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떠나가신 드니 게즈 선생님을 추모하며
이세욱(옮긴이)
수학자가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이를 뵙고 그런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일단 이메일을 보내어 뵙고 싶다는 뜻을 알렸다. 언제든 기꺼이 만나겠다는 대답이 왔다. 먼저 그이가 한 것처럼 에라토스테네스의 자취를 찾아 이집트를 여행하고 번역 작업을 어느 정도 진행한 뒤에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소설이 하짓날 시에네오늘날의 아스완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2009년 6월에 이집트를 여행했다. 이듬해 봄, 소설과 관련된 문헌들을 두루 읽고 자료 조사를 마친 뒤에 이제는 선생님을 뵐 때가 되었다 싶어서 다시 메일을 보냈다. 며칠이 지나도록 답장이 없었다. 프랑스의 다른 작가에게서 들은 얘기에 따르면, 드니 게즈 교수는 대학 사회에서 권위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앞장서온 분이고 모든 학생을 성심으로 대하며 열정을 다해 가르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라면 번역자의 인터뷰 요청을 모른 체할 리가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다시 메일을 보냈다. 역시 답장이 없었다. 며칠 더 기다렸다가 프랑스 쇠유 출판사에 연락을 해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어느 날,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인터넷판을 열자 낯익은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Denis Guedj, se soustrait.
기이한 문장이다. 드니 게즈가 감해졌다 또는 뺄셈의 뺌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가 유명한 수학자가 아니었다면 그게 사망 소식을 전하는 문장임을 단박에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기사를 읽어보니 짐작한 대로였다. 수학자이자 작가이자 <리베라시옹>의 칼럼니스트인 드니 게즈가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오보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신문과 잡지들을 검색해보았다. 어디에나 그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내가 스승으로 여기며 그저 몇 시간 동안이라도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이가 이제 세상에 없다는 뜻이었다. 최선은 선의 적이라고 했던가. 더 준비가 된 뒤에 뵙겠다고 시간을 끌다가 만남 자체를 놓쳐버린 것이었다ㅡ여기에서 얻은 교훈 하나, 스승은 우리를 마냥 기다려주시지 않는다.
드니 게즈는 1940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세티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의업에 종사해온 유대인 가문이었다. 알제리에서 중, 고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프랑스에서 출간되는 포켓판 책들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었을 정도로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그는 ‘증오와 인종차별과 압제의 땅’ 알제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더 정의롭고 자유로운 땅을 갈망했다. 그래서 바칼로레아에 합격하자마자 파리 쥐시외 대학오늘날의 파리6대학에 진학했다. 비록 바칼로레아의 수학 점수는 20점 만점에 10.5점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수학에 내재해 있는 ‘정묘한 사고 체계, 크리스털과도 같은 순수성’에 매력을 느낀 때문이었다.
수학의 역사에 관한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혼자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가고 있던 드니 게즈는 1968년 5월 혁명을 계기로 대학 교육을 혁신하는 모험에 동참했다.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수법, 불합리한 시험제도, 불안정한 고용 제도,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학생운동의 결과로 프랑스 대학에 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뱅센실험대학센터가 창설된 것도 그런 사회적 맥락에서였다. 1968년 가을, 드니 게즈는 철학자 프랑수아 샤틀레,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역사학자 장 부비에, 지리학자 이브 라코스트, 극작가 다리오 포 등과 함께 이 실험대학의 설립에 참여했고, 이듬해 수학과를 창설했다. 후에 파리8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이 대학에서 그는 세상을 떠나기 일곱 달 전까지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드니 게즈 교수는 여러 가지 점에서 특별한 교육자였다. 우선 68년 5월 혁명의 대의를 저버리지 않고 죽는 날까지 민중 교육의 실천자로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인으로 살았다. 대학을 모든 대중에게 개방해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하면서 직장인들을 위한 야간 강좌를 열기도 하고 뱅센 숲의 매춘 여성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반면에 대학의 행정 기구나 관리 조직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는 ‘영원한 반골’의 면모를 보였다.
둘째로 그는 자연과학을 인문학이나 사회학이나 예술과 결합하는 매우 혁신적인 강의를 했다. 그가 맡았던 강좌들의 제목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과학의 기능’, ‘환경보호와 과학’, ‘과학의 권력’, ‘자본주의는 변할 것인가, 사라질 것인가?’ 말년에는 시나리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파리8대학 영화학과에서 시나리오 작성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는 지식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전인적인 지성이었다.
셋째로 그는 매우 헌신적인 교육자였다.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파리8대학 파스칼 뱅자크 총장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주 매력적인 분이었고 우리를 곧잘 감동시키던 동료였다. 교육자와 연구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했고, 학생들과도 의례적인 만남을 훨씬 넘어서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예술가, 작가로서도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다. 때로는 태도가 너무나 솔직해서 동료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그를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는 ‘관대함’이다.” <리베라시옹> 2010년 4월 28일
수학자이자 과학사 교수였던 드니 게즈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수학이나 과학사의 중요한 주제들을 가지고 멋진 픽션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그는 라루스 테마 백과사전의 수학 부문을 맡아 집필하거나 「리베라시옹」에 수학 칼럼을 기고ㅡ1994년에서 1997년까지ㅡ하거나 『수학 편지』라는 책을 쓰는 등 전문 지식을 대중화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좋아했던 것은 고정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바를 픽션의 힘을 빌려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매체는 어느 것이든 상관없었다. 소설의 형태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싶으면 소설을 썼고, 말과 동작으로 관객에게 직접 보여주는 낫겠다 싶으면 연극을 만들었으며,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싶으면 영화를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매체의 종류가 아니라 수학과 과학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고정된 지식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는 1987년에 첫 소설 『자오선』을 발표해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소설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직후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미터법이 탄생되는 과정, 다시 말해서 지구 경선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를 천만 분의 일로 나눈 것을 길이의 단위로 확정하기까지 두 천문학자 들랑브르와 메섕이 겪은 파란만장한 모험을 다룬 작품이다. 드니 게즈는 과학사의 이 대사건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루었다. 처음엔 박사 학위논문을 썼고 다음에는 허구를 가미하여 시나리오를 썼다. 이 작품은 공모에 출품하여 최우수시나리오상을 받을 만큼 완성도가 높은 것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영화 제작자를 만나지 못했다. 드니 게즈는 대중과 만나지 못할 운명에 놓인 그 모험담을 다시 소설로 각색하여 세상에 내놓았다ㅡ이 작품은 나중에 『세계의 측정』이라는 제목으로 개작되었다. 그럼으로써 과학이 문학을 만들어낼 수 있고 꿈과 감동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1998년에 나온 두 번째 소설 『앵무새의 정리』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수학의 역사라는 더욱 어려운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과학에 관심을 갖는 작가들이 거의 없는 프랑스에서는 무모함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만 수십만 부가 팔리고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드니 게즈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과학적인 주제도 잘 다루기만 하면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쾌거였다.
이듬해에는 『제니스 또는 전죽箭竹』이라는 짤막한 소설이 나왔다. 제니스라는 꼬마가 세상을 알아가면서 한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형이상학적으로 성찰한 작품이다. 그 뒤로 드니 게즈는 전작들의 야심을 능가하는 새로운 과제에 도전했다. 기원전 3세기에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둘레를 측정해낸 과학사의 대사건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온전히 재현하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도서관에서 고대의 문헌을 샅샅이 뒤지는 조사 작업이 이 년 넘게 계속되고, 이집트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자취를 찾는 답사 작업이 이어졌다. 과학과 역사를 결합하고 역사의 공백을 상상력으로 메우는 그 야심만만한 도전의 결실은 2003년 네 번째 소설 『머리털자리』로 나타났다.
헬레니즘 절정기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에라토스테네스
과학사 연구자들은 왜 헬레니즘 시대의 알렉산드리아에 주목하는가?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를 정복한 뒤에 부하들을 시켜서 건설한 도시다. 대왕은 도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수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고 이곳을 수도로 삼음으로써 서양 세계의 중심 도시로 부상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했던 대로 이 도시를 무역, 도시계획, 건축, 문화, 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를 갖추게 되었고, 널찍한 도로들이 격자를 이루고 있는 도시 곳곳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묘와 세라피스 신전을 비롯한 대건축물이 들어섰으며, 파로스 섬에는 세계7대불가사의의 하나인 등대가 건설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으뜸가는 자랑거리는 대도서관과 거기에 딸려 있는 연구기관인 무세이온이었다. 세계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겠다는 계획에 따라 각지로 특사를 파견하여 책들을 모으고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을 수색하여 책이란 책은 모조리 거둬들였다. 그렇게 해서 대도서관은 오십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보유하게 되었고, 에우클레이데스, 에라토스테네스, 아르키메데스 같은 당대의 천재들이 무세이온에 머물면서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수학, 철학, 문학, 생물학, 약학, 공학 등을 두루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연구 센터가 마련된 것이었다.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이 헬레니즘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삼세와 사세 시대에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바로 그 시기에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관장을 맡아 세계적인 석학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에라토스테네스였다. 그를 경쟁자로 여기며 시기했던 어떤 사람은 그에게 그리스어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타’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세계에서 둘째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이 말하듯, 에라토스테네스는 천문학, 역사학, 지리학, 철학, 시, 연극 평론 등 ‘자기가 손을 댄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베타’가 아니라 아주 확실한 ‘알파’였다’.
드니 게즈는 우리를 바로 그 시대의 한복판으로 이끌어간다. 그리스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테오라는 젊은이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고향을 떠나 알렉산드리아에 항구에 다다른다. 우리는 그 젊은이를 따라가면서 에라토스테네스를 만나고 당시의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를 구경하고 나일 강을 따라가며 고대 이집트의 유적을 탐사한다. 물론 이야기의 중심에는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재는 역사적인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다. 칼 세이건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당시에 에라토스테네스가 사용한 도구라고 할 만한 것은 막대기, 눈, 발과 머리 그리고 실험으로 확인코자 하는 정신이 전부였다. 그 정도만 가지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겨우 몇 퍼센트의 오차로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천이백 년 전의 실험치고는 대단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따라서 에라토스테네스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한 행성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 드니 게즈는 단지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위대한 점은 과학사의 그 드라마에 치밀한 역사적 고증과 상상력을 보태어 눈에 잡힐 듯이 생생한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데에 있다. 드니 게즈가 보여주고 있는 이집트는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가 탐사한 이집트와 기원전 1세기에 스트라본이 묘사한 이집트의 중간에 자리한다. 그 두 시대 사이의 이집트를 그려내기 위해 그는 관련된 문헌을 총동원하여 자기 이야기 속에 녹아들게 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짓되 교육자의 본령과 과학자의 엄밀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 그의 고뇌가 도처에서 느껴진다. 어떤 이들은 그런 대목에서 드니 게즈가 너무 진지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깊은 생각에서 나온 중용의 묘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의 소설을 더욱 행복하게 즐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
스타디온의 미스터리
소설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길이의 단위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작가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단위는 이집트 큐빗과 스타디온이다. 큐빗ㅡ프랑스어로 쿠데ㅡ은 팔꿈치를 뜻하는 라틴어 쿠비투스에서 나왔다. 거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에서 유래한 척도이다. 그런데 그 길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로마 시대의 큐빗은 약 45cm에 해당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집트 큐빗은 52.36cm이다. 작가는 그 근거를 대피라미드, 즉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언급한 고대의 문헌들에서 찾고 있다. 그 문헌들에 따르면 대피라미드의 밑면을 이루는 변의 길이가 440큐빗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실측에 따르면 대피라미드의 한 변은 약 230.4m이다. 따라서 1큐빗은 52.36cm에 해당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스타디온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스타디온은 고대 그리스의 길이 단위다ㅡ라틴어로는 스타디움, 프랑스어로는 스타드라고 한다. 헤로토토스의 『역사』 2권에 보면, 1스타디온은 600푸스라고 되어 있다. 문헌학자들은 모두 이것을 근거로 스타디온의 길이를 추정한다. 문제는 푸스에 있다. 푸스는 그리스의 피트인데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294mm부터 308mm, 327mm, 349mm까지 있다. 따라서 스타디온 역시 176m부터 185m, 196m, 209m까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ㅡ보통은 올림피아 경주로의 길이인 185m를 1스타디온으로 간주한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측정한 지구의 둘레는 250,000스타디온이다. 만약 위의 척도를 적용한다면 44,000km에서 52,200km에 해당한다. 현대의 측정치인 40,000km와 비교하면 오차가 무려 10%에서 32%에 이른다. 스타디온의 길이를 이렇게 추정하는 문헌학자들은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치가 그다지 정확한 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는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다. 헤르도토스가 말한 스타디온과 에라토스테네스의 스타디온이 정말 같은 단위였을까?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같지 않았다고 말한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시대에 어떤 곳에서 다른 곳까지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던 스타디온은 157m에 해당한다는 거리라는 것이다. 드니 게즈의 견해도 비슷하다. 1스타디온은 300큐빗ㅡ이집트 큐빗, 따라서 약 157.50m이다. 이 경우에 250,000스타디온은 약 39,400km가 된다. 그렇다면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에라토스테네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한 행성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불가지론이다. 독일의 고대 사학자 만프레드 클라우스는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의 계산이 얼마나 정확한지 규명할 수 없다. 에라토스테네스가 당시 통용되던 여러 스타디온의 길이들 중 어떤 것을 근거로 삼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 제현은 어떻게 판단하실지 모르지만, 드니 게즈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에라토스테네스에게서 과학을 하는 올바른 태도, 진정한 과학 정신의 원형을 보았다. 그래서 에라토스테네스가 정확한 측정치를 얻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리라 생각했고 그 시대의 조건에 비추어 그가 사용했을 법한 측정 방법을 상상했다. 그 방법론은 추론과 실측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론은 에라토스테네스의 몫이고 실측은 실제로 걸어가며 거리를 쟀던 이름 없는 보측 전문가들의 몫이다. 소설에서는 베톤과 테오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보측을 맡고 있다. 드니 게즈는 에라토스테네스를 도와 어려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그 무명의 보조자들에게도 경의를 표하고 싶었을 것이다. 빛나는 과학적 성취의 이면에는 진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참다운 일꾼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옮긴이 서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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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드니 게즈 Denis Guedj
1940년 알제리 세티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68세대로 수학자, 교수, 역사학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파리8대학 과학사 교수로 수학, 수학사, 과학사를 강의했고, 영화학과에서 과학영화 제작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그대에게 한 번뿐인 인생 La vie, t’en as qu’une>이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했으며, 시나리오 <자오선 La Meridienne>으로 1987년 최우수시나리오상을 수상했다. 수학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에 관심이 커서 리베라시옹 지에 수학자 칼럼을 연재한 바 있고, 라루스수학백과사전의 책임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 『세계의 측량 Le Mètre du monde』으로 프랑스한림원상을, 『앵무새의 정리 Le Theoreme du Perroquet』로 프랑스과학자협회특별상을 수상했으며, 추리소설 형식 속에서 수학 이야기를 전개한 『앵무새의 정리』는 20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 그 외의 저서로 『자오선』『수의 세계 L’Empire des nombres』『항해일지 La Bela』『제로 Zero, ou les cinq vies d’Aemer』『수학자의 낙원 Villa des hommes』 등이 있다. 2010년 4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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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세욱
전문 번역가. 옮긴 책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신』『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개미』『뇌』『타나토노트』 등과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미셸 투르니에의 『황금구슬』,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파트릭 모디아노의 『우리 아빠는 엉뚱해』, 장 자끄 상뻬의 『속 깊은 이성 친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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