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인간은 구제불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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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것이 시간낭비가 될 것 같으면 차라리 각자 취향에 따라 추리소설이나 재미있는 고전을 찾아 읽기 바란다. 이 책도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 같은 면이 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지난 25년간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렀으며 소득불균형이 이토록 심해졌는지를 추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잘못을 바로잡을 정치적 역량과 의지가 부족하다면, 굳이 이 책을 읽으며 자책하고 괴로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악행과 어리석은 짓거리를 일삼다 파멸하는 그날까지 괜찮다고 착각하면서 희망과 자존심을 붙들고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 국가들이 끔찍한 대학살과 파괴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 본성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국편에서 적나라하게 풍자된 영국 역사만 봐도 인간이 고질적으로 야비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스위프트는 왕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 말이 지배하는 유토피아를 묘사했다. 거기서 인간은 사회의 해충 이며짐승만도 못한 ‘야후’라 불린다. 그러나 스위프트가 인류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올리버 골드스미스도 <황폐한 마을>에서 “오랫동안 상업이 지배한 곳에서는 명예가 사라진다”고 했으나 그 역시 인류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19세기가 되자 칼 마르크스는 은폐된 의회 문서에서 공장 조사관의 보고를 발췌하여 자본주의의 잔혹함을 세상에 알렸다. 이로써 인간 본성에 관한 비관주의와 염세주의가 가장 어두운 심연에 도달했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무자비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사람들은 사회복지수당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다면 신체상해, 대량학살, 노예제, 마약거래, 주류판매 등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비관주의는 마르크스 이전에도 있었다. 전도서는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 <리어왕>, <아테네의 타이먼>, <코리올라누스> 등이 비관주의로 가득했고, 스위프트와 골드스미스 작품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처럼 공식 자료를 바탕으로 현실 문제를 다루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요구를 만들어 냈으며, 근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1941년에는 열정적인 보수주의자와 성직자들조차 “새로운 세계”를 선전문구로 내세웠을 정도다.
그들 모두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즉 ‘인간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인간성은 더없이 기만적이고 사악하다. 게다가 성경의 절망적인 인간관은 역사를 통해 입증되고 있는 것 같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처럼 인상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고대 문명들은 하나같이 멸망했다. 멸망하지 않으려면 변화해야 했지만 결코 바뀌지 않는 인간성은 변화를 거부했다. 따라서 염세주의자들은 말도 안 되는 전쟁을 벌이고 살육에 몰두하는 우리 ‘야후’ 세대가 새로운 세계를 이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확신했다. 짐승보다 못한 야후들은 무의미한 전쟁을 벌이고 광적으로 살상에 매달리느라 “새로운 세계”를 이룰 작은 기회마저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이 그렇게 구제불능이라면 이 책을 쓰고 읽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모든 염세주의와 비관주의는 인류의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결론을 내린 데서 생겨난 망상으로 봐야 한다. 자본주의의 잔혹함이 전적으로 인간의 사악한 본성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자본주의 해악은 오히려 국민윤리, 애국심, 자선활동, 기업, 진보와 같은 온갖 사회적 가치가 야기한 부작용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도덕한 구두쇠와 욕심꾸러기를 편드는 여론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지상 지옥이 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지옥이라고나 할까? 자본주의는 인간의 악행으로 가득한 난장(亂場)이 아니라 모두를 현혹하고 착각하게 만드는 유토피아다. 튀르고와 애덤 스미스로부터 코브던과 존 브라이트에 이르기까지 존경할만하고 공공심이 투철한 사람들조차 자본주의에 현혹되었다. 자본주의 지지자들은 악한 의도로 선을 행하는 메피스토펠레스라기보다는 가장 선한 의도로 악을 행하는 몽상가이자 환상주의자들이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해 바로 알고 현실을 바탕으로 추론해야 한다. 우리가 현실 문제를 다루는 정치과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진실과 교훈을 배운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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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이상적인 이야기이다.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수집한 정보는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또한 정확한 정보일지라도 시의적절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예컨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에게는 매우 중요했을 정보가 20세기 수상에게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은 변화하는데 교육이 그러한 변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수상은 구시대의 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의 수상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상업이 성행했던 1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당시 귀족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살육을 서슴지 않았다. 헨리7세는 리처드3세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 시절의 학교들은 상업과 중산층에 우호적이고 반봉건적이거나 전복적인 가치를 지향했을 것이다. 거기서 교육받은 장관들은 자유당의 지도자가 되어 보수 진영의 수장에게 도전하고, 중세 농노제와 보수주의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진보를 대변하는 전통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을 거치며 상황이 많이 변했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사업을 시작하는데 드는 비용이 수백 파운드면 충분했지만,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그 비용이 백만 파운드 이상으로 늘어났다. 산업혁명 초기만 해도 고용주였던 사람들이 자본가에게 예속되어 월급을 받는 피고용인의 처지가 되었다. 중산층이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했다. 그래서 그들의 후손은 자유주의를 사악하고 파괴적인 것이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이제 러스킨 대학* 등에서 교육받은 노동당 지도자들은 상대가 봉건적인 보수당원이든 상업을 옹호하는 자유당원이든 상관없이 모두의 귀에 대고 마르크스주의를 외치고 있다.
* 노동자 계급에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1899년에 설립된 대학.
문제는 인간의 습관과 생각이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11세기 영국은 노르만 왕국에 의해 봉건화되었다. 왕이 모든 토지를 소유하고, 영주는 왕이 하사한 토지를 열심히 수호했다. 이 제도는 19세기에 이르러 3계급제도로 진화했다(또는 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유산상속자와 토지매입자가 토지를 소유하고, 토지를 경작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몫이 되었다. 노동시장에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이과잉공급되면서 프롤레타리아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형편없는 임금을 받게 되었다. 중산층은 자신들의 경영 능력을 지주에게 제공하고 상당한 대가를 챙겼다. 소유자, 경작자, 경영자 3계급이 정치적으로는 “자유롭지만” 경제적으로는 서로 완벽하게 예속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영국에는 14-15세기의 봉건주의와 교회의 신조를 계속해서 가르치는 학교들이 있다. 주요 성직자들이나 봉건군주들이 세운 사립학교들은 물론이고 후에 그것을 본떠 상인계층이 설립한 수많은 학교들까지도 여전히 봉건적 가치와 교회의 신앙을 답습한다. 심지어 라틴어는 이미 1500년 전에 사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문학, 종교, 외교, 법학에는 반드시 라틴어를 써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우기는 학교도 있다.
그러한 인습이 여전히 우리 교육제도를 지배하고 있다. 예전에 나는 윈체스터 귀족의 면전에 대고 교육제도를 비판한 적이 있다. 그 귀족은 거만하게 뻐기면서 자기 학교가 근대적이라는 증거를 댔지만, 그가 소개한 수학선생은 이천년 전 아르키메데스만큼도 모르고 있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대학은 커리큘럼에 정치경제학을 도입해야 했다. 대학은 이를 수용했고 심지어 환영하기까지 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경영 좋게 말해 개인주의적인 경영을 통해 최저임금만을 지급해도 지속적으로 고용이 창출된다는 것을 정치경제학이 입증했기 때문이다. 자본을 축적하고 문화를 주도하는 부유한 상류층이 그와 같은 경제학적 사고의 주축이었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적 사고는 2세기 전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이 처음 고안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 마르크스가 밝혔듯이, 이기적인 경영이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것은 가난에 대한 공포다. 결국 인도주의적인 정치인들은 공장법을 주장하게 되었고, 노동조합은 급속도로 성장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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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시대에 맞지 않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굉장히 많으며, 현실에 백년 정도 뒤쳐지는 경우도 있고 이천 년 이상 차이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 괴이하게도 ‘사립명문출신들의 학연’이 형성됐고, 이들이 근대 국가의 정부를 장악하면서 노아와 사무엘, 정복왕 윌리엄과 헨리7세, 크롬웰과 톰 페인, 애덤 스미스와 로버트 오웬, 예수와 찰스 다윈의 세계관이 서로 뒤엉키는 꼴이 되었다. 사립명문출신들이 갑자기 등장한 외국 독재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들은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어떤 면에서 보면 끔찍할 정도다. 벼락부자처럼 갑자기 등장한 외국의 독재자들은 개인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가난과 박해를 고통스럽게 경험한 덕분에 세상의 가장 비참한 현실을 잘 알고 있고, 그런 시각에서 마르크스를 읽었던 자들이다. 사립명문출신들에게이 독재자들은 무지하고 교육받지 못한 무뢰한이이다. 하지만 독재자들에게는 사립명문출신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고 올가미를 씌우고 계속 사기를 쳐서 먹고사는 탐욕스러운 착취자들이다.
그런데 양쪽 모두 자신들이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믿는다.
정당들은 서로 대립할 때보다 합의를 선언할 때가 더 위험할 수 있다. H.G. 웰스가 입안한 새로운 권리장전을 총회에 회부했을 때, 나는 그 안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건 그럴 만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총회에 참석한 다른 모든 정당들, 심지어 나의 정치 성향을 전복적이고 사악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의견에도 똑같이 동조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화합은 천년 만년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은 화합의 본질을 간파했다. 참전하는 이유를 보다 분명하게 밝히라고 요구하는 전쟁 회의론자들에게 처칠은 이렇게 답했다. “위선적이고 상투적인 말은 집어치우고 사태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일일이 설명하려 든다면, 바로 열띤 논란에 휘말려 아무일도 할 수 없을 거요.”
처칠은 촌철살인의 그 한 마디로 모든 잡음을 잠재웠다. 여전히 모든 것이 모호했지만 우리는 일치단결한 것처럼 보였다. 생존을 위해 좋든 싫든 싸워야 하는 전시에는 그러한 만장일치가 유용하다. 하지만 전쟁 이후 국가를 재건하고 정비해야 하는 시기가 되어도 만장일치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뭔가 착각하는 것이다. 숫자는 수를 알려줄 뿐 무엇의 수치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입법부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면 만장일치는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하다.
미덕이나 악덕이나 모두 피상적으로 다루다 보면, 공자와 모세, 예수, 마호메트, 교황, 세속주의자 모두가 만장일치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 어떤 행동의 시비를 가리고 적법성을 논해야 하는 순간 모든 합의는 깨지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돌입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결혼의 신성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호주 원주민 출신 다혼주의자, 네 명의 아내를 허용하는 이슬람교도, 이혼을 자주하는 헐리우드의 배우들, 절대불변의 단혼제에 매여 있는 아일랜드 부부들이 있다. 결혼제도는 이렇게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를 억압하지 않으려면 다양성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조차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 객차에 흡연자와 비흡연자가 함께 있으면 그들이 똑같이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습법체제가 가능해지려면 충분한 합의를 도출해야 하며, 충분한 합의를 위해서는 심리적인 동질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동질성의 내용 또한 과학적이어야 한다. 웰스 말대로, 관습법은 공통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한 관습법을 법제화하려면 공통의 지식에서 이끌어낸 공통의 결론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핏케언 섬 사람들은 영국 본토 사람들과 알고 있는 것들이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은 고등 문명에 연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까운 미래에 예수가 재림하여 지상천국을 세울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우두접종이 무지한 망상에서 비롯되었고 그러한 예방접종을 강제하는 것은 폭압행위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예방접종에 대해 나만큼 알 기회가 많았던 작가들마저 예방접종이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으면 천연두로 국가가 완전히 멸망할 거라는 의견에 설득당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은 이상적인 헌법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기관 경제학자들은 더 많은 공장과 발전소 그리고 철로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고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민중을 억압하고 있다.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일하고 40세에 은퇴해서 60세에 죽기를 바라는 과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 네시간씩 일하면서 60세에 은퇴하고 90세에 죽기를 바라는 느긋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가 불안정해져도 전혀 개의치 않고 발전만을 추구하는 정부 앞에서 그 둘의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합의에 도달하는 데 있어 또 다른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것을 하는 방법까지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디킨스는 지배 계층이 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데 도사라고 했다. 하지만 지배 계층은 스스로도 자신들의 처지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반면 진심을 다해 열정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통치자들은 정작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마호메트는 좋은 의도로 음력을 만들었다. 낡은 이론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가능한 천체물리학적 사실에 입각해 달력을 만든 방식은 어느 정도 괜찮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새로 만든 음력 때문에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상인들은 낭패를 당했다.
예를 들기 위해 17세기로 돌아갈 것까지도 없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10년 동안 공산주의 정부는 첨단 사회이론과 지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법과 행정에서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러시아가 공산주의체제를 유지하고 국민들이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다. 볼셰비키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만 얻는 방법을 모르는 자들이다. 만약 영국의 사립명문출신들의 머리에서 그 동안 학교나 집에서 배운 정치적인 모든 것들을 비워버리고, 레닌주의를 주입한다 해도 영국의 지배계층 역시 레닌의 실수를 모두 반복하고, 나라를 기아와 폐허 상태로 몰고 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험을 막아주는 울타리와 바른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최대한 많이 세우는 수밖에 없다.
우선 토지 문제부터 출발하자. 토지 문제는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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