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잃어버린 퍼즐의 단서
이것은 광기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지극히 흥미로운 이야기는 런던 중심부 불룸스버리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있었던 만남에서 시작된다. ‘카페 코스타’라는 이름의 그곳은 신경정신학자들이 특히나 자주 들르던 곳이었는데, 모퉁이만 돌면 바로 런던대학교 신경정신대학원University College London Institute of Neurology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 저만치서 신경학자 한 사람이 사우스햄튼 대로에 들어서며 나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그녀가 내게 연락한 데보라 탈미이리라.
그녀는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실에나 틀어박혀서 지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결코 카페에서 기자와 수상한 만남을 갖는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의문스런 상황에 빠져 있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에 학자 느낌이 풍기는 젊은 사내와 동행하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 둘은 자리에 앉으며, 여자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데보라예요.”
“존입니다.”
그녀의 인사에 내가 답했고, 젊은 사내가 연달아 인사를 했다.
“저는 제임스라고합니다.”
“그건 그렇고, 가지고 오셨나요?”
내가 물었다.
데보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없이 탁자 위로 소포를 건넸다. 나는 소포를 개봉한 뒤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손으로 받았다.
“아주 멋지군요.”
지난 7월, 데보라는 우편으로 이상한 소포를 받았다. 소포는 사물함에 놓인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포에는 스웨덴의 예테보리Gothenburg 소인이 찍혀있었고, 두텁고 푹신한 포장봉투에는 누군가가 ‘내가 돌아오면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리라!’라는 글을 써놓았다. 하지만 소포를 보낸 이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소포에는 고작 42쪽에 불과한 책이 한 권 들어있었다. 그나마 그중 21쪽은, 그러니까 한 쪽 건너 한 쪽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깨끗한 공백이었다. 하지만 종이라든지 그림, 활자와 같은 책의 다른 부분들은 아주 비싼 돈을 들여 제작된 듯했다.
겉표지에는 몸에서 분리된 두 개의 손이 서로를 그리고 있는, 매우 정교하면서 괴기스런 그림이 새겨져있었다. 데보라는 한눈에 그 그림이 모리츠 코넬리스 어셔M. C. Escher가 제작한 석판화 <그리는 손 Drawing Hands>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책의 저자는 ‘조 KJoe K’였다. (카프카가 쓴 소설의 주인공인 조셉 K를 의미하거나, 어쩌면 농담joke이란 단어의 철자를 뒤바꿔놓은 게 아닐까?) 제목은 『존재, 또는 무 Being or Nothingness』였는데, 사르트르가 1943년에 발표한 『존재와 무 Being and Nothingness』를 넌지시 빗댄 것이었다. 판권정보, 도서번호 등이 적힌 페이지는 누군가가 일부러 가위로 깨끗하게 잘라 놓았기에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책 겉면에 붙어있는 스티커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주의! 책을 읽기 전에 먼저 호프스태터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읽어보기 바랍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데보라는 책을 쭉 훑어보았다. 암호 같은 문장들, 단어들이 오려진 페이지들… 추측컨대 책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는 퍼즐임이 분명했다. 데보라는 봉투 겉면에 적힌 ‘내가 돌아오면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리라!’라는 글을 다시 살펴보았다. 마침 동료 중에 스웨덴을 방문 중이던 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동료가 이런 소포를 보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포를 보낸 사람이 그 동료일 거라고 믿는 게 그나마 가장 합당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막상 돌아온 동료에게 묻자, 동료는 소포에 대해선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 데보라는 갑자기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을 하다가 자신 말고도 소포를 받은 이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포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신경학자들인가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상당수가 신경학자들인 건 맞지만, 그중에는 티벳에 있는 천체물리학자도 있고, 이란에 사는 종교학자도 있어요.”
“공통점은 하나같이 학자라는 거죠.”
함께 있던 제임스가 말했다.
그들 모두는 데보라와 똑같은 소포를 받았는데, 예테보리 소인이 찍힌 두꺼운 봉투에 담겨있었고, 봉투에는 마찬가지로 ‘내가 돌아오면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리라!’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소포를 받은 이들은 블로그와 인터넷게시판에 모여 책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썼다.
그중 누군가는 ‘어쩌면 이 책은 기독교적 비유로 해석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올렸다.
“수수께끼인 ‘내가 돌아오면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리라!’라는 구절만 보더라도 예수의 재림을 뜻하는 게 분명하다. 저자, 어쩌면 저자들은 책 제목을 『존재, 또는 무』로 살짝 바꿔서 사르트르가 쓴 『존재와 무』의 무신론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각심리학자인 사라 올레드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이 모든 게 결국에는 특정 종교집단이 꾸며낸 입소문 마케팅이거나 홍보전략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자들, 지식인들, 과학자들, 철학자들을 얼간이들처럼 보이게 하려는 수작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입소문 마케팅이라면 많은 이들이게 책을 보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책이 지나치게 비싼 돈을 들여 제작됐습니다. 이 홍보활동이 미리 계획단계부터 대상자들을 선별해서 그들이 이 의문투성이 책에 대해 온라인에서 떠들어대리라는 점을 애당초 계산에 넣어두었다면 모를까, 입소문 마케팅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흥미롭게도 바로 자신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포를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세심하게 선택된 이들이었다. 그들 사이에 뭔가 특별한 공통점이 있는 것도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공통점은 과연 무엇일까? 혹시 모두 이전에 같은 세미나에 참석했던 게 아닐까? 혹시 비밀스런 기업이 그들을 고위직으로 채용하려는 게 아닐까?
“굳이 말하자면 맨 먼저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채용되는, 그런 프로그램 아닐까요?”
소포를 받은 한 호주인의 의견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 퍼즐은 예테보리와 관련된, 매우 영리한 사람이나 조직이 고안해냈고, 영민한 학자들조차 풀지 못할 정도로 아주 복잡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퍼즐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애당초 퍼즐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단서가 누락됐거나. 누군가는 이런 의견도 올렸다.
“편지를 전등에 가깝게 비춰보거나 요오드 연기를 쏘이면, 특수잉크로 쓴 숨겨진 글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숨겨진 글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점잖은 학자들이 풀 수 없는 퍼즐이라면, 사립탐정이나 기자처럼 보다 거칠게 사건을 파고들 수 있는 이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할지도 몰랐다. 데보라는 주변사람들에게 수소문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끝까지 파헤칠 만한 끈질긴 기자가 누가 있을까?
몇몇 이름이 거론됐고, 그러던 중 제임스가 나를 추천했다.
“존 론슨은 어때?”
카페 코스타에서 만나고 싶다는 데보라의 메일을 받은 날, 나는 꽤 심각한 공황발작anxiety attack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나는 데이브 맥케이Dave Mckay라는 남자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그는 ‘지저스 크리스찬스’라고 불리는 호주 종교단체를 이끄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수장이었고, 얼마 전부터 생판 모르는 이들에게 한쪽 신장을 기증하고 회원들을 부추기고 있었다. 사실 데이브와 나는 처음에는 꽤나 잘 맞았다. 데이브는 별나긴 했어도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게다가 나는 그에게서 헛소리이긴 해도 재미난 기사거리를 계속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쩌면 일부 회원들이 신장을 기증하기로 결심하는 이유 가 집단에서 주는 압박감, 특히 데이브가 뿜어내는 위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데이브가 갑자기 폭발했다. 그는 내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원래 예정돼있던 긴급환자에 대한 신장기증을 즉각 중지해서 환자를 죽게 내버려둘 것이고, 그렇다면 환자의 죽음이 모두 내 책임이라는 메일 보내왔다.
나는 한편으로는 환자가 대단히 걱정됐지만, 동시에 데이브가 이런 광기어린 메일을 보내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쾌재를 불렀다. 좀더 솔직한 속내를 보이자면, 데이브의 반응은 아주 좋은 기사거리가 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나는 한 기자에게 데이브가 사이코패스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당시 나는 사이코패스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지만 데이브가 한 짓은 사이코패스라야 가능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 기자는 데이브가 내게 보낸 메일을 기사로 내보냈다. 며칠 후 데이브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나를 사이코패스라고 부른 건 나에 대한 명예훼손일세. 이미 법률자문을 받았고, 재판을 하면 아주 유리할 거라는 변호사의 답변을 받았네. 자네가 내게 앙심을 품었다고 해서 내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는 건 아니야.
데보라가 보낸 메일이 도착한 바로 그날, 내가 엄청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이 없었어.”
데이브의 메일에 망연자실한 나는 아내 엘레인에게 고백하듯, 아니 하소연하듯 얘기를 꺼냈다.
“그냥 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말하다보니 신이 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떠들어댔을 뿐이라고. 그런데 이제 모든 게 끝장났어. 왜냐고? 데이브 맥케이가 날 고소할 거거든.”
“무슨 일이야?”
아들 조엘이 방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왜 다들 소리치고 난리인데?”
“내가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단다. 한 남자에게 사이코패스라고 했다가 그를 열받게 했어.”
하는 수 없이 내가 설명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우리한테 뭘 어쩔 건데요?”
조엘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연신 질문을 해댔고, 우리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내가 “얘야, 우리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고 답변을 하기 전까지. 그 정도의 답변이면 될 줄 알았는데, 조엘에겐 여전히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했다.
“그 남자가 우리한테 아무 짓도 안 할 거라면 아빠는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건데요?”
“그냥 그 남자를 화나게 해서 걱정하는 거야. 나 때문에 사람들이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게 별로거든. 그래서 걱정하는 거지.”
“거짓말.”
조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말은 전혀 믿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아빠는 남들이 화나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내가 잘 알아요. 대체 나한테 뭘 숨기는 거죠?”
“그게 전부야. 숨기는 건 없어.”
나는 힘겹게 대답을 했다.
“혹시 그 남자가 우리를 공격하는 거 아냐?”
조엘은 다시 걱정을 드러냈고, 나는 좀더 확고한 대답을 했다.
“아냐! 천만에! 그럴 리가! 그런 일은 절대 없어!”
“설마 우리 가족이 위험한 거야?”
여전히 조엘은 내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고, 이젠 거의 고함 수준으로 목소리가 커졌다. 나도 더 이상 숨길 게 없다 싶어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조엘, 그가 우릴 공격하지는 않아. 그냥 나를 고소할 거야. 그저 내 돈을 가져갈 거라고.”
“맙소사…”
조엘이 안심을 한 건지 더 놀란 건지 구분이 안 가게 말을 맺었다.
곧장 나는 데이브에게 사이코패스라고 불러 미안하다는 메일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즉각 답장을 보내왔다.
고맙네, 존. 자네에 대한 내 생각이 아주 좋게 바뀌었네. 나중에 만나면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을 만큼 더 가까워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네.
그의 답장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가 또 다시 별것 아닌 일로 걱정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용서(?)에 한숨 돌리고, 읽지 않은 메일을 확인하다가 그제야 데보라 탈미에게서 온 메일을 발견했다. 그녀가 보낸 메일에는 그녀를 비롯해 전 세계 많은 학자들이 우편으로 수상한 소포를 받았다고 적혀있었다. 내 책을 읽은 한 친구가 내가 특이한 추리사건에 흥미를 느낄 만한 언론인이라고 추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 사건은 이상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나도 흥미로워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당신이 꼭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건은 마치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 또는 가상현실 게임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안에서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소포를 내게 보내면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학자로서의 호기심이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이 사건을 맡아준다면 좋겠습니다.
카페 코스타에서 데보라는 책장을 넘기며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요점만 말하자면요, 누군가가 아주 의문스런 방식으로 특정 학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요. 내가 보기에 이 일은 한 개인이 꾸며낸 일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공을 많이 들인 것 같아요. 책에 뭔가 단서가 있는데, 도무지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요. 이 책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하지만, 제가 뭔가를 수사하는 데에는 원체 재능이 없어서요.”
“그렇군요…”
내가 답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한동안 나는 침묵한 채 심각하게 책을 살펴보았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건을 맡아보기로 하지요.”
이제 나도 이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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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존 론슨 John Ronson
영국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가이언> <타임아웃>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이며, BBC방송국에 여러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곤조 저널리즘’(gonzo journalism. 취재대상에 적극 개입, 1인칭 시점으로 기사를 서술하는 방식) 스타일로 유명한 논픽션 작가다. 그가 집필한 『그들: 극단론자들과의 위험한 여정 Them: Adventures with Extremists』과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 The Men Who Stare at Goats』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은 조지 클루니가 제작 및 주연을 맡은 동명의 블록버스트 영화(국내 개봉 제목은 <초(민망한)능력자들>로 만들어졌다. www.jonrons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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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차백만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경영컨설팅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한 뒤 안철수연구소, CJ푸드시스템 등에서 전략기획과 신사업개발을 담당했다. 현재 바른번역에 소속돼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전략의 제왕』『넷 마피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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