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다고 믿는 바를 계속 그려야만 한다.
육체적으로 죽는다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그린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내게 그리라고 하는 것을 그리고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보게 된다면,
그건 육체적인 죽음보다 더 힘든 일이 될 것이다.
― 나지 알 알리
1
팔레스타인
“나지 알 알리의 만평은 언제나 진실을 가리키는 나침반과 같았다. 그 진실은 언제나 팔레스타인일 것이다.”
이라크의 시인이며 나지 알 알리의 오랜 친구였던 아흐마드 마타르Ahmad Matar는 알 알리가 아랍 세계의 독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위와 같은 말로 요약했다. 20세기 전반기에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에게 일어난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지 알 알리의 만평만이 아니라 오늘날 중동 전체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시온주의 운동Zionist movement*은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이라 불리던 땅 전체에 유대인만을 위한 국가를 건국하려 하면서, 팔레스타인 국민의 고국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결국 1948년 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이스라엘은 중앙집권적 경제계획을 추진하며 토착민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서 토지와 자원 및 경제적 기회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문화적 지배권까지 박탈했다. 이런 박해는 팔레스타인 마을들에 대한 야만스런 공격으로 이어지며 극에 달했고, 이스라엘은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추방하고 시온주의자들을 그곳에 정착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고 말았다. 유예기간도 없이 쫓겨나서 고향이라 부를 만한 새로운 땅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공동체는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나고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쯤 이미 역동적이고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 유엔의 관리하에 이웃 나라들에 준비된 난민촌, 이스라엘 건국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제공됐던 바로 그 난민촌에서 산산조각난 삶을 봉합해야만 했다.
* 시온주의 운동 : 유대인들의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
어린 시절에 팔레스타인을 떠난 나지 알 알리와, 그 시대를 함께한 동포들은 고향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감귤나무들의 향기, 돌집과 밭의 정경을 잊을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이제 그들의 땅이 아니었다. 집을 잃고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후세에게도 집단 기억에만 남아 있는 고향이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고향에서 쫓겨난 나지 알 알리를 비롯한 모든 팔레스타인인에게, 1948년의 팔레스타인 ‘나크바’(재앙)는 그들의 가슴에 생생하고 뚜렷하게 새겨졌다. 알 알리가 되풀이해서 말했듯이, 이런 이유에서 한잘라는 언제나 11세 소년으로 그려졌다.* 알 알리의 만평에서 신랄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도덕성이 찾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한잘라의 나이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알 알리의 아들 칼리드에게 확인한 바로는 11세가 가장 정확하다.
알 알리의 일일 만평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반항적인 어린 팔레스타인 난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도덕적으로 명료하다는 것이, 그의 그림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의 만평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닥친 고통을 직설적이고 진실되게 표현한 역사적 기록이다.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여러 아랍 국가들이 가한 엄격한 규제를 꿋꿋하게 견뎌 냈지만, 난민들은 1967년 고국의 남은 땅마저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지는 걸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에 정착촌을 불법적으로 건설해 나가는 동안, 이웃한 아랍 국가들은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일시적으로라도 적절한 거주지를 제공하지 못했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성실한 지원자 노릇도 하지 않았다.
* 3차 중동전쟁 : 1967년 6월에 벌어진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 간의 전쟁. 이스라엘이 승리함으로써 동예루살렘과 가자 지구, 웨스트뱅크(서안) 등이 이스라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한잘라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국제법이 원칙 없이 고무줄처럼 적용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줄어들었지만, 한잘라는 어린 시절의 팔레스타인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한잘라는 늙을 수가 없었다. 한잘라마저 늙는다면 난민들의 처참한 상황이 당연시되기 때문이었다. 알 알리의 세대에 속한 팔레스타인 난민들 사이에 떠돌던 이야기를 빌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난 과일은 손도 댈 수 없었다.
이 장의 만평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한 어린아이의 맑고 움츠려들지 않는 시선만이 아니다. 결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겠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순박하면서도 단호한 의지, 그리고 그들만의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려는 집요함도 읽혀진다.
알 알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시련에 비유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자상은 낯익기 때문이다. 십자가 옆에 나란히 놓인 초승달은,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똑같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84년 12월)
눈물짓는 팔레스타인 여자에게 철조망은 가혹한 현실을 의미하지만, 그녀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1987년 1월)
나지 알 알리는 예수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베들레헴에 있는 고향집에 돌아가기를 꿈꾼다. (1982년 4월)
* 베들레헴 :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마을. 예수의 고향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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