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길과 속도
세상과 만나는 통로
한 인간이 일생 동안 오래 머무르는 곳을 순위로 매긴다면 첫째는 일터, 둘째는 집, 셋째는 길일 것이다. 아침에 일터로 가기 위해,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길이다. 재택근무로 방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대부분은 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간다. 노점상과 택시운전사는 길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길은 정치공간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임금은 종로로 걸어나가 백성의 삶을 보듬었다. 죽음의 예식을 치르는 공간도 길이었고, 승리를 축하하는 행렬도 길을 따라 벌어졌다. 지금도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이 가장 먼저 나서는 곳이 길이고, 분노와 항거, 열광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분출되는 곳도 길이다.
검은 힘과 주먹의 각축장도 길이다. 영토 싸움은 길을 경계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길은 조화롭고 안정된 곳이 아니라 늘 갈등이 잠복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갈등을 통제하고 억압하면 공포의 도시가 된다. 말끔히 정돈된 옛 사회주의 도시의 이면에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불만이 숨어 있었다.
또한 길은 상업공간이다.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거상 임상옥>을 본 분들이라면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짐을 이고 엄동설한에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는 상인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에게 길은 유유자적 거니는 곳이 아니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생존의 현장이었다. 지금도 경제가 어려우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곳이 시장이다.
길이 만나 거미줄처럼 엮인 연결망이 된다. 중세 유럽의 보부상이 다니던 길은 대륙 내의 상권을 잇는 안전한 도로망이 되었다. 마차가 자주 다니는 길은 포장되었고, 연결망의 거점들은 대도시로 성장했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몽골제국도 초원을 질주했던 말의 궤적으로 연결되었다. 칭기즈칸은 이 망을 이용해 제국의 곳곳에 신속하게 전령을 하달했다. 온라인 통신망의 전신前身이다.
무엇보다 길은 나와 세계가 만나는 통로다. 집이 도시를 향해 드러나는 곳, 도시와 집이 맞닿는 곳, 무목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길이다. 비록 말을 건네지는 않더라도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가며 서로의 모습, 사고방식, 문화적 암호를 공유한다. 길을 없애면 소통의 공간, 같음과 차이를 느끼는 장소, 기쁨과 분노를 표출하는 마당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길은 땅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한다. 길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땅의 값이 결정된다. 실상 서울 같은 초고밀도 도시에서 건축물의 가치는 창의적 형태나 혁신적 기술보다는 땅값에 좌우된다. 심지어 재개발을 기대하는 곳에서는 건축물의 가치는 거의 인정하지 않고 땅값만 계산한다. 「건축법」에서는 필지筆地로 나눈 토지를 대지垈地라고 하고, 2m 이상이 도로에 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길이 없는 대지는 눈먼 땅, 즉 맹지盲地가 된다.
건축가가 대지에 집을 짓고 그 집들이 모여 입체적인 길이 완성된다. 큰 건축이 바로 도시이고, 작은 도시가 곧 건축이다. 도시 건축을 어떻게 짓는가에 따라 어떤 길은 걷고 싶은 길이 되고 어떤 길은 황량한 곳이 된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건축가들은 개인의 집을 짓는 것과 길을 만드는 것을 하나라고 보았다.
네 단계의 속도
이 책은 19개의 작은 이야기를 ‘길-속도-상업건축’이라는 3개의 축으로 엮었다. 바퀴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오래된 이동수단이다. 마찰력을 줄이도록 바퀴와 축을 결합해 만든 수레의 등장은 역사의 일대 혁신이었다. 서양역사가들에 따르면 바퀴는 기원전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옹기장이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발견된 3천5백 년 전의 도기에는 수레가 그려져 있었고, 중국에서도 이미 2천 년 전에 수레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수레와 길은 불가분의 관계다. 고대 중국 도시들은 도로 폭을 수레의 대수에 따라 정했고, 동아시아의 다른 도시들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조선시대 종로는 수레가 7대 정도 지나갈 수 있는 대로大路로 규정해 56척尺(약 17.48m)의 폭으로 계획했다. 반면에 대로 이면의 뒷골목은 마차를 피해 서민들이 다니는 곳이라 해서 피맛골이라 불렀다. 수레의 이동이 빈번해지자 들길과 언덕길이 도로로 탈바꿈했다. 기동력과 운송력이 높아지자 전쟁의 전략과 전술도 달라졌다. 사람과 상품의 이동과 교류가 촉진되고 도시는 번성했다.
19세기 초 유럽에서 철도가 교통수단이 되자 철도역사驛舍는 도시의 새로운 관문이 되었고, 역 앞 광장은 도시의 현관이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길이 뻗어나가고 상점가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동차만큼 도시를 흔들어놓은 ‘기계’는 아직까지 없었다.
기존의 도시는 새로운 발명품인 자동차를 수용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는 도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외곽의 전원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가 건설되자 교외도시는 포도송이처럼 불어났다. 도시 내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차도와 인도가 분리되고 주차장이 생겼다. 법으로 주차장을 의무적으로 규정하자, 땅값이 비싼 도심에서 주차장은 지하로 내려갔다. 중산층이 떠난 도심에는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이 남았다. 세금이 줄어들고 재정이 악화되자 도심이 더욱 침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더 큰 문제는 고속도로와 교외도시를 이상적인 모형으로 받아들인 제3세계 도시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화석에너지가 고갈되는 미래에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곳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일 것이라고 한다. 건축물과 운송수단이 타격을 받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화에 의존했던 먹을거리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도시의 수평적 변화를 촉진시켰다면, 승강기는 수직적 변화의 주역이었다. 1857년 최초의 승객용 승강기를 선보였을 때만 하더라도 승강기는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처럼 상류층을 위한 기호품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계 상자에 불과했던 승강기는 철골기술과 함께 마천루를 현실화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떠올랐다. 거장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는 파리의 구도심을 허물고 마천루를 세울 것을 꿈꾸었지만, 대서양 건너편 뉴욕에서 자신의 꿈이 선점되자 맨해튼의 마천루를 격렬히 비판했다. 한편 르 코르뷔지에가 유럽의 역사도시에서 이루지 못한 꿈은 제3세계에서 현실화되었다. 하늘로 마천루가 치솟으면서 지상의 여유로운 땅은 녹지와 공원이 되었다. 산업화 도시에 염증을 느꼈던 사람들은 미래 도시의 대안이라고 반겼다. 하지만 높은 건물 아래의 길은 점차 일상의 삶과 단절되어 갔다.
수레, 자동차, 승강기가 기계적 도구라면, 온라인은 보고 만질 수 없는 매체다. 수레나 자동차의 속도와는 차원이 다른 초공간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미래의 도시는 장소를 초월하는 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더 이상 일터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재진행 중인 모바일 정보혁명을 지켜보면 이러한 예측이 들어맞지 않는다. 심지어 온라인의 발달로 오프라인의 활동이 빈번하고, 길과 장소의 중요성이 오히려 커지기도 한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은 가상공간에 만족하지 않고 길에서의 소통을 원하고 반대로 오프라인의 활동이 온라인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현재진행형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대립과 결합은 미래의 우리 도시와 건축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길과 상업건축
상업은 재화와 서비스를 사고파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동네 시장에서 채소와 식료품을 사고파는 것부터, 첨단무기와 비행기를 국제적으로 거래하는 것까지 모두 상업활동이다. 변호사가 법률을 서비스하는 것도,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는 것도 상업활동이다. 상업은 가장 오랜 삶의 수단 중 하나다. 어떤 역사학자는 15만 년 전부터 상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상업화는 도시화와 동의어이며 상업은 자본주의의 요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변호사사무실, 건축사사무실, 금융시장처럼 무형적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상업공간보다는 상점과 시장, 백화점과 쇼핑몰, 식당과 커피숍처럼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고 소비하는 좁은 의미의 상업공간에 초점을 두었다.
상업건축은 주거건축과 함께 도시 건축의 양대 축을 이루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건축사나 건축이론 양쪽 모두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저급하게 취급되었다. 질펀한 시장바닥에서 고함치며 호객하는 사람들,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싸우는 사람들, 쏜살같이 밥 나르는 ‘밥집 아줌마’,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장은 결코 고상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업을 천시한 유교적 전통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상업자본이 우리 도시의 경관을 지배한다. 점차 커지고 있는 복합 상업건축은 동네의 작은 상점건축을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다. 상업과 문화가 충돌하면서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을 때 도시는 활기를 띤다. 과연 우리의 도시에서 상업은 문화를 자극하고 있는가?
섣부른 해답을 내놓기 전에 길-속도-상업건축, 이 3개의 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변화의 흔적을 여행하기로 하자. 상업이 발달했던 중세도시는 왜 좁고 꾸불꾸불한지, 성스러운 종교건축과 시장이 어떻게 공존했는지, 아케이드와 백화점은 도시에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초대형 쇼핑몰은 도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피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 여행에서 돌아오면 도시에 숨어 있는 관성과 변화의 동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상업과 문화의 충돌과 새로운 도시 건축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 탐침할 시간이다.
(프롤로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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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김성홍
“한국 건축의 숨은 힘은 크고 화렿나 것과 작고 소박한 것은 사이, 그리고 다양한 것들의 경계에 있다고 믿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 중간지대의 중간건축이 살아 꿈틀거려야 일상의 삶도 풍성하고 도시 경쟁력도 높아진다고 생각하고 이를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사람이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6년 미국 워싱턴주립대 풀브라이트 연구교수, 2007~2009년 서울시립대학교 기획연구처장?산학협력단장을 지냈다.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한국관 부(副)커미셔너를 맡았고,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는 ‘한독 퍼블릭 스페이스 포럼’을 기획했다. 2007~2010년에는 ‘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건축전’을 총괄기획하였다. 『Megacity Network: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도시 건축의 새로운 상상력』『On Asian Streets and Public Space』(공저), 『Future Asian Space, Projecting the Urban Space of New Asia』(공저, 출간예정) 등 도시와 건축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글을 국내외에 발표했다. http://sonoma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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