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아직 몰라도 돼
강·제·철·거·예·정·지·역
이제 막 한글 배운 동생이
문 위에 붙은 글자
또박또박 읽는다
틀리지 않고 읽어서
동생은 기분이 좋은가 보다
동생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동생이 내 손을 잡더니 물었다
근데 저게 무슨 뜻이야?
강제 철거가 강제 철거할 수 없는 것
어릴 때 살던 곳은 재개발이 막 시작되던 곳이었습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하나 둘씩 늘어 가며 위협적으로 동네를 휘감아 왔습니다. 엄마, 아빠들은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당장 집을 구해서 나가려면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벌이가 되는 곳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아이들은 해맑았습니다. 내일 당장 쫓겨 나가야 해도 오늘은 동네를 뛰어다니며 흙먼지를 일으켰습니다. 부모들은 아이의 그 웃는 모습을 지켜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강제 철거의 역사는 오래됐습니다. 1960년대 정부의 도시미화 정책으로 살고 있던 판잣집을 철거당한 빈민들은 살 집을 찾아 미아동, 상계동, 구로동 등으로 떠밀려 옮겨 다니다 결국 1968년 청소차에 실려 광주로 강제이주당해야 했습니다. 상하수도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그곳에서 짐승처럼 살던 입주민들에게 정부가 한 일은 일시불로 땅값을 상환하라는 고지서를 보내는 거였습니다. 입주민들에게 약속한 건 하나도 지키지 않고서 말입니다. 결국 1971년도에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때 100여 명이 부상당하고 22명이 구속되었습니다. 1988년에는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재개발 사업이란 명목으로 상계동 주민들이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후 3년 동안 싸워야 했습니다. 2000년대에도 이 야만의 폭력은 되풀이되었습니다. 2008년 12월까지 ‘동남권 유통단지’를 만들어야 했던 SH공사는 11가구만 남은 장지마을을 2006년 8월 강제 철거했습니다. 철거 용역들은 포클레인을 앞세워 마을을 포위하고 노인 한 명을 끌어내는 데도 장정 서너 명이 달라붙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매일 씻고 닦던 집 안의 정든 살림들도 모두 근처 공터에 처박아 버렸습니다. 이 밖에도 돈암동, 사당동, 봉천동, 이문동, 용산, 판교 등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강제 철거는 계속 일어났습니다. 누구도 그들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 주진 않았습니다.
바느질의 여왕
무릎 사이에
가죽 조각을 끼고
하나하나 이어 붙이다 보면
어둠이 달려와
하늘은 검은 망토를 둘러요
깜깜한 밤이 되면
해님을 꿰매서 하늘에 붙이고 싶어요
더듬더듬 바늘구멍 찾다 보면
너덜너덜 캄캄한 웃음이 떨어질 거 같거든요
실을 당겨서 휘어진 손가락에
지문은 없어요
잃어버렸다고 울진 않아요
내 지문은 상표보다 선명하게
축구공에 찍혀 있으니까요
오늘도 바늘은
서른두 개의 오각형과 육각형 조각을 꿰매서
축구공을 만들어요
매일매일 천육백이십 번의 바느질은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이어 붙여요
내가 만든 축구공이
골대를 통과해
축구장 가득
사람들의 함성을 터뜨릴 때
어느덧 나는 바느질의 여왕
사람들 마음을 한 조각도 놓치지 않고
하나로 이어 붙여요
32조각 눈물
공원을 가면 풀밭 위에서 축구공을 차며 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가족과 나들이 온 아이가 아빠와 함께 신나게 달리며 공을 차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른 아침 학교 운동장을 가도 축구를 하러 나온 아저씨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등이 젖도록 공을 차는 아저씨들에게 어두운 모습은 찾기 힘듭니다. 축구공은 선수들이 뛰는 경기장에서만 볼 수 있는 먼 곳의 물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곁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소박하고 친근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행복한 나들이에 단단히 한몫하고, 동네 아저씨들의 친목을 다지게 하는 이 축구공이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일일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에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유명 메이커의 많은 축구공들은 소박한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불합리한 노동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한 개의 축구공을 만들기 위해선 1,620번의 바느질이 필요합니다. 축구공의 대부분은 파키스탄의 시알코트에서 만들어지는데 공을 만드는 사람의 대다수가 소녀들입니다. 빠르면 5살 이전부터 일을 시작하는 소녀들은 바느질로 인해 손가락이 휘고 외피 조각을 붙일때 쓰는 화약약품으로 눈이 멀기도 하지만 한 끼라도 해결하기 위해 이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루 12시간 일해서 받는 돈은 300원 정도입니다. 공원 자판기 코코아 한 잔 값도 안 되는 300원 말입니다. 하루하루 그 돈을 벌기 위해서 파키스탄의 어떤 소녀는 눈이 멀고 어떤 소녀는 손가락뼈가 휩니다.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골대를 통과해 함성을 끌어내는 축구공 하나에 담긴 것이 진짜 무엇인지요. 그것은 푸른 들판에서 자신들이 만든 축구공 한번 차 보지 못한 채 어두운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 붙이는 소녀들의 사라져 버린 희망일지도 모릅니다. 이 희망을 다시 소녀들에게 돌려줄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요?
나는 카펫
다섯 살 때 이곳으로 왔지
그때 나의 꿈은 먼 곳으로 팔려 갔어
하루 열 시간을 넘게 일하면 일 루피를 받지
먼지만이 친구인 이곳에서
일을 해서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 했지
가끔 먼 곳으로 팔려 간 내 꿈들이 생각났어
그때마다 하늘을 나는 카펫을 타고
사막을 넘어 바다의 끝까지 내 꿈들을 찾아가고 싶었지
나는 결심했지
카펫이 되기로!
발끝부터 올올이 몸을 풀어 마음을 담아 카펫을 짜기 시작했지
드디어 나는, 나는 한 장의 카펫이 되었지
주인 아저씨는 나를 들어 비행기에 실었지
좁고 추운 화물칸
팔려 간 내 꿈들을 만나기 위한 여행
나는 카펫
만날 수 없는 꿈
파키스탄의 이크발이란 소년은 네 살 때 600루피(약 만 오천 원)의 빚을 갚기 위해 아빠에 의해 카펫 공장의 노예로 팔려가 좁고 캄캄한 작업장에서 열 살 때까지 하루에 14시간씩 주 6일을 카펫을 짜야 했습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 할지라도 카펫의 품질을 위해 창문을 열지 못하는 가혹한 작업환경과 더불어 노동 중에는 어떤 잡담도 금지당했습니다. 급여는 거의 없었으며 실수라도 한다면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크발이 열 살 되던 해 갚아야 할 돈은 만 팔천 루피(약 43만 원)가 되었습니다. 이크발은 공장을 탈출했고 그 후 나라를 돌며 어린이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아동노동력 착취에 대해 항의했지만 12살 되던 해에 누가 쏜지 알 수 없는 총에 맞아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파키스탄에만 카펫을 짜는 어린이 노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옆 나라인 인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팔려 온 어린아이들은 먼지투성이 작업장 맨바닥에 앉아 마치 기계처럼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합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카펫은 주인이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지 데려다 줍니다. 험한 산이 나타나도 한 번에 넘고, 넓은 사막이 나타나도 쉼 없이 건너가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런 카펫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그것을 타고 어디로든 착취가 없는 곳으로 날아서 가라고 말입니다. 하늘을 나는 카펫은 어떤 장애가 나타나도 굴하지 않고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요. 먼지만 가득한 좁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이라고 꿈까지 갇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생생하고 푸른 소망들이 끝없이 자라고 있을 겁니다. 아이들의 그 마음이 꼭 달고 여문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아이가 아이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힘들이지 않아도 당연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다 자라기 전에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