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초원에서 개미 한 마리가 풀잎을 타고 열심히 기어오른다. 개미는 높이 더 높이 오르다 결국 떨어지고,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매번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오르고 또 오른다. 개미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개미는 이 고되고 헛된 행위를 통해 무슨 이익을 찾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지금 개미는 예를 들어 영토를 더 잘 굽어보거나, 먹이를 찾거나, 잠재적 배우자에게 과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미의 뇌는 창형흡충Dicrocelium dendriticum이라는 작은 기생충에게 점령당했고, 그 기생충은 번식주기를 완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양이나 소의 뱃속에 들어가야 한다. 이 작은 뇌 기생충이 개미의 자손이 아닌 자기 자손에게 이득이 되는 위치로 개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미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물고기와 생쥐를 비롯한 다른 생물 종들도 이처럼 행위를 조작하는 기생생물에 감염된다. 이 편승자들은 자신의 기주생물로 하여금 엉뚱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데, 이는 전적으로 기주생물이 아니라 기생생물의 이익을 위해서다.
이 같은 일이 인간에게도 일어날까? 그렇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자신의 이익과 건강, 자녀 출산의 기회를 뒤로하고, 뇌에 박힌 어떤 ‘생각idea’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다. 아라비아어인 ‘이슬람islam’은 ‘복종’을 의미하고, 성실한 이슬람교도는 누구나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하고, 보시를 하고,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하고, 메카로 순례 여행인 ‘하지’를 떠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입증한다. 이 모든 것은 알라와 알라의 사도인 무함마드의 생각을 위해서다. 물론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도 평생을 바쳐 말씀Word을 전파하고, 하나의 생각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 고통을 용감하게 받아들이고, 목숨을 내던진다. 시크교도들, 힌두교도들, 불교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수많은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이 민주주의나 정의 또는 단지 순수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왔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개인적 안녕―또는 자손을 낳으라는 생물학적 명령―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에 삶을 바치는 우리의 능력은 동물계의 나머지 부분과 우리를 구별하는 한 가지 특징이다. 어미 곰은 고기 한 조각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고 아기 곰이나 심지어 빈 굴을 지키기 위해 맹렬히 투쟁하지만, 인간의 경우 식료품점 또는 자식과 집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 죽는 사람보다는 신성한 장소나 신성한 문서를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우리도 번식을 하고 번식 성공에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는 욕구가 내재해 있지만, 우리에겐 교의가 있고, 유전적 명령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 이 점이 우리를 다르게 만들지만 그것 자체는 자연과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생물학적 사실이고, 자연과학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현상이다. 어떻게 해서 ‘호모사피엔스’라는 단 한 종만이 자신의 삶에 이런 특별한 명령을 부과할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자들보다 손자를 더 많이 두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만, 모든 야생동물에게 그것은 초기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최고선’이다. 동물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동물은 그뿐이다. 동물은 단지 동물이다. 흥미로운 예외처럼 보이는 것이 개다.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는 자기 친구인 인간의 종교적 헌신에 뒤지지 않는 헌신을 보이지 않는가. 개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가. 그렇다, 개는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이 감탄할 만한 특성이 길들여진 종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개들은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가장 사랑하고 감탄했던 개들의 후손이다. 충성심을 갖게 하려고 애써 개량하지 않았는데도 개들은 충성스러운 가축이 되었고, 결국 인간의 반려 동물 중 (그들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최고가 되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우리의 헌신에 비추어 주인에 대한 개의 헌신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개의 구체적인 특성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신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내가 처음에 했던 비교, 즉 개미의 뇌에 침입한 기생충과 인간의 뇌에 침입한 생각의 비교는 어쩌면 부자연스럽고 터무니없어 보일지 모른다. 벌레와 달리 생각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고, 뇌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의해 창조된다. 둘 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두 사실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큼 유력한 반대 사유가 되지 않는다. 생각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볼 수가 없고, 설령 볼 수 있다 해도 숙주의 뇌를 조종할 팔다리가 없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창형흡충 역시 로켓 과학자 같은 수재가 아니다. 사실 창형흡충은 당근보다 영리하지 않으며, 뇌도 없다. 창형흡충은 개미의 뇌와 접촉하면 항상 그 뇌를 자기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운 좋은 특성들을 부여받았을 뿐이다.(이 특성들은 나비의 날개에 있는 눈 모양의 반점과 같다. 일종의 속임수인 그 반점은 포식자 새들로 하여금 어떤 큰 동물이 노려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새들은 무서워 달아나고 나비는 그 이익을 얻지만, 그렇다고 결코 나비가 더 현명한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활성의 생각도 제대로 설계된 것이라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뇌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 생각이 뇌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바로 그 설계 때문에 계속 번창할 것이다.
신의 말씀을 창형흡충에 비유하는 것은 마음이 언짢은 일이지만, 생각을 생물에 비유하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반세기 전에 파리의 어느 헌책방에서 발견한 악보 한 장을 갖고 있다. 16세기 중반에 양피지 위에 적은 이 악보의 가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복음 13장)에 담긴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자는 그리스도다(Semen est verbum Dei; sator autem Christus). 씨앗은 개개인에 뿌리를 내리고, 개인들로 하여금 널리 전파하게 만든다(그리고 그 보답으로 숙주인 인간은 영생을 얻는다).
정신은 어떻게 생각을 창조하는가? 기적과도 같은 영감에 의해서일 수도 있고, 좀 더 자연적인 수단에 의해서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생각들이 정신에서 정신으로 전파되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살아남고, 노래와 그림과 조상과 의례에 편승하고, 구체적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기적처럼 조합을 이루어 또다시 새로운 ‘창조물들’을 낳고, 그것을 낳은 생각과 가족 유사성을 띠지만 그것만의 새로운 특성, 새로운 힘을 지니게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에 최초로 침입했던 ‘야생의’ 생각들 중 일부의 후손이, 우리가 그 주인이 되거나 적어도 그 집사, 그 목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동안 순화되고 길들여졌을 것이다. 오늘날 널러 퍼진 그 길들여진 생각들의 조상은 무엇이었을까? 그 조상들은 어디에서 생겨났고 왜 생겨났을까? 그리고 일단 우리의 조상들이 그 생각들을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단지 정신에 감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신봉하게 되었을 때, 이 ‘믿음에 대한 믿음’은 전파되는 그 생각들을 어떻게 변형시켰을까?
거대 종교 사상은 우리 인간들을 수천 년 동안 매혹시켜 왔다. 이것은 역사가 기록된 시간보다 길지만 생물학적 시간으로는 단지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만일 오늘날의 종교를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고 그 본질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종교가 오늘날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뿐 아니라 과거에 무엇이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 일곱 장에서 살펴볼 종교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 줄 것이고, 마지막 세 장에서는 오늘날 종교가 무엇인지, 왜 종교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중요한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신앙인으로 보는 그들의 자기 이해는 어떤 점에서 옳고 그를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 즉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맞이할 미래에 종교가 어디로 나아갈지를 더 잘 보게 될 것이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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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대니얼 데닛 (Daniel C. Dennett)
하버드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터프츠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인지연구센터의 소장을 겸하고 있다. 당대 철학자 중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자신의 철학에 가장 진지하게 활용하는 철학자로, 인지과학 및 과학철학 분야에서 늘 혁신적인 주장을 펼쳐온 세게적인 석학이다. 저서 『내용과 의식Content and Consciousness』, 『지향적 태도The Intentional Stance』, 『마음의 진화Kind of Minds』, 『다윈의 위험한 생각Darwin's Dangerous Idea』, 『마음의 설계Brainchildren: Essays on Designing Minds』, 『자유는 진화한다Freedom Evolves』 등에서 ‘지향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발전시켜 마음 읽기 능력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종교를 자연현상으로 해부한 이 책은 과학적 논증을 통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한 리처드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6년 미국에서 나란히 출간되어 종교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한 이 종교 비판서 두 권은 세계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데닛은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리는 종교라는 주목할 만한 현상의 기원을 밝히고 종교가 왜, 그리고 어떻게 충성을 요구하고, 그토록 강력해졌으며, 그렇게 많은 삶을 강하게 규정하는지를 논의한다. 이 밖의 저서로 『설명된 의식Consciousness Explained』, 『활동의 여지Elbow Room: The Varieties of free Will Worth Wanting』, 『브레인스톰 Brainstorm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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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한영
미학과 문예창작을 공부한 후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사랑을 위한 과학』, 『에필로그』, 『빈 서판』,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본능』, 『단어와 규칙』, 『생명의 개연성』 등이 있다. 제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 번역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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