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난 25년 동안 우리 사회가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현재의 국가운영 시스템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앞으로 25년을 내다봤을 때 현재의 국가운영 시스템이 부족한 점이 많다. 과거 25년 동안 경험한 것에서 필요한 부분을 반영하고, 앞으로 25년간 변화할 것을 예측해서 새로운 국가운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면 헌법 개정이라도 해서 새로운 국가혁신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Korea가 있고, 국민으로서의 대한민국-Korean이 있는데, 국가는 좀더 발전해야 하고, 국민은 좀더 행복해야 한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 하고, 국민이 행복하려면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이것이 시대적 과제이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국가의 기반이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남북 간 대결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금의 분단 상태로는 국가가 더 발전하기 어렵다. 통일한국이 아닌 분단한국으로는 미·중의 경쟁이 치열해져 가는 국제정세 속에서 비전을 찾기 어렵다. 분단이 유지된다면 남과 북은 미·중의 하위변수가 되어 대립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통일이 국가발전의 핵심 키워드이다. 평화와 통일이 국가발전의 기본 방향이다.
국민이 더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도 살펴보자. 첫째, 국민의 정치적 자유가 더 확대되어야 한다. 지도자를 뽑는 시민의 권리는 확보했지만 선거 때만 잠시일 뿐이다. 일상적인 시민의 권리가 좀더 확보되려면 적어도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더 많이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방분권이 강화되어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자기 지역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국민의 다양한 요구가 국정에 제대로 반영되려면 다양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다당제적인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 일상적으로 지역이나 계급·계층의 요구가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정당이 국회에서 일상적으로 정치행위를 해야 한다.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통합해내는 정치행위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국민의 요구가 좀더 충분하게 정치에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국민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성장이 더 되어야 한다. 성장이 정체 국면으로 가고 있는데, 통일이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다. 북한 개발에 드는 비용을 투자의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마치 미국의 서부개척처럼 더 큰 한국을 만드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중국이 아직 더 성장할 테니 이를 활용하면 우리가 여기서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다.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을 모방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모방으로는 이제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다. 이것을 뚫고 나갈 창의력이 중요한데, 창의력이 결국 우리의 경제력을 한 번 더 성장시킬 동력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창의적인 인재를 기르기 위한 교육이 굉장히 중요하다.
또 하나, 예전에는 성장의 떡고물이 일반 국민에게도 좀 떨어졌는데 지금은 안 떨어진다. 그래서 분배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선택하고 있는 한, 개인이 경쟁을 통해 자기 기량을 최대로 발전시켜나가는 방식이 기본 골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국가가 이 경쟁의 룰을 공정하게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국가가 이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룰의 운용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정부가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공정하기만 하면 되느냐, 그렇지 않다. 아예 경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약자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나 장애인, 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층에 대한 안전망이 충분히 구축되어야 한다. 이 문제가 복지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는 공정과 복지가 함께 가야 한다.
결국 세금을 거두는 조세정책과 세금을 쓰는 재정정책을 통해서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운영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를 따르라’는 방식의 성장시대 리더십도, 단결투쟁을 외치는 민주화시대의 리더십도 이 문제를 풀기 어렵다. 이제는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합리적으로 통합해내는 ‘통합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이 통합의 리더십만이 국내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를 통합해내고 남북 간의 갈등과 대립도 통합하고 미·중의 이익균형점 역시 적절히 통합해낼 수 있다. 이를 통해 통일과 양극화 해소도 이룰 수 있다.
이런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 모두 함께 진지하게, 어느 편인가의 문제,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 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국민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우리 국민은 안정을 요구하는 국민도 많고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도 많다. 꼭 변화만이 옳은 것도 아니고 안정만이 옳은 것도 아니다. 이걸 함께 이끌어가는 게 필요하다. 정치권에서부터 경쟁할 때는 경쟁하더라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서로 대화를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간다면 우리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오래전부터 사회적 쟁점들, 서로 싸우고 풀지 못하는 문제들, 서로 상처받고 손해를 보면서도 풀지 못하는 현안들에 대해 그 해법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이야기를 엮어보고자 했다. 내 주장이 모두 옳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토론의 장을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펴낸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핵심 동력인 국민 대통합의 리더십을 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바란다.
2012년 11월
법륜
1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십
정치, 공동체의 답을 찾는 과정
현재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 갈등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사회적인 현안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으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워진 것이다. 물론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면 갈등이 없을 순 없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서로 옳다고 주장하다 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이런 갈등이 삶의 본질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이 홀로 살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은, 홀로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서로 의지하고 공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은 모두 함께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공생 관계를 인정해야만 세상만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하는 가운데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에 갈등도 불거지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에서 비롯한다. 자연의 위협을 받다 보면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자연을 정복하려 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나치다 보면 자연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맹수의 공격을 피하고 홍수를 막고 가뭄을 예방하며 농지를 개발하는 등의 일은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이 관성에 젖어서 자연에 대한 위험관리의 정도를 넘어서면 자연을 파괴하는 데까지 다다르게 된다. 이는 인간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려는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일로, 자연스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행동이 결국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오는 것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보존과 개발로 편을 나누어 싸움을 벌이곤 한다. 이때 어느 편을 들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토대 삼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자연을 보존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또한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을 개발해야만 한다. 결국 보존과 개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둘이 적절한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중 하나인 ‘중도(中道)’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데 소중한 귀띔이 될 수 있다. 중도라고 하면 양극단의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중간이지 중도가 아니다. 중도란 어중간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잘못된 극단에서 벗어나 옳은 입장에 서는 것, 그것이 바로 중도다.
중도를 철학적으로 바라보면 화쟁 사상과 맞닿는다. 화쟁이란 서로 부딪치고 있는 쟁점을 조화롭게 화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미 불거져 있는 갈등만을 보면 일견 서로 이기고 지는 문제 혹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편을 들어야 하는 문제 같아 보이지만, 서로가 공존의 토대 위에 있다는 것을 알면 갈등은 해소되고 진정한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공존만을 강조하는 관점에도 무리는 있다. 인간사에는 공존의 측면만이 아니라 경쟁의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공존만을 강조하다 보면 결국 논의가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채 이상론에 빠지게 된다. 반대로 경쟁만이 현실이라고 강조하다 보면 본질을 잃고 큰 이익을 놓치게 된다. 한쪽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탈피하여 양쪽을 다 아울러야만 유의미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복잡다단한 여러 갈등들이 얽히고 설켜 있지만, 그 갈등들을 풀 수 있는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갈등의 이유는 여럿이고 갈등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갈등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부부 싸움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바탕을 위태롭게 하는 사회적 갈등을 풀 길도 역시 찾을 수 있다. 다만 현재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란 바로 그 답을 찾는 작업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집단과 집단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을 때 오히려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면서 갈등을 제대로 조율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분쟁이 있을 때 당사자들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당사자들을 대리하는 변호사들이 서로 논쟁을 벌인 후 판사에게 판결을 받는 것처럼, 대의정치란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마치 변호사처럼 의회에서 난제에 대해 토론을 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국민들이 배심원단이 되고 정치인들은 변호인단이 되어 현안에 대해 토론을 하고 결론을 내는 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 정치는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나서서 “여러 관점이 맞부딪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문제를 조망하면서 함께 답을 모색해보자”며 갈등의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대안을 제시해야만 우리 사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발전이 단순한 성장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발전이다. 각 개인은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면서 행복을 추구하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사회적 차원에서 적절하게 조율되며, 자연을 비롯한 주변 환경과도 조화를 이루는 삶, 그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다. 현재 우리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이런 사회를 구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발전해나간다면 남북한의 통일을 비롯해 동아시아 공동체까지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 사회는 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국난도 있었고, 남북이 분열되어 동족상잔의 전쟁도 치러야 했으며, 폭압적인 독재정권하에서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하며 살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다. 앞으로의 새로운 100년은 이러한 긍정적인 역사적 성과를 토대 삼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지난 100년처럼 부정적인 것을 바탕에 두고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토대 삼아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100년의 비전은, 기본적으로 나 혹은 우리의 발전이 이웃과 이웃 나라의 발전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모범 사례를 만들어나감으로써, 전 세계가 안고 있는 난제들을 풀어가는 데 기여해야 한다. 이런 게 바로 문명을 선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직시해야 한다. 일시적으로는 효율이 떨어질지라도, 직면한 고통을 감내하며 나아가야 한다. 모든 문제들을 들춰내고 파헤쳐서 싸움을 벌이자는 게 아니다. 우리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현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드러낼 건 드러내고 덮을 건 덮고 싸울 건 싸우고 화합할 건 화합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성장과 투쟁의 리더십을 넘어서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에서는 필수 불가결하게 많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 내부에서 한정된 자원을 두고 각자의 이익을 다투다 보면 경쟁의 측면이 부각될 수 있다. 하지만 경쟁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동체가 발전하면 구성원 개개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므로 협력의 측면에서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보통의 개인들이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자신의 이익과 등치시켜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세상에 대한 시야가 좁기 때문에 협력을 통해 전체 이익을 키움으로써 개개인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럴 때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진 누군가가 공동체 구성원들을 일깨워줘야 한다. 구성원들이 이전투구하며 각자의 이익에 매몰되어 있을 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면 그 이익이 개인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깨우쳐주어서 협력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정치가 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정치인은 일반인에 비해 전체를 공공의 시선으로 폭넓게 바라보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물론 경쟁 상황에 놓인 개인이 좀더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룰을 만드는 작업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경쟁의 관점을 넘어서서, 공동체 구성원 간의 협력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렇게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한국 사회가 가난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당시의 지도자들은 여러 선진국의 사례들을 보고 배우며 카리스마 있게 경제개발을 추진해나갔다. 그들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철도와 고속도로 같은 국가 기간시설이 확충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자동차나 조선 같은 중공업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국민들로서는 국가 비전에 대한 고민을 할 역량이 부족하기도 했고 이에 대한 입장이 엇갈리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성과가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박정희나 박태준, 정주영 등이 보여준 리더십이 바로 이러한 부류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분명 ‘성장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법의 범위 밖에서 처벌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개발의 성과가 아무리 크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비민주적인 절차나 과정이 필연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필수적이었다 하더라도 최소화시켰어야 했고, 이에 대한 사과와 반성 역시 뒤따라야 한다. 산업화의 빛나는 성과는 인정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사회를 강압적으로 이끌어간 데 대해서는 반성의 작업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주린 배를 채우는 게 최우선 과제였던 산업화 세대에 비해, 경제성장의 성과를 누리면서 성장한 그다음 세대들은 산업화 시대의 폐해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논리를 거부하며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들의 문제제기에 국가권력은 폭압적으로 맞대응했다. 그렇게 투쟁과 진압이 반복되는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힘과 권위 앞에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걸고 싸움을 벌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먹고사는 것도 힘들고 잃어버릴 것도 없는 사람들이 저항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기에 그 절실함만큼이나 폭발적인 저항을 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생존이 걸려 있기에 지속적으로 싸우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에 큰 어려움이 없으면서 기득권이 없는 학생이나 종교인 등이 저항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독재 권력에 맞서 저항의 불씨를 댕기며 ‘투쟁의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권력에 비타협적이면서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리더십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줄 만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성공시킨 힘이었다.
이와 같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각각 ‘성장의 리더십’과 ‘투쟁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세력화하여 현재까지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리더십이 형성된 배경은 다르지만,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들은 모두 현재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다. 지금까지도 산업화 세력들은 과거 경제성장의 성과를 강조하면서 성장의 리더십을 그리워하고, 민주화 세력들은 자기희생에 대한 보상심리를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투쟁의 리더십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세력 외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토대 위에서 자란 오늘의 20~30대가 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가 달라졌고, 새로운 세대라 할 20~30대의 등장과 함께 사회구성원들의 요구는 더욱 더 다양하게 분출되고 있다. 20~30대들에게는 “나를 따르라”는 식의 성장의 리더십은 이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목숨 걸고 싸우자”는 식의 투쟁의 리더십도 더 이상 대중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사안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어서, 예전의 프레임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풀기가 어려워졌다. 단적으로 과거에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 많은 사회문제들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바라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들이 생겼다. 소위 말하는 ‘귀족 노조원’은 작은 기업 사장보다 살기가 더 낫고, 말이 사장이지 영세업체 사장은 일반 회사 직
원들보다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전과는 다른 안목과 지혜 그리고 리더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를 답습하고 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현존하는 한국 사회의 주요 정치적 기득권층이지만 바로 지금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끌어안지 못하고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복잡다단한 이해와 요구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산업화 및 민주화 세력뿐만 아니라 지역·성별·노동·환경·중소기업 등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어야 한다. 또한 이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되, 의회에서 그 의견을 취합하고 조율하는 새로운 정치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 즉 사회구성원들의 복잡다단한 이해와 요구를 받아안을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대통령을 중심에 두고 여야가 대립하는 현재의 정치구도를 넘어서 다당제에 대한 고민도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여 통합해내는 내각제 혹은 내각제적 요소를 수용하는 대통령제를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적대적 대립 관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정치세력들을 정치의 장에 끌어들이고 이들의 이해와 요구를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한편 우리가 동시대의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비록 적대적인 관계일지라도 서로의 토대와 바탕을 폭넓게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비단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 남한과 북한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는 갑론을박 대신 상호 이익을 위해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외교 관계에서도 역시 주변국을 배타적인 경쟁 관계가 아니라 공동 이익을 위한 협력 관계로 바라봐야 한다. 진심으로 서로를 인정할 때 갈등 때문에 생긴 상처를 보듬어 안고 치유할 수 있으며, 향후의 발전도 모색해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앞서 언급한 화쟁 사상과 그 맥이 맞닿아 있다. 여기에서 ‘화(和)’는 화합한다는 말이고 ‘쟁(諍)’은 쟁론이라는 말로, 화쟁은 결국 ‘쟁론을 화합시킨다’는 뜻이다. 쟁론이라 하면 누가 옳은가 그른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옳고 그름은 각각의 사람들이 처한 위치나 이해관계, 사상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절대선이나 절대악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내 입장에서는 옳은 게 상대 입장에서는 틀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옳음이나 그름이 없다고 보는 것을 불교철학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공은, 선도 악도 아니며 옳고 그른 것도 아닌 그 둘을 떠난 그 무엇을 말한다.
인간이란 각자 자기 위치에서만 사안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에 옳고 그름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좌우나 앞뒤 같은 개념을 살펴보면 이 사실은 명약관화해진다. 이들 개념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생긴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서울에 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 할 때, 내가 인천에 있다면 동쪽으로 가야 하지만 춘천에 있다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동서의 개념은 인천이나 춘천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현실과 결부되어 있다. 구체적인 지명이 있어야만 동서를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가 처한 현실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고정된 시야밖에 가질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자기의 입장에서 볼 때의 옳고 그름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 기준을 내려놓으면 옳고 그름은 본래 없는 것이 된다.
본래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다고 현실 속에서 옳고 그름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4대강 개발의 경우, 구체적 사안 없이 단순히 옳은가 그른가를 논하는 것은 마땅치 않지만 구체적인 지역 사회의 조건을 고려한다면 시비를 가릴 수 있다. 홍수가 빈번하거나 강이 범람할 우려가 있다면 개발이 필요할 것이다. 농업용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면 댐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물을 좀 아껴 쓰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단순히 개발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 댐을 만든다면, 이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각 사안에 대한 검토와 평가 없이 절대선과 절대악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긴 사람은 만세를 부르고 진 사람은 상처를 입으며, 이후 보복의 과정이 되풀이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쟁이 아닌 공존의 길,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화쟁적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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