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인간의 존엄’을 추구한 의인의 생애
오래전부터 김근태 선생을 지켜봤다. 처절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일어서고, 역경 속에서도 정도(正道)를 당당하게 걷는 모습이 남달랐다. 때로는 불안하기도 하고 위태롭게 생각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나 4·19혁명, 6월항쟁의 주도자 중에서도 독재권력과 야합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은 세태 속에서 그 사람이라고 언제까지 독야청청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김근태가 가는 길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숱한 유혹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끝내 흔들리지 않았고 정도를 택했다. 그리고 3선 의원, 장관이 되고서도 그의 길은 조금도 삿됨이 없었다. 청렴하고 공정하고 양심적이었다. 그리고 겸손했다. 권력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망나니들에게 끌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답지 않게 그는 항상 표정이 밝았다. “그의 얼굴에 늘 보이는 미소는 그가 독재정권에서 당했던 고문의 흔적을 가렸다”(《뉴욕타임스》). 수심이 깊은 바다가 항상 맑듯이, 깊은 속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깊은 속내’는 이 민족을 사랑하고, 민중을 아끼고, 정도를 걷고자 하는 결기가 만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매양 미소만 지은 선량은 아니다. 천 길 높이의 절벽처럼 우뚝한 기상과 오연한 기개가 그의 속내를 가득 채웠다. 속에는 독을 품으면서 미소 짓는 권력주의자나, 대본에 따라 바뀌는 배우의 억지 미소와는 달랐다. 그의 온화한 얼굴과 따뜻한 미소는 품성대로 순수성이 배어 있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을 쓰면서, 그의 고난에 찬 생애를 상징하는 키워드라면 ‘인간의 존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이 가치를 지키고자 포악한 군사독재에 맞서고 야당에 뛰어들었다. 인권·자유·평등·진보 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다. 그가 타계했을 때 ‘민주주의자 김근태’라 불리고, 같은 명칭의 사회장이 치러진 것도, 따지고 보면 오직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에서만 인간의 존엄을 지킬수 있다는 우리 모두의 자각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존엄을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고, 정치권에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싸웠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된다고 해도 친일·군사독재 잔재의 지배구조, 극심한 빈부격차와 차별대우, 전쟁 위기 속에서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어렵다.
김근태 선생은 2011년 12월 30일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났다. 삿된 세력이 자행한 모진 정신적?육체적 고문의 후유증이 할 일 많은 그의 수명을 너무 빨리 앗아갔다.
우리는 지금 국내적으로는 ‘99 대 1’의 불평등구조, ‘민간인 사찰’로 상징되는 민주주의 퇴보,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집권세력의 부패와 타락, ‘유신망령’의 부활, ‘한국전쟁 이후 가장 위태로운’ 남북관계,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시대’ 청춘들의 아픔이 넘치는 위기를 맞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제2기 체제 출범, 중국 시진핑 총서기의 등장, 러시아 푸틴의 롤백, 북한 김정은의 3대 세습, 거기다가 연말 일본의 총선거를 앞두고 있다. 남북한을 비롯해, 한반도 주변 4강이 거의 동시적으로 권력교체가 이루어지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를 둘러싼 내외 정세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개 속 상황인 것이다.
이럴 때 김근태 선생의 지혜와 역할이 아쉽지만 그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났다. 대신 그는 역사의 정도를 걷는 당당한 의인의 생애와 “2012년을 점령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생전에 그가 그토록 믿고 기대했던 ‘남은 자’들이 선생의 1주기에 ‘정도’가 승리하는 역사의 힘을, 그 결실을 고인에게 기쁜 마음으로 알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근태 선생이 걸었던 형극의 길, 그의 넓고 깊은 신념과 철학을 다 담지 못한 평전을 내놓다 보니 많이 모자란 느낌이 들지만, 어려운 숙제를 풀었다는 안도감에서인지 글을 마무리한 뒤 며칠 끙끙 앓았다. 읽는 분들의 질정을 바라면서, 삼가 이 책을 김근태 선생의 영전에 바치고자 한다.
2012년 초겨울
김삼웅
12장 ‘2012년을 점령하라’
이명박 정권의 사찰
김근태는 자신까지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려 회복한 민주주의가 이명박 정권에서 5·6공 시대로 역류하는 것을 한동안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의를 날카롭게 투시하던 그의 시선은 민주주의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활동으로 나타났다. 분주하게 거리를 누비면서 리영희 선생이 말한 ‘1인분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2008년의 촛불집회에 시민들과 함께 참여하고, 2009년 ‘용산참사’ 현장에도 빠지지 않았다. 용산에서는 여러 날째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에 콧물이 흐르면 수시로 손수건으로 닦아내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슬퍼해주십시오. 그래야 서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그의 목이 메는 듯하자 어떤 중년 여성이 따뜻한 음료수 한 병을 건네주었는데, 그는 그 음료수를 옆에 있던 청년에게 양보했다. 필자가 직접 목격한 장면이다.
2011년 그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해결을 위한 3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이들을 성원했다. 그리고 위기에 몰린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강행하자 이를 반대하는1 인 시위를 벌였다. 2008년에는 2학기부터 한양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한국정치론을 강의했고, 2011년에는 전주 소재 우석대학에서 석좌교수로 임용되어 강의를 맡기도 했다. 강의실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고, 그의 강의는 대학가에서 단연 화제가 되었다. 이명박 정권이 취임 초기부터 난폭성을 드러내자 그는 ‘민간독재’라고 줄기차게 비판했다. 2009년 봄 이명박 정권의 사병화된 검찰의 날선 수사가 노무현의 심장을 겨냥하자 “검찰은 정치수사를 중단하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많은 현역 정치인들이 침묵할 때였다.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폭격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위기로 치닫고 신공안 정국이 조성되었을 때, 김근태는 MB정권과 수구 세력의 광신적 반공주의와 맹목적 냉전의식, 민족분단의 영구화정책을 맹렬히 비판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는 제3기 민주정부의 수립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야권 통합에 힘을 보탰다. 민주통합당의 ‘통합’에는 그의 숨은 노력이 컸다. 민주통합당은 그를 상임고문으로 추대했다.
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사찰 대상에는 김근태도 포함되었다. 비록 총선에서 낙선한 원외 인사였지만, 그의 비중과 끊임없는 민주화 활동을 MB정권은 낱낱이 추적했다. 민간인 김종익 씨를 불법사찰한 국무총리 지원관실 원충연 전 조사관의 수첩에 김근태를 비롯하여 이용득 전 한국노총 위원장,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의 동향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국무총리실이 이 정도였으니 전문 정보기관은 오죽했을까. 그는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을 주도할 때 일상적이 되다시피 한 수배와 사찰에 이골이 난 까닭에, 그리고 사생활이 깨끗하고 사회활동이 공개적이어서 불법사찰에도 빌미가 잡힐 일이 없었다.
김근태는 공부하는 정치인이었다. 2009년 8월부터 신자유주의 극복과 대안 모색을 위해 공부모임을 만들어 입원 직전까지 22차례의 세미나를 열었다. 김근태는 2011년 10월 18일 자신의 블로그에 한 편의 글을 올렸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제목으로 사실상 유언이 되다시피 한 대국민메시지였다.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의 의지와 소망이 담긴, 짧지만 울림이 긴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는 걸개그림으로 만들어져 그의 영결식장과 안장식장에 내걸렸다.
김근태는 2012년의 대선에 큰 비중을 두었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메시지보다 3개월여 앞서 《프레시안》과 가진 인터뷰(앞 장에서 일부소개)에서 대선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내년에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총선과 대선을 통해서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한 번의 정권교체, 다시 말해 세 번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절박한 민생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출 대기업에만 이롭고 국민들이 피부적으로 느끼는 물가는 폭등하는 고환율 제도나 부동산 버블의 원인이 되는 인위적 저금리 등의 정책을 고쳐 나가야 한다. 정권교체를 통해서 철학과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이루기 힘들고, 민생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보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경제의 구성 주체 중에 재벌과 부자들을 우선 고려하고 있다. 진정으로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면 경제정책운용의 철학적 기저를 거시지표 중심의 ‘국가경쟁력’보다는 국가 구성원 하나하나가 경쟁력을 갖추는 ‘국민경쟁력’에 기초하는 경제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처한 현실을 보더라도 냉전 이후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냉전이 지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여기에친미 세력과 친중 세력이 동아시아에서 갈등을 하고 있다. 한국은 상당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한국은 그간 정치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확대 심화,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최근에 경제관계에서 중국과의 교역이 획기적으로 늘고 인적교류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물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만 바라고 이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총선과 대선은 큰 변화, 즉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과 관계를 고민하고 추진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정권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치 비전의 정책연합을 기초로 통합과 연대의 과정을 이루는 원탁테이블의 구성을 통해 한나라당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빈한 삶, 시민 곁으로
총선에서 낙선한 김근태는 보좌진을 내보내고 자동차도 팔았다. 수입이 없어서 비서에게 줄 월급도, 승용차 기름 값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품성대로 서민의 생활로 돌아갔다. 여느 정치인들처럼 입으로는 ‘서민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귀족 생활을 하는 것과는 격이 달랐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회의나 집회에 참석했다가 귀가할 때면 버스나 전철을 타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주위에서 지인들이 중고차라도 한 대 사주고자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반대했다. “자가용에선 혼자서 나라를 생각했지만 이젠 내 옆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부딪힐 수 있어 좋다”고 말하곤 했다.
김근태는 사망할 때까지 도봉구 창1동에서 살았다. 2004년에 처음으로 매입한 집이었다. 1970년대에는 부천시 신곡동과 신내동에서 살다가 1980년 5월 인천남구 구월동, 1983년 5월 부천시 역곡동으로 이사했다. 서울시민이 된 것은 1986년 3월 강북구 수유2동으로 전입하면서였다.
이어서 수유2동과 수유3동, 노원구 하계동 등에서 전세를 전전하다, 2004년 창동에 처음으로 빌라를 구입하면서 전세를 면했다. 김근태는 이 집에서 7년여를 살다가 운명했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했지만, 김근태는 3선 의원과 장관, 집권당 대표를 지낸 정계의 중진인데도 그의 집은 평범한 서민생활 그대로였다. 부부가 함께 물욕이나 사치, 호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젊은 시절부터 노동자, 서민과 더불어 살겠노라 다짐해온 의지의 소산이었다.
정치권에서 신분과 위상이 아무리 변해도 도덕적 결백성을 지키겠다는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모진 박해와 정치적 격랑에도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 결백성’ 때문이었다. 그는 지식인의 엄격성과 정직성을 신조로 속물들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때 묻지 않은 영혼”을 지켜냈다.
김근태는 매년 9월경이 되면 몸살과 열병을 앓았다. 1985년 9월에 고문을 당한 뒤부터다. 멀쩡하다가도 9월이 되면 거짓말같이 열병이 도져 열흘쯤 앓곤 했다. 이때가 되면 각별히 조심하고, 정치활동 일정도 느슨하게 잡았다. 병마가 서서히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2006년에는 파키슨병 증후군이 나타났다. 약을 계속 먹어서인지 병세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다.
병세가 악화된 것은 2011년 가을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MRI를 찍었더니 뇌정맥혈전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뇌졸중과 비슷한 것으로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가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병이라 했다. 혈압도 높지 않아 의심조차 안 했던 병이다.
뇌정맥혈전증은 신경계 교란으로 생기는 것인데, 보통 전기고문을 받으면 신경계 교란이 생긴다. 외국 의학잡지에도 논문이 실렸다고 한다. 10월 중순까지도 언론 인터뷰를 하는 등 그렇게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손수건을 들고 다닐 정도로 만성비염을 앓고 있었다.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할 때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너무 마셔서 만성비염이 생긴 것이다.
김근태는 12월 초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딸의 결혼식을 서둘렀다. 남달리 사랑했던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지만, 병세의 악화로 끝내 딸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10년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한 이명박 정권은 거칠 것이 없었다. 검찰·족벌언론과 삼각편대를 이루면서 퇴임 뒤 향리로 내려간 전임 대통령 노무현(과 일가)에 대한 융탄폭격으로, 끝내 그를 투신자살의 길로 내몰았다.
이어서 노무현 국민장의 뙤약볕 아래 3시간을 버티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얼마 뒤에 서거했다.
여기에 두 전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민주 세력의 정족(鼎足)을 이루었던 김근태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진보민주진영은 3년여 사이에 민주화의 3대 축을 잃게 되었다.
“우리는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김근태는 12월 27일부터 여러 장기의 기능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다가 30일 새벽 5시 31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장례 절차는 그의 동지와 후배들의 뜻에 따라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발인제는 2012년 1월 3일 오전 7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미사와 영결식은 같은 날 오전 8시 30분부터 명동성당 본당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사망 소식은 많은 국민에게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연말 연초의 혹한에도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와 애도했다. 그러나 국가 폭력의 하수인 이근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추모객 1천여 명이 참석한 영결식에서 강론을 맡은 함세웅 신부는 “착한 사람들이 악인의 피로 발을 씻고 그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과연 착한 사람이 상을 받는구나. 하느님이 계셔, 세상을 다스리시는구나’ 하게 하소서”(「시편」 58장 10~11절)라고 기구했다.
운구 행렬은 청계천 전태일 다리와 민주통합당 도봉갑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노제를 지내고, 오후 1시 30분 고인의 생전의 뜻에 따라 민주화의 동지 전태일, 문익환 등 130여 명의 민족민주열사가 묻힌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전의 친구 조영래의 옆 자리였다.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자이크와 “2012년 투표하라. 참여하는 사람이 권력을 만들고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라고 적힌 걸개그림이 세찬 바람에도 찢기지 않고 버티었다. 고인의 꿋꿋한 의지를 닮은 듯했다. 추모문화제와 영결식에 참석한 시민들은 “우리 모두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고 입을 모았다.
《경향신문》은 사설 「민주화운동의 큰 별 김근태를 보내며」(12월 31일)에서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진정성의 정치를 실천한 몇 안 되는 존재였다”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이 되고자 늘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추모했다.
《한겨레》는 사설 「‘인권’, 영면한 김근태의 영원한 희망」(1월 4일)에서 “그의 영면으로 빈자리가 한없이 크지만, 오히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유지가 눈 속의 댓잎처럼 더욱 시퍼렇게 살아나”는 까닭을 전하고, “전기고문 속에서도 그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 곧 민주주의와 인권의 희망이었다. 이제 누구인가, 그가 남긴 그 희망을 품고 전진할 이들은”이라고 생자들의 의무를 일깨웠다.
영국의 권위지 《더 타임스》는 2012년 1월 3일자에 5단 크기의 부고기사를 실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신문이 한국 정치인 부고를 한 면의 3분의 1 이상을 할애해 취급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기사에서 그의 민주화 투쟁을 상세히 기술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도 12월 30일자 인터넷판에 부고 기사를 싣고, “그의 얼굴에 늘 보이는 미소는 그가 독재정권에서 당했던 고문 흔적을 가렸다”고 썼다. 19대 총선에서 도봉구민들은 고인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헌신해온 그의 ‘바깥사람’ 인재근을 국회의원으로 뽑았다.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사후에 진행되었다. 고문생존자 단체 ‘진실의 힘’은 “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을 고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 2012년 6월 27일 부인 인재근 의원이 남편을 대신해 받았다. 인재근은 수상소감에서 “김근태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였을 것”이라며 “고문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며 고문 피해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도 설립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법부와 기득권 세력의 비상식을 겨눈 영화 〈부러진 화살〉을 찍은 정지영 감독은 고인의 고문 실상을 주제로 〈남영동 1985〉를 제작하고, 고인이 생전에 석좌교수로 활동했던 우석대학에서는 2012년 9월 7일 ‘김근태 민주주의 연구소’(소장 최상명 행정학 교수)를 개설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종합대학에서 정치인 개인의 연구소를 개설한 것은 이례적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한 생애
김근태가 꿈꾼 사회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였다”(인재근). 그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에 생애를 바쳤다. 그는 불의에는 강하되 약자에게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투사’의 이미지 때문에 흔히 극단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는 혁명보다 개혁, 투쟁보다 참여를 선택한 민주주의자였다(한승동).
김근태는 말했다. “나는 정직과 진실에 이르는 길을 국민과 함께 가고 싶다. 정직하고 성실한 99퍼센트의 사람들이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정치가 다만 현실일 뿐이라면 개선과 개혁은 어떻게 가능하며, 왜 우리가 피 흘리며 군사독재와 싸워야 했는가.” 그는 이명박의 반동적 ‘민간독재’에 분노를 터뜨리며 ‘2012년의 결단’을 촉구했다.
2010년 가을부터 그의 말투는 어눌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진 데다, 두 어깨가 굽어져갔다. 고문의 깊은 트라우마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의 훈장’이라고 덕담을 건넸으나 결코 그는 ‘훈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모든 고결한 혼들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알베르 카뮈) 그대로였다.
그가 생애를 두고 추구한 목표가 민주주의였다면, 병마로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다. 민주주의적 ‘목표’는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겨레》 성한용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담론과 슬로건’을 묻자 “경제의 인간화라고 할까,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정책을 도입하자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근태를 비롯해 수많은 선각자들, 무릇 권력을 탐하는 쿠데타 패거리가 아닌,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혁명가와 민주인사들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만이 ‘인간의 존엄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근태가 군부독재 시절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 것이나, 정치판에 진출했던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탁류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냈다. ‘인간의 존엄’ 이라는 불변의 가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애착은 종교적인 엄숙주의에 가까웠다. 그가 운명했을 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주주의자 김근태’라고 불렀다. 그에게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자’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덧붙이거니와 김근태가 추구한 본원적인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고, 민주주의는 이를 위한 수단이고 외피였다. 그의 말과 글과 행위를 분석하면, 인간을 경외하고 인권을 존중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는 따뜻한 속살이 드러난다.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소록도를 방문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껴안은 것이나, 서울역 노숙자들을 찾고 노숙을 체험한 일 등은, 입이나 구호로만 떠드는 사람들의 ‘소외계층 사랑’과는 격이 다른 행동이었다. 지난날의 힘겨웠던 삶이 내면을 깨끗하게 하고, 심성에 꽉 찬 휴머니즘이 ‘인간의 존엄’으로 배양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류의 발전이나 문명의 진보는 ‘인간의 존엄’을 향한 긴 여정이었다. 모든 철학과 사상,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확산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이제 마무리하자. 김근태의 이름에는 동시대의 인물들과는 크게 다른 실존적 울림이 담긴다. 젊은 시절 그는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한다”며 독재와 싸우다 모진 놈들을 만나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그리고 속물들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정권교체와 정치개혁에 온몸을 던졌다. 많은 일을 이루었으나,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걸어간 길과 그 길에서 그가 행한 역할은 삿된 정상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다.
그의 생애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민중의 아픔, 민주주의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로 겪으면서, 반동적 권력 그리고 시대의식이 없는 도구적 지식인·정치인들과 벌인 힘겨운 싸움이었다. 두려움 없는 저항정신과 사심 없는 비판으로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심했으나, 따뜻한 심성과 깨끗한 도덕성으로 이를 극복했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유언과 함께 그는 파란 많은 생을 접었다.
64세, 아직 할 일이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범인들이 6백 년을 산다 해도 하기 어려운 일을 다 하고 갔다. 새는 떠나도 울음소리는 남듯이, 그는 실존적 긴 울림을 국민들 가슴에 남긴 채 홀연히 떠났다. 어느 죽음인들 애절함이 없으련만, 김근태 선생의 때 이른 죽음에는 애절함과 더불어 통절함이 묻어났다. 많은 국민이 애통해했다.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 벵갈 출신의 작가 타고르의 시, 「혼자서 걸어가라」를 김근태 선생의 영전에 헌사한다.
혼자서 걸어가라
당신이 불러도 그들이 대답하지 않거든 혼자서 걸어가라.
그들이 면벽한 채 움츠리고 떨고 있다면
오, 고독한 이여,
마음을 열고 혼자 외쳐보라.
황야를 건널 때 그들이 당신을 버리고 떠난다면,
오, 고독한 이여,
가시밭길을 내딛고,
붉은 피를 흩뿌리며, 혼자서 걸어가라.
폭풍이 몰아치는 밤 그들이 빛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오, 고독한 이여,
고통의 번갯불로, 당신 가슴에 불을 붙여라.
그리고 홀로 타게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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