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앤서니 드커티스(음악평론가)
“사람들이 다가와 제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면 열에 아홉은 평화운동에 관한 걸 꼭 함께 언급하죠.” 존 바에즈는 자신의 특별한 인생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요소를 설명하며 이렇게 회고한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에 무척 감동을 받아요. 나의 평화 활동이 그분들 삶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분들 인생의 전환점에서 내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알게 되거든요.”
그녀는 말을 잇는다.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이야기는 당시 군대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어요. 그들은 베트남 전선이나 다른 전쟁 지역에서 복무하던 시절, 금지곡이던 내 노래들이 담긴 앨범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를 들려주었죠. 그 노래들을 밤에 몰래 들은 이야기며, 그것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에 관해서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노래가 군대를 떠날 수 있게 용기를 주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위안이 되어 주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내가 그분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낍니다.”
자신의 모든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존 바에즈의 충실한 자서전, 《함께 노래하는 목소리》(And a voice to sing with)가 처음 출간된 것은 1987년이었다. 그런데 이 자서전을 읽다 보면, 그녀가 열아홉 살 때인 1960년에 첫 앨범이 발매되고부터 25년 뒤 필라델피아에서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콘서트가 열렸을 때까지, 존 바에즈는 오직 ‘그곳’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어디에든 존재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는 미시시피 주와 앨라배마 주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나란히 행진을 했으며, 우드스톡에서는 임신한 몸으로 50만 명이나 되는 군중 앞에서 공연을 했다. 킹 목사의 1963년 3월 워싱턴 대행진에서도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열창했다. 그리고 바츨라프 하벨과 레흐 바웬사가 소련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조국을 위해 투쟁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 곁에 있었다.
존 바에즈는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고, 온 힘을 다해 도왔다. 존 바에즈라는 이름은 마틴 루터 킹이나 마하트마 간디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비폭력 저항운동의 이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중매체에서는 가끔 그녀를 두고 순진한 좌파 앞잡이의 전형이라는 식으로 피상적인 묘사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바에즈는 어떤 정권이든 어떤 정치적 유형이든 문명화된 윤리 규약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든 당파에게 가시와도 같은 불편한 존재임을 스스로 입증해 왔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녀가 1970년대 후반 베트남 정부의 인권유린을 강력하게 비난한 후 미국 내 좌파와 어떤 싸움을 치러야 했는지를 안다면, 그녀가 확고한 원칙과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식의 오해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신념에 따라 베트남전쟁 중 폭격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에 북베트남을 서슴없이 방문한 것과 마찬가지로(그 내용은 이 책의 한 장에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 정권이 자기 민족을 향해 저지른 잔인한 일들을 묵인하지 않은 것 역시 똑같은 신념의 발로였음에 틀림없다. 바에즈에게는 그저 단순하게, 옳은 것이 옳은 것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탓에, 존 바에즈에 관해 논의할 때면 누구나 평화운동가로서 그녀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전 세계 어디서나 절망적인 곤경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은 바에즈가 ‘그곳 현장에’ 자기들과 함께 있어 주는 자체만으로도 기뻐할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존 바에즈는 그런 비길 데 없는 헌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와 관련하여 1970년에 그녀는 가감 없이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에서 그러하듯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죠. 이 시대가 던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물음, 즉 어떻게 하면 인류가 서로 죽이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살육을 막기 위해 내가 평생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겠죠.”
그렇지만 존 바에즈는 한 사람의 가수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래도 이런 관점으로만 본다면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과소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바에즈의 첫 문장은 “나는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녀는 자기가 노래를 잘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것이 ‘타고난 재능’이었기 때문이다. 존 바에즈가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말할 때면, 그것이 마치 우연하게 자기 것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개인적인 느낌을 배제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재능에 관해서라면 나는 굳이 겸손을 떨거나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사실은 정말 감사하게 여기고 있죠. 왜냐하면 그건 정말 내가 만들어 낸 것도, 내가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행동도 아닌, 내게 그냥 주어진 재능이니까요.”
그렇지만 예술가로서 바에즈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면 큰 잘못이다. 그녀는 미국의 포크 음악 무대를 거대한 청중이 있는 주류 쪽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많은 훌륭한 작곡가들을 대중에게 소개한 공로도 크다. 그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라면 단연 밥 딜런이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역사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자서전 안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존 바에즈의 영향력은 포크 음악의 세계를 넘어 멀리 드넓게 확장되어 나갔다. 레드 제플린을 결성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를 앞에 앉혀 놓고 영혼을 울리는 바에즈의 버전으로 〈자기, 난 당신을 떠날 거야〉(Babe, I’m Gonna Leave You)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오래된 옛 노래를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끔 어쿠스틱하게 해석하는 것이 자기 밴드의 사운드에 관한 기본 개념이라고 말했다. 제플린은 이 곡을 자신들의 선구적인 데뷔 앨범에 수록하였다.
당시 바에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데 커다란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남자였다. 아주 여러 해에 걸쳐서 바에즈에게 접근해 온 이 남자들은, 그녀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아주 질색이었지만 그녀의 노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준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랜 세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형용사들을 탄생시켰다. ‘수정처럼 맑은,’ ‘종소리 같은,’ ‘온몸을 저릿하게 하는’ 같은 표현들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 어휘야말로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면, 특히 처음 들을 때 받는 충격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증명해 준다.
그녀가 갖고 있는 정치철학이라든가 또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언제든 기꺼이 목숨도 내놓는 정신과는 별개로, 바에즈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는 애초부터 강력하고 즉각적인 인상을 남겼다. 청아한 음색, 소프라노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음역의 화사한 음정, 젊음의 힘이 넘치는 비브라토,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그 문화 자체의 분위기를 한껏 표현했다. 노래 속에 깃든 간절한 염원과 아픔 자체가 더 나은 세상을 기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에즈의 노래는 그래서 중요했다.
(하략)
프롤로그
신은 일하는 나를 상찬하고, 노래하는 나를 사랑한다.
- 타고르
나는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재능에 관해서라면 나는 굳이 겸손을 떨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은 정말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건 정말 내가 만들어 낸 것도, 내가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행동도 아니라, 내게 그냥 주어진 재능이기 때문이다.
유전적 특질, 환경, 인종 또는 야심을 이리저리 섞은 힘들이 내게 준 가장 큰 재능은 노래하는 목소리였다. 두 번째로 큰 나의 재능은, 그 목소리와 목소리 덕분에 얻은 수확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욕망이다. 만약 이 두 번째 재능이 없었다면 나는 전혀 다른 사연을 가진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재능이 결합했기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가 생성되었다. 다양한 모험, 수많은 친구들 그리고 순수한 기쁨.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동유럽과 서유럽,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북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캐나다, 중동, 극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열린 수백 차례의 공연 무대에서 노래했다. 베트남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하노이의 방공호에서도 노래했고, 태국의 라오스 피난민 수용소에서도 노래했으며, 말레이시아 표류난민들의 임시 거류지에서도 노래했다. 나는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엘레나 보네르, 아르헨티나의 실종자 어머니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메어리드 코리건, 버트런드 러셀, 세자르 차베스, 오를란도 레텔리에르, 투투 주교, 레흐 바웬사,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지미 카터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스웨덴 국왕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몇몇 비범한 사람들을 만나는 특권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는 명망가들도 있었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를 통해 나는 수많은 정치적 양심수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좌파 정부 또는 우파 정부 아래에서 억압과 고문을 견뎌 왔으면서도 유머와 활기와 용기로 나를 놀라게 했다. 이들 가운데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있었다. 그는 나의 사상을 다지는 데 다른 어떤 공인보다 훨씬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내가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
음악 산업을 통해 나는 밥 딜런과 비틀스를 비롯하여 루치아노 파바로티까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창조적인 아티스트들 가운데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6~7년은 음악적으로 내게 어려운 시기였다. 물론 음악 산업이 먼발치에서 보여 주는 존경심을 즐길 수 있었지만, 문제는 멀리서 보여 주는 존경심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음악은 내가 알려진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오히려 미국에서 정체성의 위기 같은 것을 겪었다. 그 결과 나는 때때로 내 나라에서 마치 반체제 인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인 삶 또한 복잡했다(공적인 삶도 그렇지만). 비록 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평화를 얻게 되었고, 나 스스로를 인정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한때 나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많이 갖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내가 화롯불 위에서 스튜를 요리하는 동안 아이들이 내 둘레에서 우르르 몰려다니고, 달걀거품기에서 흘러나온 케이크 믹스를 핥고, 세인트버나드를 타고 부엌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아쉽게도 그러한 이미지들은 나의 경쟁력 있는 분야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1974년 1월에 데이비드 해리스와 혼인 관계가 해소된 이래 주로 혼자 살아왔다. 물론 이따금 남자들과 낭만적인 사랑을 했고, 최고의 경우에는 마법처럼 매혹적이고 비현실적일 만큼 멋진 사랑을 나누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한 남자는 내 나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은 프랑스인이었는데, 그는 어느 안개 낀 오후에 말을 타고 내 삶에 들어와 4년 동안 내 영혼을 불타오르게 했다. 나의 예술과 일, 가족과 친구들, 아들 게이브 그리고 신과의 기묘한 관계가 내 인생을 떠받치는 힘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 속에서도 나의 사회적·정치적 시각은 놀랍게도 확고부동했다. 나는 비폭력 저항의 원칙에 충실해 왔고, 극우와 극좌 이념들에 대한 강한 반감과 그러한 이념들이 만들어 내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슬픔을 함께 키워 왔다. 여기 미국에서 ‘신애국주의,’ 람보주의 그리고 나르시시즘을 지향하는 오늘날의 경향과 자부심의 강조는 우리의 문화적·정신적·도덕적·예술적 가치들을 위협하고, 우리의 경계들 너머에 있는 세계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배려를 가로막았다. 나는 오랫동안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해 왔고, 현재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인권보호기구의 회장이다. 후마니타스는 인권과 군비 철폐에 관한 갖가지 프로젝트를 발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 본업인 음악을 통해 이른바 1980년대의 ‘잿더미와 침묵’(ashes and silence)으로부터 그 첫 번째 조치들 가운데 몇 가지를 성취해 냈다. 라이브 에이드 자선 공연과 그 후속 조치들이 그것이다.
나는 지금 캘리포니아에 있는 내 집 주방에서 이 책을 쓰고 있다. 아들 게이브는 고등학교 마지막 한 해 동안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특히 겨울날 아침 이른 시간에, 벽난로를 등지고 워드프로세서가 놓인 카드 테이블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워드프로세서는 이 시골풍의 소박한 집 소박한 방에 놓인 유일한 초현대적인 물건이다. 이 책에 마지막 손질을 가하는 중에, 또한 나는 6년 만에 스튜디오 안에서 녹음할 준비를 하고 있다. 창문 밖의 장미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더 꽃을 피울 것이다.
이러한 나의 개인적·정치적·정신적 그리고 음악적 삶의 줄기들이 때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함께 엮이고 어떻게 분리되는지를 추적하는 데에만 2년이 걸렸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내가 기억하는 대로 이야기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선택적인 기억력과 그보다 더 생생한 상상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이 사실들을 기록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둘째, 나는 아직 마흔다섯 살(1987년 당시)밖에 되지 않았고 활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전성기의 목 상태를 갖고 있기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고리타분한 어떤 것으로, 또는 누군가의 지난날에 대한 눈물 어린 향수로 치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가 가장 중요한데,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해, 이토록 별스러운 시대에 정면을 바라보기에 앞서 지난날을 지그시 돌아보기 위해 이 사실들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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