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문
라로통가로 도망치다
사실 세상 어디를 가나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는 단 하나, 도망치는 이야기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는 유일한 주제는 도망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A. C. 벤슨
2003년 새해 첫 날 아내 칼라와 나는 캘리포니아주 스튜디오시티에 있는 작은 커피숍 안마당에서 각자 공책을 펼쳐놓고 펜을 쥔 채 앉아 있었다. 우리 부부의 연례행사인 신년 계획 세우기를 위한 자리였다. 이럴 때는 보통 행복하고 낙관적이게 마련이다. 전엔 일본어 배우기, 어휘력 늘리기, 요리 실력 쌓기, 책 출간 계약 같은 목표들을 세웠다. 그런데 2003년에는 달랐다. 2001년에 기어이 터져버린 닷컴 거품 붕괴의 여파로 우리는 둘 다 암담한 심정이었다. 내 거래처였던 <인더스트리 스탠더드>라는 잡지는 인터넷 기업을 다루다가 덩달아 문을 닫았고, 글을 기고하던 다른 기술 관련 잡지들도 이미 간판을 내렸거나 오늘내일하는 처지였다.
프리랜서 저널리즘 시장이 통째로 구렁텅이에 빠진 형국이었고, 잡지에 글 쓰는 걸 업으로 삼아온 우리 부부도 함께 그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인더스트리 스탠더드>는 불과 이태 전인 2000년만 하더라도 무려 400쪽에 달하는 지면을 자랑했으며, 높은 단가에도 불구하고 광고가 줄을 서는 잘나가는 주간지였다. (지금도 1년 최다 광고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던 그 시절엔 잡지의 그 많은 지면을 채울 글이 절실했고 그만큼 높은 보수를 지불했다. 오래된 스톱모션 괴수영화, 왕년의 SF 만화가, 연에 카메라를 부착해서 항공촬영을 하는 플라이캠 애호가들까지, 글의 주제도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굉장한 시절이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담당 편집자가 묻는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언제까지 써주실 수 있나요?”
그런데 2001년에 접어들면서 애초에 지속 불가능한 사업계획을 가지고 시작했던 인터넷 회사 수백 곳(이를테면 코즈모닷컴, 덴닷넷, 펫츠닷컴, 플루닷컴, 웹밴닷컴, 부닷컴, 이토이스닷컴)이 수억 달러를 날려서 투자자들을 기절하게 만들고 나스닥을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 나니 잡지에 광고를 실을 회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400쪽을 내던 <인더스트리 스탠더드>는 64쪽도 간신히 채우는 팸플릿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 잡지가 곧 막다른 골목에 봉착하리라는 건 뼈저리게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해 8월의 어느 날 아침, <인더스트리 스탠더드>의 담당 편집자로부터 다른 채권자들 틈에 끼어 기다리고 싶지 않으면 당장 마지막 결재 청구서를 보내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받을 금액의 일부라도 건진 채권자라면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2억 달러를 날린 잡지는 결국 파산했다.
“그래도 우리는 호시절을 누린 거예요.” 담당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는데 말인즉슨 맞는 말이었다. 원고료를 받아 아이 학비와 주택담보 대출금을 냈고 아이를 하나 더 키우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며 조만간 둘째가 생기길 기대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이런 상황이 터졌고 큼직한 파이프로 흘러 들어오던 돈이 졸졸 흐르는 수준으로 줄어들자 비로소 현실을 실감하게 됐다.
<인더스트리 스탠더드>의 부고를 접한 후 며칠에 걸쳐 다른 잡지에 전화를 걸어봤다. 다들 똑같은 말을 했다. 원고가 잔뜩 쌓여 있고 글을 의뢰하더라도 예전 같은 고료는 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안락했던 우리의 삶이 폭삭 주저앉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며칠씩 레스토랑의 음식을 사다 먹고, 하와이로 휴가를 가고, 여덟 달에 한 번꼴로 노트북을 바꾸고, 유기농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열대우림 같은 마당을 일주일에 한 번씩 정원사의 손에 맡겼던 생활은 끝났다. 쉴 새 없이 현관을 들락거리던 택배기사와도 이별이었다. 살림의 규모를 대폭 줄여야 했다. 그렇게 한두 달이 흐르면서 일은 꾸준히 줄었고, 인터넷 거품이 조만간 다시 부풀어오를 가능성이 없다는 게 명백해졌다.
나는 칼라와 커피숍에서 마주앉아 지난 몇 달간 토막난 수입으로 생활하며 만지작거렸던 급진적인 생각들을 진지하게 의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돈을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닐까? 앞으로 포기하고 살아야 할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과연 우리가 이런 환경에서, 포장되어 팔리는 오락거리를 사고 테마파크의 놀이기구를 타고 쇼핑센터에서 기분전환을 하고 교통체증에 속수무책으로 갇히고 이메일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보다 더 나은 삶이 있지 않을까? 더 나은 방식을 찾아나서야 할 때가 된 게 아닐까?
우리는 세 가지 목표를 정했다.
1. 좀 더 주체적인 인생을 살자.
2. 도시 생활의 부조리한 무질서를 타파하고, 단순하고 솔직하고 명료한 방법을 모색하자.
3.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자.
적어놓고 보니 꽤나 근사했지만 이 목표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신년 연휴가 끝나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현실적인 필요와 도시의 지배력 앞에 무릎 꿇을 테고, 결국 카페인을 과다섭취하며 학교와 직장과 운전과 외식의 쳇바퀴를 돌고, 주말이면 어린이 카페에서 열리는 아이들 생일잔치에 불려다니는 기존의 삶으로 고스란히 복귀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누구의 입에서 먼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국 모든 걸 내버리고 라로통가로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라로통가는 쿡 제도에 속한, 남태평양의 외딴 섬이다. 양끝의 길이가 10킬로미터에도 채 못 미치며, 크기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약 1/5이다. 1994년에 라로통가에서 일주일을 지냈던 칼라와 나는 사람들의 느긋함과 울창한 열대우림, 그리고 천혜의 아름다움에 매료됐었다.
라로통가의 삶은 훨씬 단순했다고, 우리는 회상했다. 사람들은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았고, 그래서 작은 것에도 만족했다. 삶의 초점을 출세에 맞추지 않았고, 자연과 교감하며 음악과 음식과 춤과 수공예품을 나눴다. 눈부신 야생의 자연,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 아름다운 기후를 지닌 라로통가는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거기에 이국적인 매력까지 더해졌다. 대륙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남태평양 한복판에 에메랄드처럼 박힌 점 하나. 그곳 사람들이 “라로 타임”이라고 부르는 느긋한 속도에 맞춰 흘러가는 삶.
여행 작가인 아서 프로머(Arthur Frommer)는 라로통가를 타히티의 무레아와 보라보라에 이어 남태평양에서 세 번째로 아름다운 섬으로 꼽았고, 제임스 미치너(James Michener)는 아름다움과 날씨, 원주민의 친절함 등에서 타히티를 능가한다고 평했다. 어디로 고개를 돌리든 커다란 물건을 단 벌거숭이 탕가로아 신의 목상이 보였던 것 역시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탕가로아 신은 심지어 꽃 모양의 동전에까지 등장했다. 훨씬 늘쩍지근한 하와이 훌라에 익숙했던 19세기의 한 선교사는 엉덩이를 빠르게 돌리며 선정적인 몸짓을 하는 라로통가의 춤을 “단연코 음탕하다.”고 묘사했다.
라로통가에 다녀온 후 우리는 어쩌다 한번씩 농담처럼 그곳에 가서 살자고 얘기하곤 했다. 물론 열대의 섬은 현대인의 몽상에 흔히 등장하는 배경이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교통체증이 없고 빵빵대는 자동차 경적소리도 없고 매연을 뿜어대는 사륜구동도 없고 가벼운 접촉사고에 핏대 올리며 싸울 일도 없으며 번잡한 간판과 뚜뚜따따 시끄러운 라디오 토크쇼, 거리의 낙서, 그 밖에 도시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수많은 위해요소가 없는 목가적인 섬에서의 삶을 꿈꾼다. 하지만 대부분은 금세 머릿속에서 환상을 털어낸다.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간다고 쳐도 그다음엔 어떻게 살 건데? 일자리는 찾기 힘들고, 과일 따고 물고기 잡아서 먹고는 산다지만, 아무리 규모를 줄인다고 해도 살 집을 구하고 옷가지와 기타 필요한 것들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2003년 새해 첫 날 칼라와 나는 실제로 라로통가에 가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프리랜서니까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고, 라로통가라면 로스앤젤레스 외곽보다 생활비가 덜 들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똑같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생활이라도 파라다이스 같은 섬에서라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아이 봐주는 집에서 아이를 데려와 냉동 마카로니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식탁에 올려놓는 대신 망고와 빵나무 열매를 따고, 농부가 직접 키운 토란과 코코넛을 사고, 물고기를 잡아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느라 허덕이는 대신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살 수 있을 거야.
얘기를 할수록 말이 됐다. 나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라로통가에서 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인터넷은 있었다. 느리고 비쌌지만, 그래도 그걸로 일을 했다.)
섬 생활에 대한 글을 쓰고, 잘하면 그 글을 엮어서 책으로도 낼 수 있어. 일단 1년쯤 살아보고 괜찮다 싶으면 더 사는 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그럼 언제 떠날까?”였다. 서리나가 유치원을 마치는 6월이 적당할 것 같았다. 그때면 둘째(4월 1일이 예정일이었다.)도 칠십 일 정도 됐을 테니까. 그렇다면 준비할 시간은 다섯 달뿐이었다. 우리는 라로통가로 떠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1. 집 팔기
2. 자동차 팔기
3. 신생아를 섬에 데려가는 것에 대해 소아과 의사와 상담하기
4. 아기 여권 만들기
5. 두고 갈 물건들을 포장해서 창고에 보관하기
6. 앵무새와 토끼 맡아줄 사람 구하기
7. 서리나의 교육 문제 알아보기
8. 자동차 보험, 인터넷, 수도, 도시가스, 신문 끊기
그다음에는 챙겨갈 이삿짐 목록을 적었다.
아기 담요
아기 젖병
모유 유축기
자동차 시트
컴퓨터
컴퓨터 배터리
컴퓨터 게임
DVD 플레이어와 DVD
체온계
헤어드라이어
모자
모기장
모기 퇴치 스프레이
고무 젖꼭지
아기 놀이울
휴대용 프린터
휴대용 라디오
유모차
자동차나 아기 놀이울에 칠 햇볕 가리개
선크림(일반용과 유아용)장난감
우쿨렐레
비디오카메라
전압 변환용 플러그
무전기
시간이 흐르면서 목록은 점점 늘어났다. 계속 늘어났다. 도저히 더 단순하게 살겠다는 사람들의 목록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건 차라리 우리가 도망치려던 문명의 이기를 간추린 카탈로그 요약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목록에는 모기장, 선크림과 함께 파멸의 씨앗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쿡 제도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하려는 모험을 이미 시도했던 도시내기들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스물네 살이던 1920년에 남태평양으로 떠난 클리블랜드 출신의 로버트 딘 프리스비(Robert Dean Frisbie)가 쓴 책도 여러 권 읽었다. 프리스비는 몇 해 동안 여러 섬을 전전하다가 “소란스러운 문명 세계의 희미한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을 곳”에서 살겠다며 쿡 제도 북단의 푸카푸카 섬에 정착했다. 프리스비는 그곳에 교역사무소를 차려놓고 총 열두 권에 이르는 남태평양 전원생활에 대한 회고록과 소설의 첫 책을 집필했다.
말년에는 뉴질랜드의 선원이었다가 라로통가의 수도인 아바루아의 잡화점에 일자리를 구한 톰 닐(Tom Neale)과 친구가 되었다. 프리스비처럼 닐도 문명의 소음과 혼란을 벗어나 자기 방식대로 살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섬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프리스비(당시 만성호흡기 질환으로 거의 누워만 있었다)는 닐에게 조그만 무인도인 수와로우 섬에 2차대전 때 지어진 초소용 오두막이 있으니 거기서 살아보라고 권했다. 닐은 물고기를 잡고, 닭을 치고, 밤이면 내려와 텃밭을 파헤치는 멧돼지를 사냥했다.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섬 생활은 행복했고, 그는 그 섬을 들락날락하며 16년 동안 살았다. 그의 회고록 『혼자만의 섬(An Island to Oneself)』은 수와로우 섬에서의 생활을 담고 있다.
닐과 프리스비의 책들은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책을 읽고 나니 얼른 라로통가에 가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두 사람의 삶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다르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닐과 프리스비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건과 설비를 직접 만들고 수리했지만, 칼라와 나는 라로통가에서도 여전히 필수품과 사치품을 전부 외부에 의존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삶의 방식을 바꾼 게 아니었다. 그저 살아가는 환경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땐 그걸 몰랐다. 섬에 가서 느릿느릿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다 보면 우리도 어영부영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섯 달 동안 목록대로 일을 처리했다. 집을 팔고, 가구를 창고에 맡기고, 자동차를 팔고,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흥분되는 시간이었고, 다른 얘기는 거의 하지도 않았다. 밤에는 침대에 누워 계획과 희망과 두려움을 얘기했다. 친구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라는 얘기를 했다. 가끔은 친구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 땅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런데 한 가지, 그곳에 간 다음에 뭘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서리나는 파도가 밀려와 고인 물웅덩이에서 놀고 둘째가 아기용 그물침대에서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언덕과 해변을 산책하고 야자수 밑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것 외에는 딱히 계획이랄 게 없었다. 어쩌면 아이들의 놀이 계획과 학교와 그 밖에 스트레스를 높이는 온갖 사회적 책임들로 짜여진 정신없는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일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한테는 아무 계획도 없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어느새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친구인 리즈와 크레이그가 마지막 마무리를 도와주러 왔다가 현관에 늘어놓은 엄청난 짐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큼지막한 여행 가방이 여덟 개, 우리 둘이 하나씩 들고 탈 기내용 가방 두 개, 거기에 유모차와 휴대용 요람과 아기용 자동차 시트. 공항에 가려면 택시를 두 대 불러야 했다. 한 대에는 우리 넷이 탔고, 다른 한 대에는 짐을 실었다. (남태평양에서 사는 내내 이 짐들은 우리를 붙들어 매는 닻이 되었다. 칼라는 신발을 열세 켤레나 챙겨갔지만 정작 하나도 신지 않았다. 라로통가에서 산 2달러짜리 플립플롭을 신거나 아예 맨발로 다녔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바다 쪽으로 길이 나 있는 라로통가의 작은 공항에 내렸다. 공항이라고 해봐야 활주로 한 줄과 단층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건물에는 파란색과 흰색으로 “쿡 제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쓴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입국심사대 옆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꽃무늬 셔츠를 입고 우쿨렐레를 치며 우리를 환영했다. 한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에 솜털 같은 흰 구름이 흘러갔다.
나흘 동안 이어진 폭풍우를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커다란 밴을 구해서 우리도 타고 기적적으로 짐까지 전부 실은 다음, 집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 지낼 리조트의 방갈로로 향했다. 밴에 앉아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본 지 2분이나 채 지났을까. 우리가 품었던 섬에 대한 환상이 말끔히 지워졌다. 창밖에는 유조차와 정유소와 창고가 길게 이어졌고, 중심가는 자동차와 요란한 스쿠터로 길이 꽉 막혀 있었다. 어디를 보나 돌보지 않고 방치해놓은 꼴사나운 풍경이 펼쳐졌다. 녹슨 기름통, 허물어진 콘크리트 담장, 삐쩍 마른 몸에 혀를 빼문 채 돌아다니는 떠돌이 개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왔을 땐 이런 걸 봤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그때라고 없지는 않았겠지만 스쳐가는 관광객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살겠다고 와보니, 디젤 매연 냄새가 진동하는 밴이 지나는 길엔 창문이 떨어지고 지붕은 썩었으며 문짝 대신 찢어진 커튼만 휘날리는 집들이 즐비했다. 다섯 달 동안의 낭만적인 생각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제일 먼저 떠오른 본능적인 생각은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 그대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오픈항공권이 있었고, 그건 마음 내킬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었다. 두 번 다시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계획과 준비에 쏟은 지난 몇 달의 시간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짓이었다. 그대로 돌아갈 경우 우리가 믿게 된 꿈을 포기한다는 뜻이 된다는 게 가장 최악이었다.
작은 방갈로 앞에 내렸을 땐 하늘이 짙은 회색빛이었다. 짐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때맞춰 아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잠투정이 나서 칭얼대던 서리나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닷가에 가자고 보챘다.
라로통가에서 사는 게 끔찍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우리가 찾으려 했던 것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즐겁게 살고 싶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으로 뭘 찾으려는 건지 우리도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로스앤젤레스 탓으로 돌렸던 우리의 문제들은 고스란히 우리를 따라 라로통가 행 비행기에 올랐다. 알고 보니, 우리가 문제였다. 그건 지상낙원으로 떠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
(서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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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마크 프라우언펠더 Mark Frauenfelder
실리콘밸리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IT 전문 칼럼니스트, 블로거, 엔지니어, 디자이너. IT 버블이 꺼지면서 본격적으로 생태적이고 대안적이면서 즐거운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한 달 조회수 500만 건을 자랑하는 인기 블로그 보잉보잉닷넷(boingboing.net)의 설립자이자, 전 세계적인 DIY 운동을 주도하는 잡지 <메이크>의 편집장이다. <마사 스튜어트 쇼>와 <콜버트 리포트> 등에 출연했으며, <뉴욕타임스>와 <파퓰러 사이언스>, <할리우드 리포트>, <CNN>, <비즈니스2.0> 등에 글을 썼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족들과 함께 DIY를 실천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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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강수정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토스카나의 태양 아래서』『가짜 논리』『마지막 기회라니?』『길버트 그레이프』『신도 버린 사람들』『베아트릭스 포터의 집』『우리 시대의 화가』『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보르헤스에게 가는 길』『독서일기』『앗 뜨거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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