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왜 ‘매춘’이 아니라 ‘매매춘’인가?
한국 매매춘의 역사 현장을 산책하기 위해 가져야 할 첫째 자세는 왜 ‘매춘’이 아니라 ‘매매춘’이라고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1986년 10월 14일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매춘 문제와 여성운동’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여 기지촌 여성들의 현장 증언, 제주도의 기생 관광 실태와 매춘 여성 인권유린 현장, 동남아 성매매와 여성 인권유린 현실의 심각성을 부각했다. 이 세미나에서 우리나라 성매매 반대 운동 사상 처음으로 매춘에 대한 개념 정의가 이루어졌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손덕수와 이미경은 종래의 ‘매춘賣春’이라는 용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손덕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매춘은 몸을 파는 사람과 몸을 사는 사람이 있을 때 성립하므로 ‘賣春婦’와 ‘買春夫’가 똑같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매춘을 매매춘賣買春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며 용어의 적확한 사용을 촉구했다. 이미경도 ‘사는’ 남자 쪽을 강조하며 ‘매매춘賣買春’ 혹은 ‘매춘買春’으로 쓰기를 주장했다.
이후 ‘매춘’ 대신에 ‘매매춘’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 글에서도 ‘매매춘’이란 용어를 쓰기로 한다. 그러나 인용 문헌에 ‘매춘’으로 나와 있는 것은 그대로 표기하였음을 밝혀둔다.
매매춘은 문화권별로 성性 문화가 어떠한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 뉴욕 주립대의 부부 교수인 번 벌로Vern Bullough와 보니 벌로Bonnie Bullough는 《매춘의 역사》(1987)에서 “매춘이란 명확히 성관계, 여성의 처녀성, 여성의 간통 등에 대한 종교적 견해나 철학적 가설과 결부되어 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의 처녀성이 찬양되고, 여성의 간통이 처벌되는 사회에서는 아마도 제도화된 매춘이 성행할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매춘은 또 결혼의 패턴에도 관계가 있으며 여성들이 결혼을 어렵지만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는 경우, 아마도 매춘 발생률이 높아질 것이다.”
이 진술은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매매춘 공화국’이 된 이유를 시사해준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 또는 신축성이야말로 한국 성性 문화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오랜 기간 외국 군대를 주둔시킨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가세해 그런 결과를 낳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매매춘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고대 그리스 사서에 매춘부의 존재가 처음 등장했는데 매춘을 뜻하는 영어 ‘prostitution’도 이때 비롯됐다. 어원에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앞’을 뜻하는 ‘pro’와 ‘서 있다’는 뜻인 ‘stitution’이 합쳐진 것으로 문 앞에서 남성을 유혹하는 행위를 뜻한다는 풀이가 우세하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매춘부들에게 구분되는 옷을 입혔고 세금도 부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외국 여자에게만 매춘을 인정한다는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집단을 이룬 ‘매음굴’이 등장한 것은 중세 유럽 때부터였다. 이곳은 중요한 세원으로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번성하다 종교개혁으로 철퇴를 맞았지만, 이는 곧 다른 형태로 부활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한국 매매춘의 기원은 본문에서 다루기로 하자. 그런데 기원을 찾다보면 매매춘과 간통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매매춘은 돈을 매개로, 간통은 사랑을 매개로 한다는 차이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대중화’된 간통은 그런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 책 끝에 <간통의 역사: 한국은 어떻게 ‘간통의 천국’이 되었는가?>라는 비교적 짧은 글을 부록으로 게재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매매춘의 역사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 책은 나의 ‘한국 사회문화사 시리즈’ 가운데 《죄의식과 희생양: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김환표와 공저, 개마고원, 2004),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커피와 다방의 사회사》(오두진과 공저, 인물과사상사, 2005), 《축구는 한국이다: 한국축구 124년사, 1882~2006》(인물과사상사, 2006년),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말죽거리에서 타워팰리스까지》(인물과사상사, 2006), 《입시전쟁 잔혹사: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인물과사상사, 2009), 《어머니 수난사》(인물과사상사, 2009), 《전화의 역사: 전화로 읽는 한국 문화사》(인물과사상사, 2009),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한국 실업의 역사》(개마고원, 2010), 《룸살롱 공화국: 부패와 향락, 패거리의 요새 밀실접대 65년의 기록》(인물과사상사, 2011), 《담배의 사회문화사: 정부 권력과 담배 회사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인물과사상사, 2011)에 이은 열한 권째 책이다. 한국 사회의 모든 것들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내 뜻에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12년 4월
강준만 올림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1장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
개화기 이전의 매매춘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에 가무를 담당하던 유녀를 매매춘의 효시로 보지만, 일치된 의견은 없다. 삼국시대부터냐 조선 시대부터냐 하는 논쟁이 있는데, 이는 매매춘의 제도화에 관한 논쟁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즉, 매매춘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그것이 제도로 정착해 널리 성행했는가는 기록과 자료의 부족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록을 중심으로 보자면, 고려 시대 때 중국에서 관기 제도가 수입되면서 기녀라는 명칭이 붙었고 조선 시대에는 기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본래 기생은 관기와 민기, 약방기생과 상방기생 등을 통칭하는 말로 매매춘을 본업으로 한다기보다는 궁중의 약 제조나 가무를 맡아보던 사람들인데 후에 사대부나 군인들을 상대하는 위안부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 태종 때 창기를 모두 없애자는 주장에 대해 일부 관리들이 “창기를 없앤다면 관리들이 여염집 담을 넘게 돼 훌륭한 인재들이 벌을 받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조선 조정은 세종 때 부산포·염포·제포 등 삼포三浦에 왜인 거주 지역을 허용했는데, 이들이 조선 여자와 매매춘을 하는 것에 대해선 강력히 대응하였다. 응징은 어떠했던가? 이규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인의 머리채를 노끈으로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그러고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활을 당겨 그 노끈을 잘라 땅에 떨어지게 하곤 했다. 한국판 윌리엄 텔이었다 할 수 있다. 이런저런 분노가 결집하여 삼포의 왜란倭亂이 일어났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에도 일본인을 상대로 한 매매춘은 계속되었는데, 정조 때의 《대전통편》은 왜인에게 뇌물을 받고 여인을 유인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매춘한 여인은 장형杖刑 1백과 유배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매매춘한 일본인은 강제 추방하였다.
신경숙은 논문 <조선 후기 여악女樂과 섹슈얼리티>를 통해 “조선 시대에는 일반 기녀들뿐 아니라 국가의 공식 의례와 각종 연회에서 음악과 가무를 담당했던 여악이나 관기官妓도 지배층을 위한 성적 봉사 임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라며 “조선 후기 여악이 관의 영향에서 벗어나 민간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여악의 경영자로 나선 기부妓夫, 남성 가객, 좌상객座上客 등 이른바 ‘여악 매니저’들에 의해 여악이나 관기의 성적 도구화가 더 심해지게 됐다”라고 주장했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서울과 평양 등지에 갈보라고 불리는 직업 매춘부들이 소규모 유곽을 이루었지만, 홍등가가 본격 등장한 것은 구한말 일본 군대가 진주한 1904년께부터였다. 사정이 그런 만큼, 한국 매매춘의 역사를 탐구해보는 이 책은 개화기에서부터 출발하겠다.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
한국의 매매춘 제도화엔 17세기 이래 공창公娼제도를 택해온 일본의 영향이 컸다. 개항(1876년) 이후 일본의 매매춘 제도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시작해 조선 전역으로 확산했다. 《독립신문》은 일본인들의 성매매 업소에 드나드는 조선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독립신문》 1896년 7월 11일자는 “음녀들이 각처에 많이 있어 빈부를 막론하고 어리석은 사나이들을 유인하여 돈들을 빼앗으며…… 무뢰한 배들이 남의 계집아이들을 사다가 오입을 가르친다니 이런 일은 경무청에서 마땅히 엄금할 일이더라”라고 했다.
청일전쟁(1894년)·러일전쟁(1904년)을 거쳐 일본인들의 침투가 가속화되면서 성적 향락 문화는 일반 대중의 삶까지 파고들었다. 매춘 여성을 격리하고, 등록하여 허가를 받게 하며, 세금을 걷고 위생검사를 하게 된 것은 1900년대 중반부터였다.
1904년 경무사 신태휴는 매춘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울 남부 시동詩洞에 상화실賞花室이라는 매매춘 지역을 만들고 그 외에서의 영업은 못하게 하는 훈령을 내렸다. 내국인들이 드나드는 집은 ‘상화가賞花家’,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집은 ‘매음가賣淫家’라는 문패를 달게 했다. 인천 화개동 등 여러 곳에도 집창촌이 형성되었다.
홍성철은 “당시 일본으로부터 배일적인 인물로 분류됐던 신태휴가 성매매 여성 집단 거주지를 자발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그만큼 성매매 여성의 증가와 성병 문제, 성매매에 따른 사회적 폐해, 성폭력 등으로 말미암은 풍기문란이 심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1904년 무렵에는 “전답 좋은 것은 철로鐵路로 가고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는 속요(<신아리랑타령>)가 떠돌 정도였다. 갈보蝎甫의 ‘갈蝎’은 중국 말에서 온 것으로 밤에 나와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취충(臭蟲, 빈대)을 뜻하는 것이었으니, 욕치고는 끔찍한 욕이었다. 그럼에도 갈보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일패, 이패, 삼패
권희영은 <호기심 어린 타자: 20세기 초 한국에서의 매춘부 검진>이란 논문을 통해 1904년 인천에서 처음 시작된 매춘부들의 위생 검진에 주목했다. 권희영은 “정치가, 군인, 사회운동가 등이 모두 부국강병을 시대적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매춘부 치료가 하나의 시대적 요청으로 여겨지게 됐다”라며 “이 과정에서 당시 ‘매춘부’는 남성의 불안감과 죄책감까지 함께 떠안은 채 가차 없이 그 명예를 짓밟혔다”라고 말했다.
1906년부터 모든 주요 도시에서 매음세를 징수하는 동시에 매춘부에 대한 위생 검사가 시행되었다. 1909년의 보도로는 창기 숫자가 서울에서만 2,500을 헤아렸다. 1900년대부터 약 광고가 범람한 가운데 1910년 이후에는 성병 치료제 광고가 제일 흔했다.
처음에 성병 검사에 대한 매춘부들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성병 검사가 남자 의사에 의해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검사를 피하려고 영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검사 대상에 오르지 않는 기생으로 전업하거나, 지방에 내려가거나, 심지어는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다. 당국은 포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저항에 대응했다.
1908년 6월에는 매춘부의 가부(假夫: 기둥서방)나 포주들에게 ‘경성유녀조합’을 조직하게 해 성병 검사 위반자에 대한 경찰 개입을 강화했고, 1908년 9월에는 경시청령으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발표해 매매춘 관행의 공창화를 구체화했다. 그렇다면 기생은 무엇이고 창기는 무엇일까? 기생은 매춘할 수 없고 객석에서 무용과 음곡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창기는 매춘만 할 수 있게 한 구분이었다.
이즈음부터 기생을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누는 분류법도 쓰였다. 일패는 양반층의 잔치에 참여해 흥을 돋우는 예전 뜻 그대로의 기생을 뜻했다. 이패는 기생 출신으로 은밀히 몸을 파는 은근자殷勤者 또는 은군자隱君子인데, 이때의 ‘군자’는 도둑을 양상군자梁上君子로 부르는 것과 같은 반어적 용법이다. 사람들은 보통 ‘은근짜’라고 불렀다. 삼패는 성매매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을 뜻했다. 전통 기생은 이패와 삼패가 기생으로 불리는 것에 분노했으며, 기생만 쓸 수 있는 홍양산을 삼패가 쓰고 다니자 경무청에 항의하는 한편 양산에 기妓 자를 금색으로 새겨 붙이기도 했다.
일제 통감부의 적극적인 공창화 정책
기생은 그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으로도 분류되었다. 일패는 값이 가장 비싼 양분洋粉을 썼기에 양분기생, 이패는 값이 중간인 왜분倭粉을 썼기에 왜분기생, 삼패는 값이 가장 싼 국산품인 연분鉛粉을 썼기에 연분기생으로 불렸다.
국산 연분(납분)은 그 부작용이 매우 심각했다. 이 연분을 많이 쓰는 여인들은 얼굴이 푸르게 부어오르고, 잇몸이 검어지고, 구토가 나고, 관절이나 뇌세포까지 손상되는 납독의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납독으로 미친 사람도 생겨났고, 기생의 사생아들도 눈이 멀었다든지 관절이 굳었다는 사례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런 심각한 부작용을 알면서도 연분을 썼으니!
1908년 10월 1일 통감부는 기생?창기?기둥서방 등 468명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 단속령에 관한 설명회를 열었다. 통감부는 이들에게 스스로 조합을 결성케 해 성병 검사는 물론 화대 조정에 협조하게 하였다. 새로운 규약은 화대를 한 시간에 80전으로 정했다. 기존에는 시간 여하에 관계없이 1회 4~5원으로 되어 있었는데, 고객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하므로 시간당 요금을 정해야 일반인들이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기생과 창기의 연령 하한을 당시 조선의 결혼 가능 연령을 근거로 만 15세로 정하였는데, 이는 일본 국내 공창의 연령 하한인 18세보다 세 살이나 낮고 일본인 거류지의 일본인 창기의 연령보다 낮은 것이었다.
야마시다는 “일본은 통감부 설치와 동시에 조선인 매음부의 공창화 그리고 일본식 공창화를 추진하였으며 그것은 거류지의 공창화와는 대조적으로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조선 공창제도의 특징은 일본 국내 또는 거류지에서 풍기 단속을 위해 유곽을 설치한 것과는 달리 시내에 산재해 있는 상태에서 매음업을 공허하면서 매음부의 성병 검사를 중심으로 공창화를 실시한 점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조선 사회 전반에 매매음을 스며들게 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는 성 의식 확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공창제도 확립 과정에서 매음부의 성병 검사가 일관되게 중시된 것은 일본 군대의 강병책에 그 배경이 있었으며 그 실질적인 의미는 매음부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적 도구의 ‘안전성’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매춘을 알선하는 소굴
1900년대의 공연 예술은 자주 매매춘 논란에 휘말려 들곤 했다. 특히 개신교인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황성신문》 1909년 6월 3일자를 보면, 개신교 신도 수십 명이 공연 중인 연흥사 앞 건물에서 소리 높여 찬송가를 부름으로써 공연을 방해하였다. 경찰도 풍기 단속을 이유로 곧잘 통제를 가하곤 했다. 경찰 당국은 입장객이 40명 미만이면 공연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들어 시행했는데, 1909년 8월 1일 그러한 규칙에 따라 실제로 극장 문을 열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연극장 내 풍기 문란이 심한 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이승원은 “연극장에는 부랑패류들과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범람했다. 연극장을 찾는 목적도 일차적으로는 연극을 구경하는 데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부인석의 갈보 구경도 실컷’하려는 꿍심을 감추지 않았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09년을 기준으로 서울에서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는 2,500명 정도였다. 이들의 주요 활동 장소가 연극장이었다. 공권력은 사복 경찰을 연극장에 비밀리에 투입하여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승원은 “문명개화를 위해 설립한 근대적인 신식 극장들이 매춘을 알선하는 소굴로 변해갔다. 단성사, 협률사, 원각사, 광무대 등 근대식 극장은 취군 나팔 소리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유인하였고, 이 때문에 도시는 좀더 소란스러워졌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극장의 취군 나팔 소리에서 탕아들의 방탕한 화류계 생활을 연상했다. 이 때문에 신문들은 극장에서 공공연히 거래되는 ‘매춘’에 대해서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 기생들의 판소리 또한 계몽가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기생의 노랫소리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고, 기생방에서 세월을 낭비하는 청년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서울 기생이 급증한 데에는 1909년 관기 제도의 폐지가 미친 영향이 컸다. 먹고살 길이 없어진 지방 기생들은 앞다투어 서울로 상경하였고, 적극적으로 영업함으로써 수요를 창출하고자 하였다. 철도 덕분에 지역 간 이동이 자유로워졌고 기생의 법도가 무너진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과거엔 양반만 상대할 수 있었던 기생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점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그간의 신분제를 뛰어넘는 한풀이 수단으로 기생 수요가 폭증하였다. 또한 신흥 기생 고객은 기생의 법도를 모르는 자들이라, 기생의 공급도 마구잡이로 이루어졌다. 이런 수요-공급의 상승효과로 기생이 급증하였던 것이다.
임종국은 이 시대의 전반적인 풍기문란은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장한 것이라며 “일제의 침략은 칼과 코란이 아니라 칼과 여자로 수행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이유로 “첫째는 구한말 집권층의 정치적 불만의 토출구로써, 둘째는 유산 계층의 탕재로 민족자본의 형성을 저해하기 위해서, 셋째는 청년층의 민족의식을 주색으로 마비시키기 위해서” 등을 들었다.
화류계의 친일화 공작
일제 강점 후, 특히 3·1운동 이후 일제의 친일파 보호·육성 공작은 치밀하게 전개돼 심지어 화류계까지 친일화 공작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요정은 조선 엘리트들의 주요 사교·담론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공작 내용은 첫째, 경성 시내의 기생 전부를 시내 각서에 불러 엄중히 훈계한다. 둘째, 윤치호가 회장인 교풍회와 제휴하여 시내 각 권번의 역원과 경찰 간부 모임을 열어 불령한 음모를 방지하도록 협의한다. 셋째, 새로이 권번을 허가하여 기생을 친일화 하도록 노력한다. 넷째, 내선內鮮 화류계의 융화를 촉진한다 등이었다.
경기도 경찰부장을 지냈던 지바千葉了는 “1919년 9월 우리가 처음 경성에 왔을 당시의 화류계는 …… 기생 800명 모두 살아 있는 독립격문獨立檄文이었다”며 그런 공작을 펼친 결과 “음모의 소굴로 음부陰府나 다름없었던 화류계가 지금은 내선일여內鮮一如를 구가하는 봄날의 꽃동산이 되었다”라고 자랑했다.
실제로 3?1운동으로 크게 고무된 기생들은 대학생이 요정에 가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 독립할 생각은 않고 유흥이냐고 타이르면서 함께 놀기를 거절하기도 했다. 또 가난한 청년 학생에게 학자금까지 제공하면서 독립투사가 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공작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생은 원래 요릿집에서 숙박할 수 없었지만 이후 요릿집에 상시 고용돼 성을 팔기도 했다. 1926년 《개벽》은 “과거의 기생은 귀족적이더니 현재의 기생은 평민적이다. 과거에는 비록 천한 직업이었지만 염치와 예의를 챙겼는데, 이제는 금전만을 숭배한다”라고 했다.
일제는 그런 공작 차원에서 성매매 산업을 육성했다. 미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시카고트리뷴》(1919년 12월 26일)은 “일본이 조선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인종차별적인 윤락가를 만든 것”이라며 “일본인들이 조선에 악의 시스템을 전달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조선 자체에는 이러한 악의 거리가 없었다”면서 “이러한 윤락가는 조선인 남녀의 성적 타락을 위해 일본이 치밀하게 도입한 것”이라고 했다.
(머리말,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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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준만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와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한 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한겨레》를 비롯한 각종 신문, 잡지, 언론 매체에 시사 평론을 기고했고, 인문·사회·정치·문화에 관한 입지전적인 책을 펴냈다. 그가 평생의 작업으로 꿈꾸는 ‘한국 생활사’는 축구, 전화, 바캉스, 도박, 선물, 성형, 목욕, 입시 등 분야를 망라한 흥미로운 40여 가지 주제에 천착해오고 있으며 계속해서 단행본으로 출간될 계획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현대사 산책》(전 23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 10권), 《미국사 산책》(전 17권),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이건희 시대》, 《한국인 코드》, 《한국 대중매체사》, 《현대 정치의 겉과 속》, 《입시전쟁잔혹사》, 《어머니 수난사》,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 《룸살롱 공화국》, 《강남 좌파》,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 《자동차와 민주주의》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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