 따른다.
이런 기준에 따르자면 이른바 ‘프로 스포츠’는 노동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흔히 ‘아마추어’라고 하는, 직업이 따로 있고 취미로 하는 스포츠는 노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요컨대 구상과 실행이 연계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사회적 통제에 따를 때에야 비로소 노동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Q. 방송이나 신문에서 보면 ‘노동’이나 ‘노동자’보다는 주로 ‘근로’나 ‘근로자’라고 씁니다. 그게 공식 용어니까 그렇겠지요? 같은 뜻인 거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A. 이런 물음을 접할 때마다 저는 무척 씁쓸해집니다.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싶어서죠. 허균의 『홍길동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그래요. 이것은 한마디로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이죠. 원래가 ‘노동’이에요.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서는 근대 번역어로 줄곧 그렇게 써 왔죠. 그런데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노동’에 해당하는 법률 용어는 모조리 ‘근로’로 바뀐 겁니다. 그 이유가 지금 생각하면 무척 황당한데요, 다음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민’이라는 것을 ‘인민’이라고 하는 것에 나는 절대로 반대합니다. 북조선 인민위원회 운운만 하더라도 나는 지긋지긋하게 들립니다. 나는 ‘인민’이라고 쓰는 데에는 절대 반대합니다.” 우리나라 헌법을 만든 제헌 의회(1948년) 의원 윤치영(국회 부의장)의 발언입니다. ‘인민 주권론’이라는 개념도 있듯이, 그 당시 ‘국가의 구성원’을 뜻하는 용어로는 보통 ‘인민’을 썼어요. 하지만 북한에서 쓴다는 이유로 우리 헌법은 결국 인민을 버리고 ‘국민’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게 되죠. 같은 맥락에서 당시 북한의 집권당 이름이 ‘북조선 노동당’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왜 ‘노동’이 ‘근로’가 되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근로기준법 안에서도 그 씁쓸한 흔적을 찾을 수 있어요. 제2조(정의) 1항 3호는 “‘근로’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고 돼 있어요. 왜 ‘정신 근로와 육체 근로’가 아닐까요?
이렇듯 시작은 아주 군색했지만 그 파장은 컸습니다. 제가 1980년대 후반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동료들은 ‘노동자’라는 용어를 무척 꺼렸어요. 보통은 직원, 사원, 심지어 종업원 같은 용어를 썼는데, 노동자 개념이 필요한 경우엔 대부분 ‘근로자’라고 했어요. 공식적으로 쓰이는 법률 용어일 뿐 아니라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이 용어만 썼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때까지도 ‘노동’이 금기시됐던 측면이 강했죠.
또 하나는 ‘노동’이라는 용어가 어딘지 모르게 비천해 보였던 거 같아요. 보통 때는 안 그러다가 자신이나 동료의 처지를 비하할 때면 “노동이나 해서 밥 먹고 사는 주제”, “내가 비록 노동으로 잔뼈가 굵었지만……”, “나도 노동자지만……” 식으로 얘기했거든요. “근로나 해서”, “근로로 잔뼈가” 이런 표현은 쓰지 않잖아요. 노동보다는 근로가 어감이 뭔가 나아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까 ‘근’ 자가 들어가는 ‘근면’, ‘근검’, ‘근무’ 같은 낱말은 ‘스스로 열심히 한다’는 어감이 강하잖아요. 반면 ‘노’ 자가 들어가는 ‘노고’, ‘노역’, ‘노무’ 같은 낱말은 ‘내키지 않고 힘들다’는 어감이 강합니다.
실제로 두 용어의 쓰임새는 어감과 비슷해요. ‘근로’라는 말은 보통 ‘자기 사업, 자기 일’하고 관계가 깊어요. 자영업자, 농어민 같은 사람들이 일하는 걸 콕 집어 얘기할 때 적당한 표현이 바로 근로예요. 이들은 자기 사업을 하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일해요. 가령 ‘농사일은 고되지만 그만큼 보람도 크다’에서 농사일 대신 ‘농업 노동’으로 써도 괜찮아요. 하지만 농업인 모두를 ‘농업 노동자’라고 할 수는 없어요. 우리나라 농민은 대부분 자작이든, 임대든 자기 농사를 짓거든요. 요컨대 자영업자를 포함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을 때 쓰는 말이 바로 ‘근로 대중’, ‘근로 인민’이에요.
반면 ‘노동’이란 ‘고용돼서 하는 일’로 대다수 직장인이 여기에 해당하죠. ‘내 일’이 아닌 탓에 의무감이 들거나 스스로 내킬 때만 열심히 하는 게 보통이죠. 혹시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자면 이건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원리가 그렇다는 얘기예요.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고용돼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만이 노동자예요. 위에서 농업인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기업형 농장에 고용돼 임금을 받고 농사짓는 사람은 당연히 노동자입니다. 실제로 근로기준법 제14조[근로자의 정의]는 “이 법에서 ‘근로자’라 함은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고 나와 있어요.
우리나라 노동관계법에 나오는 법률 용어 ‘근로’는 ‘노동’으로 바꿔야 제대로 된 표현이에요.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죠.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관계법은 일본 법을 거의 그대로 베꼈는데, 그때 앞에서 살펴본 남북 대치 상황 때문에 일본 법의 ‘노동’을 모조리 ‘근로’로 바꾼 거예요. 그러나 ‘노동조합’ 같은 몇 가지는 이미 널리 퍼져 있어서 ‘근로조합’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2. 왜 노동을 해야 하나요?
우리는 왜 일을 할까요? 사람들이 노동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런 물음에는 흔히 “먹고살려고!”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거나 복권이 당첨돼 거액을 손에 쥔 사람이라면 모를까 일을 하지 않고선 먹고살기 힘든 게 사실이죠. 일을 해야 수입이 생기고, 그것으로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직업 활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로 보통 ‘경제적 보상’을 꼽습니다. 돈벌이(수입)가 직업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죠. 그밖에 고용 안정성, 쾌적한 근무 환경, 일의 흥미 따위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노동을 하는 이유가 이게 전부는 아닐 거예요. “밥만 먹고는 못 살아”라는 얘기도 있잖아요. 좀 더 고상하게 “노동은 신성한 것”, “노동은 권리이자 의무”라 하기도 해요.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는 가치가 노동 속에 스며 있다는 거죠. 실제로 사람들은 의식주가 해결되고 나면 본능적, 생리적 욕구를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명예욕이나 권력욕, 탐구욕 따위 말이죠. 이는 ‘왜 사느냐’는 철학적 물음, 그러니까 행복 추구, 자아실현 같은 삶의 최종 목표와도 연관돼요. 노동은 삶과 뗄 수 없고, 삶의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노동을 함으로써 욕구 충족도, 행복 추구도, 자아실현도 이루어지는 셈이죠.
개인뿐 아니라 사회를 보더라도 노동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것처럼, 노동이 없는 사회 또한 상상할 수 없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농업인들이 농사를 그만두면, 산업체 기능인들이 일손을 놓으면, 운전기사들이 대중교통을 멈추면, 환경 미화원들이 청소를 안 하면, 공공 기관과 각종 서비스 업체 종사자들이 서비스를 중단하면……. 그래요. 사람들은 큰 불편을 겪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거예요. 뭇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문명, 생활 편의는 산업 혁명, 기술 진보, 과학 발전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진보와 발전이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 즉 노동의 결정체임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평소에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 흔해 빠진(?) 노동에는 미처 눈이 가지 않는 거예요. 요컨대 자아실현과 사회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다름 아닌 노동이라는 얘기죠.
하지만 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어요. 막노동, 중노동에 스민 어감처럼 ‘힘겹고 고통스러운 행위’로 여기는 거죠.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에요. 고대 그리스인에게도 노동은 ‘저주스러운 것’이었다고 해요. 오직 노예들만 하는 짓이었죠. 자유란 ‘노동에서 벗어난 상태’를 뜻했어요. 그러니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공휴일이 1년에 115일이나 됐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물론 자유민들만의 얘기였죠. 고대 이집트도 한 해의 절반은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중세 유럽에서도 노동은 ‘저급하고 비천한 활동’일 뿐이었어요. 사람들이 노동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죠. 하지만 너도나도 노동을 안 하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으니 힘들더라도 일하게 만들 구실이 필요했겠죠. 그래서 중세 유럽을 지배한 기독교는 노동을 ‘원죄에 대한 속죄 행위’라 설파했어요. 신에게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인류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통이라는 거죠. ‘노동은 신을 섬기는 자의 의무’라는 교리,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성경 구절(데살로니가 후서 3:10)이 이를 상징합니다.
그러다 종교 개혁으로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등장하면서 노동에 더 높은 가치를 두게 돼요. 즉, ‘노동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해석한 거예요. 16세기 종교 개혁을 주도한 프랑스 신학자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노동을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으로 보았어요. 노동의 목적은 생활 수단이 아닌 구원에 있다면서 규율과 금욕을 강조합니다. 칼뱅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지 확인하려면 자신의 직업 성과를 높이라고 설파했어요. 여기서 노동은 ‘저주스러운 것’에서 ‘신성한 것’으로 탈바꿈해요. 19세기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이런 노동 윤리가 자본가 탄생의 정신적 기초가 되고, 결국 자본주의를 세계 역사의 중심에 올려놓았다고 보았어요. 노동이 신성하다는 칼뱅의 교리는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20세기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가장 중요한 노동 윤리로 받들었어요.
옛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노동을 ‘인간의 본성’으로까지 추켜세우죠. 스스로를 ‘노동자의 나라’로 선언하는 한편으로 ‘신성한 의무’로서 노동 규율을 다룬 거예요. 이에 따라 ‘스타하노프 운동’, ‘천리마 운동’ 따위로 노동 경쟁을 부추깁니다. 심지어 ‘강제 노동’이 불가피하다고까지 강변하죠. 예컨대 소련의 1936년 헌법은 “소련에서 노동은 하나의 의무이며, 일할 수 있는 육체를 지닌 시민에게 명예로운 일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단결, 단체 교섭, 단체 행동 같은 권리도 보장하지 않았어요. 노동자가 사회의 주인이므로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는 논리였죠.
지금까지 인류의 노동관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훑어 봤습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시대 지배 세력의 관점이란 걸 알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정작 노동을 실행했던 사람들의 생각은 빠져 있다는 거죠. 여기서 생기는 의문, 몸소 노동을 했던 옛 사람들은 정말이지 노동을 ‘신성한 것’, ‘규율과 금욕이 따르는 소명’이라고 여겼을까요? 나아가 오늘날의 노동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마 “터무니없다”고 할 거예요.
사람들은 오히려 정반대의 노동을 갈망해 왔고, 지금도 갈망하고 있어요. 힘에 부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노동, 다른 사람의 감시나 간섭·강제가 없는 노동, 생체 리듬에 무리가 가지 않는 노동, 싫증이 나지 않는 노동, 뿌듯한 보람을 느끼는 노동,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노동을 바랍니다. 나아가 노동 과정 자체가 즐겁고, ‘놀이’ 같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꿈같은 얘기죠. 그렇다고 이런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어요.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노동이 그랬어요. 문예 부흥의 열정이 노동 세계에도 퍼져 노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 ‘장인 기질’이 생길 때였죠. 하지만 그건 일시적 현상일 뿐이었어요.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임금 노동’으로 존재합니다. 동전의 양면이라 할 자본주의-임금 노동 체제는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에요.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등장한 체제죠. 앞에서 본대로 노동관은 시대에 따라 미묘하게 변해 왔어요. 관점만이 아니라 노동의 성격 그 자체도 변해 왔죠. 이제 노동 형태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지, 자본주의-임금 노동이 등장하는 과정은 또 어떤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