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강을 건너 성장한 큰 둑의 도시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이 휘돌아가면서 수려한 경치를 이뤄내는 밀양(密陽)은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역사 깊은 고을이다. 밀양강은 주변 농토를 적시고 삼랑진 남쪽에서 낙동강을 만나 부산 앞바다로 빠진다. 1872년의 밀양 옛 지도를 보면, 북쪽에서 온 밀양강과 서쪽에서 온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세창(稅倉)·조창(漕倉)·삼랑사창(三浪社倉)이 삼랑장터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삼랑진이 낙동강을 이용해 세곡(稅穀)을 서울로 운송하는 조운(漕運)의 요지였고, 밀양강은 그와 연결된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보여준다.
밀양은 3세기 후반을 기록한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변진(弁辰) 12국 가운데 하나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신라 때 이 지역은 추화군(推火郡)으로 편성되었다가 경덕왕 때(757) 밀성군(密城郡)으로 바뀌었고, 고려 때 밀주(密州)로 승격되었다. '밀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고려 공양왕 때다. 밀양의 한자말 뜻인 '비밀스런 햇볕'은 'secret sunshine'이라는 영어 제목을 붙인 영화 〈밀양〉(이창동 감독, 2007)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도시 이름치고는 너무 멋있어서 그 어원을 찾아보았다.
밀양의 이름에 쓰인 추(推)와 밀(密)은 모두 미리미동국의 미리(彌離)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리'란 용(龍) 또는 장(長)의 의미라 한다. '비밀스럽다'는 뜻이 아니고 '크다'는 의미다. 미동(彌凍)은 제방을 뜻하는데, 밀양에 큰 둑이 있어서 생겨난 이름으로 짐작된다. 낙동강 유역 충적평야 지대에 자리한 밀양은 시작부터 하천의 범람이라는 큰 고민을 떠안았다. 그래서 하천의 범람을 막아 편안히 거주하고 농사짓기 위해 큰 둑을 만들었으리라. 이렇게 추적해보니 밀양의 본래 의미는 '비밀스런 햇볕'이 아니고 '큰 둑이 있는 지역'이었다.
187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밀양읍성의 성벽은 성종 10년(1479)에 처음 축조되었다. 아북산과 아동산의 능선을 이은 밀양성은 강까지 끼고 있어 방어의 측면에서 산성 못지않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한번은 아동산 능선 성벽에서 산길을 따라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무봉사로 내려왔는데, 그때 밀양성의 입지 조건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낙엽이 쌓인 산길 바닥은 눈썰매장같이 미끄럽고 경사는 그야말로 절벽이어서 밧줄이 없었다면 밀양강으로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절벽은 왜구들이라 해도 쉽게 기어오르지 못했으리라.
밀양 출신으로 영남학파의 우두머리로 꼽히는 점필재(償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마무리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밀양읍성은 둘레가 4,670척, 높이가 9척으로, 4개의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 당시에는 한 자가 44.75 혹은 46.73cm인 포백척(布帛尺)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환산하면 성벽 높이는 약 4m, 둘레는 2km 정도이다. 사방에 성문을 설치했고, 동·서 두 곳에 야문(夜門)을 내 시신이나 상여는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현재 성문들은 흔적도 없다. 남·북의 성문을 잇던 남북길은 작은 길로 남아 있고, 그 동쪽에 넓고 곧은 중앙로가 났다. 동·서문을 잇던 동서길 역시 작은 길로 남아 있고, 그 북쪽에 큰길이 나서 도시의 동·서를 이어준다.
관아 건물들을 대부분 생략한 1872년 지도와 달리 밀양의 다른 옛 지도들에는 추화산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온 아북산 자락에 관아 건물들이 그려져 있다. 관아 정문인 응향문(凝香門)을 지나 내삼문(3칸으로 된 안대문)에 이르고, 그 안에 수령이 정무를 보는 청사인 동헌(東軒)과 수령 가족의 살림집인 내아(內衙)를 비롯해 많은 건물들이 자리했다. 중층 누각인 응향문은 오늘날 중앙로 재래시장 입구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헌인 근민헌(近民軒)은 조선 초에 지어졌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탔고 1611~1622년에 중건되었다. 그 사이 기간에는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영남루(嶺南樓: 보물 제147호) 경내에 임시로 초가를 짓고 집무했다고 한다. 동헌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다시 피해를 입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밀양군청이 지어졌고 이후 밀양읍사무소, 내일동사무소로 차례로 바뀌었다가 2010년에 복원되었다.
동헌은 일반적으로 내아의 동쪽에 있으나 밀양에서는 특이하게도 내아의 서쪽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중앙에서 출장 온 관리가 거처하는 객사(客舍)를 대개 동헌과 나란히 배치하는데, 밀양의 객사는 동헌에서 상당히 떨어진 영남루 경내에 있었다. 이런 특이한 배치는 임진왜란 때 객사와 관아 건물들이 불타버리자 새로 건물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객사에서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수령이 매월 삭망(朔望: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배례(拜禮)를 올린다. 영남루는 밀양의 객사인 밀주관(密州館)에 부속된 누각으로, 밀양을 찾은 귀빈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장소였다. 일찍이 신라 경덕왕 때 그 자리에 영남사라는 사찰에 딸린 작은 누각이 있었고, 1365년 고려 공민왕 때 진주 촉석루(矗石樓)를 모델로 다시 크게 지은 것이 영남루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에도 복구와 화재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중건한 것이다. 영남루는 동쪽으로 능파각(凌波閣), 서쪽으로 침류각(枕流閣)을 각각 마루와 층계로 연결해 동적인 균형감을 갖춘 특색 있는 건물이다.
오늘날의 밀양 도심지도 - 성벽과 옛 건물들의 위치는 자료를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
ⓒ 한필원 |
나에게 밀양은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종착역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잠결에 지나치곤 해서 내 의식에서는 그 존재조차 희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 위에 펼쳐진 밀양 지형도와 항공사진을 보고는 도시가 참 재미있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가운데에 만두 모양의 섬을 두고 그 양쪽으로 직선 가로를 따라 도시 공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특이한 모습이 이곳을 한번 걸어보지 않겠냐고 묻는 듯했다.
결국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 부산행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밀양에 내렸다. 그러고는 도시의 세 부분을 잇는 중앙로를 걷고 또 걸었다. 가곡동, 삼문동, 내일동, 그리고 다시 내일동, 삼문동, 가곡동……. 길과 다리를 따라 시간이 흐르고 다리 아래로는 강물이 흘렀다. 내가 시간의 축을 거슬러 가곡동에서 내일동으로 갈 때, 낙동강 하구에서 올라온 은어도 수박 냄새를 향기롭게 풍기며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었으리라.
도시와 강이 만나는 두 가지 방식
을자강(乙字江)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밀양강은 뱀처럼 굽이치는 사행천(蛇行川)이다. 사행천은 장구한 시간 동안 지형을 바꾸어놓는다. 하천이 굽이굽이 흐르면서 그 바깥쪽을 쉼 없이 깎아내고 토사를 안쪽에 쌓아놓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잠깐 깔짝거리는 토목공사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자연의 사업이다. 이렇게 생겨난 퇴적 지형을 포인트바(point-bar)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국토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마을 입지의 유형이다. 삼문동은 바로 이런 강물이 만든 포인트바 지형이다. 낙동강 줄기에 면한 하회마을 역시 이런 지형에 자리했다.
밀양강의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흘러 대지를 육지·섬·반도 형상의 세 토막으로 나누어놓았다. 지금의 내일동, 삼문동, 가곡동이 각각 그것들에 해당한다. 1175년, 고려 무신난 때 개성을 탈출해 밀양의 영남루에 와서 놀았던 시인 임춘(林椿)이 살아나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지형이 바뀌어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밀양강이 강의 북쪽 면을 쉼 없이 공격하고 거기서 얻은 흙을 남쪽인 삼문동 쪽에 쌓는 바람에 지형이 상당히 변했기 때문이다. 밀양은 이렇게 지형적으로 강북이 축소되고 강남이 확대되는 운명을 타고난 도시다. 옛것을 침식해 새것을 증식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일 터. 밀양강이 그
랬던 것처럼 사람들 역시 자연의 섭리를 따라 강 건너로 도시를 확장해갔다.
밀양강에 의지해 도시를 만든 사람들은 밀양강변을 상징적인 건축의 장소로 삼았다. 가장 양기(陽氣) 어린 곳에 웅장한 남성미를 자랑하는 누각인 영남루를, 가장 음기(陰氣) 서린 곳에는 아랑사(阿娘祠)를 지었다. 아랑사는 영남루로 달구경을 나왔다가 치한의 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대숲에 버려진 밀양부사 딸, 아랑의 원혼을 달래는 사당이다. '날 좀 보소'로 시작해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치네'로 끝나는 경쾌한 가락의 밀양아리랑은 이런 도시의 역사를 말해준다.
밀양 삼문동의 항공사진 - 가운데에 밀양강이 빚어낸 만두 모양의 섬이 있고, 양쪽으로 도시 공간이 직선 가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
그런데 강을 따라 모여 살던 사람들은 점점 강물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툭하면 애써 만든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둑을 쌓고 소나무를 빼곡히 심어 방수림(防水林)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밀산교 부근에 이르면 도로변에 오래된 아름드리 낙락장송 수천 그루가 떼 지어 있다. 이곳이 '기회송림'인데, 150여 년 전 마을 주민들이 북천강의 범람을 막아 마을과 농토를 보호하려고 계를 조직해 조성한 방수림이다. 여름철 캠핑장소로 안성맞춤이라 부산, 대구, 울산, 마산, 창원 등 인근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런데 이곳을 즐겨 찾는 사람들은 이 숲이 간직한 탄생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
기회송림 이외에도 삼문동 동쪽 끝에는 삼문송림이 있다. 이런 밀양강변의 송림은 자연을 두려워한, 그러나 도시화 과정에서 자연을 길들이려 노력한 인간의 징표이다. 이런 노력이 있었음에도 1959년 사라호 태풍 때는 강물이 삼문동으로 범람해 집들이 많이 유실되었다. 그래서 나이 든 이들에게 밀양강은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다.
도시화는 밀양강처럼 두려움의 대상인 자연을 순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나운 물을 길들여 도시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로 삼았다.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고려시대의 시인 임춘은 〈유밀주서사(遊密州書事)〉에서 밀양의 '뛰어난 경치가 항저우(杭州)보다 낫다(絶景甲餘杭)'라고 읊었다. 그가 밀양의 비교 대상으로 지목한 중국 항저우의 아름다움은 그 절반 이상이 소동파(蘇東坡)가 항저우 지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제방을 쌓아 순화시킨 물, 곧 서호(西湖)라는 광활한 호수의 덕이다. 도시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그 잔잔한 호수의 수면을 보며 사람들은 비로소 자연의 '불인(不仁)'을 잊고 서호십경(西湖十景)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밀양강변의 상징적 건축물들 - 밀양강에 의지해 도시를 만든 사람들은 밀양강변을 상징적인 건축의 장소로 삼았다. 가장 양기 어린 곳에는 영남루(왼쪽)를, 가장 음기 서린 곳에는 아랑사(가운데 낮은 곳)를 지었다. ⓒ 이주옥 |
강 무서운 줄 알던 밀양 사람들도 강 양쪽에 제방을 쌓았다. 그리고 밀양강 북쪽, 곧 내일동 쪽에는 제방까지 집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대지를 조성했다. 대지의 남쪽인 제방 쪽에는 마당이나 텃밭을 두고 계단을 설치해 제방에서 바로 집으로 내려갈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제방은 도시의 길이기도 했다. 건물은 대지의 북쪽에 제방을 바라보고 남향으로 앉혔다. 집을 제방에 바짝 붙여 지으면 남쪽의 햇볕을 받을 수 없지만 이렇게 제방 쪽에 마당이나 텃밭을 두면 마당과 텃밭은 물론이고 집에도 햇볕이 잘 들 수 있다.
밀양강 북쪽 제방에서 본 도시 공간 - 대지의 북쪽에 제방을 바라보고 건물을 앉혔다. 제방에서 계단을 통해 집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 한필원 |
밀양강 남쪽, 곧 삼문동 쪽에서는 제방에 바짝 붙여 대지를 조성하지 않고 제방과 대지 사이에 꽤 너른 길을 냈다. 둑 아래쪽 '둑밑길'에 면해 대지를 조성하고 집들은 대지의 북쪽, 곧 '둑밑길'에 바짝 붙여 지었다. 그리고 집의 남쪽에 마당이나 텃밭을 두었다. 그럼 밀양강 남쪽에서는 왜 북쪽처럼 대지를 제방에 붙이지 않고 제방과 대지 사이에 길이라는 공간의 켜를 두었을까? 제방이 있다 해도 그것에 바짝 붙여 집을 지을 만큼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밀양강은 두려운 존재였나 보다.
밀양강의 북쪽 제방을 걸으며 한쪽으로는 남쪽 햇살에 빛나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다른 쪽으로는 낮은 곳에 있는 집 뜰에서 자란 키 큰 나무들의 이파리를 만져본다. 이런 도시생활의 여유도 밀양강이 두려워 쌓은 제방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제방은 여러 면에서 밀양이라는 도시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밀양강 남쪽 제방에서 본 도시 공간 - 제방과 대지 사이에 꽤 너른 길을 내서 둑 위와 그 아래쪽 길, 이렇게 두 높이에서 도시 공간을 볼 수 있다. ⓒ 한필원 |
북쪽 제방은 낮은 마당과 텃밭들, 그리고 거기서 자란 키 큰 나무들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와 달리 밀양강 남쪽 제방은 남쪽에 난 낮은 길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밀양강은 남과 북의 도시 공간에서 모두 한 길이 넘는 제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러나 근래에 북쪽 제방에 바짝 붙여 높은 건물을 지음에 따라 제방의 존재가 콘크리트 속에 묻힌 채 하나의 평범한 가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방과 하나가 된 건물들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들은 강을 알지 못한다.'
도시의 시간축, 중앙로
밀양역에서 내리면 역 광장의 경사진 바닥이 발길을 왕복 2차선의 가로로 이끈다. 신작로의 근대적인 분위기를 아직 간직하고 있는 이 가로가 밀양의 도시 공간을 직선으로 관통하는 중앙로다. 이 길을 따라 왼쪽(남쪽)으로 가면 삼랑진이고,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역사도시 밀양이다.
오른쪽으로 발길을 트니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다방, 점집, 방앗간, 얼음집이 차례로 나타난다. 바로 밀양이라는 도시의 반도(半島)인 가곡동이다. 하지만 아직은 밀양이 오래된 도시임을 실감하기 어렵다. 북쪽으로 길을 계속 따라가면 용두교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면 도시의 섬인 삼문동이다. 계속 걸어서 이번에는 밀양교라는 다리를 건너니 드디어 도시의 뭍인 내일동이 나온다. 남에서 북으로 발길을 이끈 직선의 길이 동·서 양쪽으로 갈리는 곳에 복원된 관아 건물들이 있다. 조선시대 관아에서 시작해 삼랑진으로 곧게 이어지는 가로, 우리는 지금 역사도시 밀양의 시간축을 거슬러온 것이다.
밀양의 도시 공간은 전근대·근대·현대의 공간으로 뚜렷이 나뉘고, 이 세 시기는 각각 내일동·삼문동·가곡동의 세 영역에 대응한다. 물론 한 영역에 한 시대에 조성된 건물과 장소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영역의 골격이 일정한 시기에 조성되어 당시 특성을 반영한다는 의미다. 아무튼 이렇게 도시의 각 영역이 서로 다른 시간성을 가짐으로써 밀양은 진화하는 도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내일동의 '향촌식당' 같은 전통한옥이 삼문동에서는 일식(日式) 주택으로, 가곡동에서는 양옥으로 바뀐다. 그리고 가곡동에는 앞으로 집들이 지어질 빈터가 많다. 내일동에서 가곡동에 이르는 동안 곡선의 기와집들은 직선의 기하학적인 건물들로 바뀐다. 내일동에는 중앙로와 직각으로 난 길을 따라 주로 농수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파는 재래시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삼문동과 가곡동에는 주로 공산품 상점이나 음식점 등의 서비스업, 그리고 공장들이 늘어서 있다. 내일동과 삼문동의 곡선 길들은 가곡동에서 직선으로 바뀐다. 밀양에서 강의 양쪽을 비교하다 보니 '회수(淮水)의 북쪽에서 나면 탱자이고 남쪽에서 나면 귤이 된다'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밀양에서 서로 다른 시간성을 갖는 영역들을 꼬치처럼 하나로 꿰어주는 시간의 축인 중앙로는 곡선으로 흐르는 강물 위를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내일동 중앙로는 과거 의식(儀式)의 축이었던 남문―동헌 사이 남북길의 동쪽에 나란히 난 신작로이다. 그것이 밀양강을 건너자 삼문동에서는 공공생활의 축이 된다. 관아와 영남루 등 내일동의 장소들에서는 역사적·상징적 의미가 중시되나, 삼문동·가곡동에서는 접근이 편리한 공공성과 효율성이 중시된다.
밀양과 달리 전근대·근대·현대의 세 시기가 하나의 영역에 혼재하는 도시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밀양에서 보이는 영역과 시간성의 대응이 그다지 신기한 현상은 아니다. 크게 보아 서울은 근대 이전의 강북과 현대의 강남으로 구성되고, 내가 사는 대전도 밀양처럼 전근대의 회덕, 근대의 원도심, 현대의 둔산지구 등 세 영역으로 나뉜다. 다만 밀양에서 특이한 것은, 이들 세 영역 사이로 강이 흘러 각각의 영역이 분명한 경계를 가지며 또렷이 인지된다는 점이다. 이같이 도시의 영역이 강이라는 자연요소로 나뉘어 각기 다른 시간성을 갖는 것은 다른 도시에선 보기 드문 밀양의 큰 매력이다.
내일동은 복원 중
돌로 쌓은 성벽으로 둘려 있던 밀양의 읍성, 곧 전근대의 도시 영역은 대체로 오늘날의 내일동 지역에 해당한다. 늦어도 조선시대 초에 이 영역의 기본 틀이 만들어졌으며 이후의 변화 역시 그 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읍성 정문인 남문과 수령의 집무공간인 동헌을 연결하는 남북길,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동서길이 구불구불하게 변형되며 T자를 이루었는데, 옛 도심은 이 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 두 방향의 길이 만나는 지점에 동헌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관아가 있었다.
밀양강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에 이르는 성 서쪽 평지 구간에는 성벽 바깥을 따라 인공으로 낸 해자(垓字)가 있었다. 이는 교동 뒷산에서 내려온 물길을 성벽을 따라 인위적으로 돌린 것인데, 바로 성안 방어를 목적으로 만든 수로이다. 해천(海川)이라 불리던 밀양의 해자를 1993년에 복개하여 골목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내일동과 내이동의 경계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송상현(宋象賢)이 죽음으로 지키던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양으로 몰려들어 밀양읍성을 초토화시켰다. 그때 성벽이 허물어졌고 관아는 불타버렸다. 그 뒤 성벽을 복구했으나 1902년에 다시 철거했다. 거기서 나온 석재를 당시 부설한 경부선 철도공사에 갖다 썼다고 한다. 성벽과 성문이 사라지고 해자는 복개되었지만 내일동은 여전히 전통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과거의 중심 가로인 남북길 주변에는 향촌식당 같은 한옥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중앙로 동·서 양쪽에 조성된 약전시장과 재래시장도 옛 분위기를 전해준다.
내일동 지역은 늘 무언가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현장이다. 2009년 봄, 내가 밀양 답사를 시작했을 때는 아동산 능선을 따라 성벽 동쪽 부분이 복원되었다. 동문고개에서 영남루에 이르는 이 성벽은 높이가 낮고 폭이 넓어 그 위를 걷는 느낌이 참 편안하고 좋다. 여름철에는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기도 한다. 하루는 성벽 위를 걷는데 소녀 2명이 종종걸음으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내가 말을 거니 그들은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러 가요'라고 밝게 대답한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 가운데 하나가 아지트 만들기다. 성벽 어딘가에 아지트를 만드는 소녀들, 도시에서 모처럼 본 어린이다운 정겨운 모습이었다.
최근 영남루 주변과 관아를 복원했으며, 2010년부터는 해천을 복원하고 있다. 다른 역사도시들에서도 문화재청과 지방자치단체 주도로 도심 곳곳에 관아를 복원한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런데 도심의 너른 터를 차지하며 복원된 옛 건물들은 텅 비어 있기 일쑤고, 방문객이라고는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중고생들이 고작이다. 밀양에서도 간혹 주말에 전통혼례를 올리기는 하지만 평소에는 모형 졸개들만이 텅 빈 관아를 지키고 있다.
옛 시설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도 좋지만 복원된 시설을 잘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복원된 역사적 건축이 도시생활의 진정한 장소가 되지 못하고 관광의 대상에 머문다면 그것은 '타자화된 건축'일 뿐이다. 그러한 건축은, 별 하는 일도 없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월급만 타가는 노쇠한 상사처럼, 끊임없이 유지·관리의 손길만 기다리며 결국은 도시에 공간적·재정적 손실을 안겨줄 것이다. 시민에게 도움이 되는, 시민들이 도시의 옛 공간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절실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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