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안, 그리고 탈출
이 두 사람이 문인공화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남달랐기에 둘의 분쟁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 다툼의 관객 역시 유명인들이었으니, 지금에라도 그 일을 신중하게 검토해볼 만하다.
조지 버크벡 힐, 『데이비드 흄이 윌리엄 스트라한에게 보낸 편지』(1888)
1766년 1월 10일 저녁, 영국해협은 폭풍우가 휘몰아쳐 눅눅하고 추웠다. 달갑지 않던 폭풍으로 항구에 발이 묶여 있던 여객선 한 척이 그날 밤이 되어서야 뒤뚱거리며 출발했다. 프랑스의 칼레에서 영국의 도버로 가는 여객선이었다. 승객 중에는 3주 전 파리에서 처음 만난 영국인 외교관과 스위스인 망명객이 있었다. 망명객은 꼬리가 돌돌말린 갈색의 작은 애완견 쉴탕[영어로는 ‘술탄’]과 함께였다. 영국인 외교관은 배 멀미에 시달린 나머지 객실에 머물러 있었다. 망명객은 밤새 갑판에 있었다. 추위로 온몸이 꽁꽁 언 선원들도 그의 강건한 체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여객선이 침몰했다면,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두 명도 영국해협 밑바닥으로 함께 가라앉았을 것이다.
외교관은 데이비드 흄이었다. 귀납법, 인과론, 필연성, 개인의 정체성, 도덕, 유신론 등 흄이 철학에 남긴 업적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르네 데카르트, 임마누엘 칸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애덤 스미스의 동시대인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흄은 근대 경제학의 길을 열었으며, 역사편찬 방법 역시 근대화했다.
망명객은 장-자크 루소였다. 루소의 지성과 업적도 누가 더 훌륭하다 말하기 힘들 만큼 대단했다. 루소는 정치학, 문학, 교육학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루소의 자서전 『고백』은 충격적일 만큼 독창적인 작품으로, 이후 비슷한 작품이 수없이 쏟아졌지만 여전히 자기를 드러내는 화법과 예술적 전개의 표본으로 일컬어진다. 교육문제를 다룬 『에밀』은 아동 양육법을 둘러싼 논쟁의 방향과 더불어 아동기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정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저서 『사회계약론』은 세대를 거쳐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루소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감정을 읽고, 사회나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타고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배경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흄은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의 비서직을 마치고 파리에서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파리에서 보낸 26개월의 비서 생활은 그야말로 황홀한 시간이었고, 어쩌면 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산실이었던 파리의 살롱을 주름잡았고, 지적 능력과 품위로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으며,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인품에 대한 찬사로 ‘사람 좋은 데이비드’( le bon David)라고 불렸으니 말이다.
흄이 불행에 처한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푼 이유는 타고난 본성이 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저서와 팸플릿이 종교계와 정치계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탓에 당시 거주하던 프랑스에서 쫓겨나 조국 스위스로 도피했다. 그러나 결국 그곳에서도 성직자들이 선동한 군중의 돌팔매질을 받고 쫓겨나게 됐다. 루소의 펜 끝에서 나오는 치명적인 파괴력 때문에 이 위험인물을 가까이 두려 하는 곳은 없었다. 흄은 이런 53세의 망명객을 위해 영국에 은신처를 마련해줘야 하는 무거운 짐을 떠맡은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루소는 사방에 적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정부가 자신의 자유를 위협하고 해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한 루소는 어느 곳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쫓겨 다녀야 했다. 결국 박해 받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며 심지어 명예를 상징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생각은 자신이 오래 전부터 해온, 속세에서 떨어져 살겠다는 결심과 잘 맞았다. 루소는 이런 고독한 삶에서도 우정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우정은 명료해야 했다. 그러니까 루소는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우정을 원했다. 동등한 두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하고, 일체의 속박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우정을.
하지만 루소는 지금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조차 모르는 나라에서 오직 흄에게 의지해야 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전직 하녀로서 30년간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변함없는 동반자 테레즈 르바쇠르는 스위스에 홀로 남겨뒀다. 루소는 르바쇠르를 몹시 아꼈으며, 함께 있지 못할 때면 언제나 간절히 그녀를 찾고 그리워했다. 하지만 다행히 쉴탕이 곁에 있었다. 쉴탕에 대한 루소의 애정은 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딱 한 번 개를 길러봤던 흄은 이렇게 말했다. “그 동물에 대한 루소의 애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며, 감히 말로 표현할 수도 없소.”
성인이 된 루소는 이 2등 피조물(second creature)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유럽의 궁정에 파리 문화를 전하는 특파원임을 자임했던 프리드리히 그림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하건대 루소는 자신의 평화로운 안식을 방해할 친구와 함께 떠났다.” 늘 루소 곁을 지켰던 쉴탕처럼, 끊임없이 루소를 따라다니며 으르렁거리게 될 이 성가신 친구는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으며 언제든 자신을 배신해버릴 믿을 수 없는 곳이라는 루소의 뿌리 깊은 믿음의 계기가 됐다.
1월 11일 정오, 여객선은 도버에 도착했다. 영국 땅을 밟고 선 루소는 흄의 목을 껴안은 채 아무런 말 없이, 눈물범벅된 얼굴로 흄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런던에 도착하자 흄은 형에게 편지를 썼다. “서로 존중하고 우정을 나누며 평생 루소와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유쾌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루소나 저나 논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흄은 파리에서 당대의 위대한 지식인들, 뛰어난 살롱 여주인들과 친분을 나눴다. 그러나 삶의 모든 분야에서 당대의 관념, 제도, 문화에 도전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급진적 사상가들 중에서도 루소만큼 급진적인 인물은 없었다. ‘사람 좋은 데이비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데려온 이 인물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2. 순수한 영혼
조물주의 손에서 태어난 순수한 영혼
T. S. 엘리엇, 『작은 영혼』(1929)
“내 인생 최초의 불행은 바로 나의 탄생이었다.” 루소는 『고백』에서 이렇게 말했다. 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계공 이자크 루소와 칼뱅교 목사의 딸 쉬잔 베르나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쉬잔은 루소가 태어난 지 10일 만에 숨을 거뒀다. 이자크는 재혼하기는 했지만 평생 아내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갓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서 쉬잔의 모습을 봤던 이자크는 루소를 안을 때면 언제나 지독한 슬픔을 느꼈다. 아버지가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말을 꺼냈을 때 루소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50년이 지난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요. 아버지. 하지만 눈물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을 텐데요.”
엄마를 잃은 지독한 상실감, 거기서 비롯된 분노와 애정결핍은 루소의 어린 시절에 큰 정신적 충격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성인이 된 루소가 남을 못 믿고 누구든 언젠가 자신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 믿으면서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망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채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에 비통해하며 자신의 내면세계에만 몰두한 것도 놀랍지 않다. 루소는 외부세계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가 더 믿음직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루소는 자신을 둘러싼 사실에 대해서는 틀릴 수 있을지언정, “내가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틀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소는 건강하지 못했다.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질병이 평생 루소를 괴롭혔는데, 바로 요도의 선천적 기형이었다. 그래서 소변을 볼 때마다 언제나 더디고 힘겨워했으며, 일을 끝내고도 방광이 여전히 반쯤 차 있는 느낌이었다.
엄마 없이 자란 루소는 열 살이 되던 해 아버지마저 잃었다. 프랑스인 퇴역 대위와 말다툼을 하던 이자크는 시내에서 칼을 빼들었고, 그 프랑스인은 이자크를 고소했다. 당시 제네바의 법률에 의하면 시내에서 칼을 빼드는 것 자체가 범죄였다. 감옥에 가는 대신 제네바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자크는 루소를 삼촌한테 보냈다. 삼촌은 루소와 자기 아들 베르나르를 시골에 있는 목사에게 보냈고, 둘은 그곳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훗날 루소는 이 시기에 전원 속에서 더 없는 행복을 맛봤다고 회상하며, 자신이 평생 몰두한 주제인 우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시골생활의 단순함을 통해 나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바로 우정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루소는 그곳에서 자신의 성적 기질을 발견하기도 했다. 루소가 말썽을 피울 때면 목사의 여동생이 체벌을 가했는데, 그녀의 손길에서 성적 흥분을 느꼈던 루소는 일부러 다시 잘못을 저지르곤 했다.
제네바는 성벽과 산맥으로 둘러쌓인 인구 2만의 작은 도시국가였다. 주변의 강력한 가톨릭 군주국들이 호시탐탐 위협했지만, 제네바는 이 이중의 보호막 덕택에 칼뱅주의의 색채를 띠는 특유의 문화와 분위기를 간직할 수 있었다. 1541년 장 칼뱅이 신의 섭리를 구현하기 위해 교회헌법을 구성하고 작성한 곳도 제네바로서, 루소는 늘 자신을 ‘제네바의 시민’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루소의 친구들도 루소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위대한 시민에게’라고 적었다). 이런 제네바에서의 유년 시절은 루소의 사상, 특히 정치, 민주적 참여, 개인의 책임에 대한 사상적 큰 틀의 바탕이 됐다.
하지만 1728년 3월 14일 일요일, 루소는 세 번째로 가슴 아픈 이별을 겪고 유년기와 확실히 작별하게 된다. 당시 열여섯 살이던 루소는 조각가 도제수업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성벽 밖을 거닐던 루소는 멀리서 성문 닫히는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는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뛰었지만 스무 발자국 정도 남겨 놓고 성문의 다리가 올라가버리고 만다. 벌써 두 번이나 성문을 넘다가 잡힌 적이 있었던 루소는 스승에게 돌아가지 않고 제네바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사촌 베르나르가 먼 길을 떠나는 루소를 위해 작은 칼을 비롯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겨줬다. 삼촌과 숙모가 베르나르를 통해 물건을 보낸 이유는 말썽만 피우는 조카를 멀리 쫓아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루소는 사보이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 루소는 안시에서 자기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여인을 소개받는다. 서른이 채 안된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 남작부인이 바로 그 여인으로서,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매혹적인 모습’의 스위스인이었다. 남작부인은 개신교의 영혼들, 특히 잘생기고 젊은 남자의 육신 안에 자리잡은 영혼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남작부인은 집 없이 떠도는 루소를 돌봐줬고, 둘은 5년이 지나기 전에 연인이 됐다. 그 와중에 남작부인은 가톨릭 신부의 충고로 루소를 토리노로 보냈다. 그곳에서 루소는 예비 교리자들을 위한 수도원 시설에 잠시 머물며 가톨릭으로 개종했고(이때의 일화가 상세히 기록된 『고백』에 따르면, 당시 루소는 남성들로부터 원치 않는 성적 관심을 받곤 했다), 수도원을 나온 뒤로는 하인 일을 하게 된다.
남작부인을 ‘엄마’로 부르던 루소, 루소를 ‘아기’로 부르던 남작부인의 관계는 1740년 4월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온 루소는 남작부인이 지방 고위관리의 아들인 젊은 청년과 있는 것을 발견한다. 루소는 그 청년을 “멀대 같이 키가 크고 창백한 얼굴에, 허우대는 멀쩡하나 멍청하게 생긴 얼굴”이라고 묘사했다. 루소에게 이 사건은 또 하나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루소는 리옹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처음 계몽사상가들을 만나게 된다. 계몽사상가란 이성을 통해 합리적 질서를 구축하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군의 과학자, 예술가, 작가, 정치인 등을 일컫는 말로서 프랑스 계몽주의를 주도한 사람들이다. 당시의 통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던 계몽사상가들은 전통과 권위, 특히 종교적 권위를 신뢰하지 않았다. 계몽사상가들은 자신들이 느슨하지만 국제적으로 통합된 진보의 문화를 일구는 한 축이라고 생각했다. 루소는 ‘마블리 씨’로 불리던 리옹의 주임감독관 장 보노의 가정교사로 일했는데, 보노의 두 동생(가브리엘 보노 드 마블리,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약)도 계몽사상가였다. 이 가족과의 만남을 통해 루소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제1장 전문, 제2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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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데이비드 에드먼즈·존 에이디노
David Edmonds·John Eidinow
각각 옥스퍼드대학교와 곤빌앤카이우스칼리지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BBC에서 시사 다큐멘터리 전문작가와 프로듀서로 만난 두 사람은 2001년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두 위대한 철학자 사이에 벌어진 10분간의 논쟁』(한국어판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은 왜?』)을 발표하며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이후 『바비 피셔, 전쟁에 나가다: 소련인들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체스게임에서 어떻게 졌는가?』(2004)와 『루소의 개』(2006) 등을 발표하며 ‘위대한 두 인물의 싸움’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논픽션 장르를 개척해냈다. 현재 에드먼즈는 개방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동료 철학자 나이젤 와버튼과 함께 <철학의 짜릿함>(Philosophy Bites)이라는 팟캐스트 연재물(철학자들과의 인터뷰)을 제작해 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에이디노는 BBC를 그만둔 뒤 프리랜서 인터뷰 작가이자 컬럼니스트로 BBC월드서비스와 라디오4에서 여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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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임현경
학부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한 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연극무대에 섰으며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한 뒤 전문번역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번역가들의 네트워크 ‘컨트라베이스’(www.contrabase.net)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불안의 늪에서 행복을 꽃피워라』『속도에서 깊이로』『마즐토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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