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멕시코 만에서 세력을 일으킨 허리케인 찰리가 플로리다를 휩쓸고 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 그 결과 스물두 명이 목숨을 잃고 110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했다. 뒤이어 가격폭리 논쟁이 불붙었다.
올랜도에 있는 어느 주유소는 평소 2달러에 팔던 얼음주머니를 10달러에 팔았다. 전력 부족으로 8월 한여름에 냉장고나 에어컨을 사용하지 못하던 많은 사람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값을 고스란히 지불했다. 나무가 쓰러지는 바람에 전기톱과 지붕 수리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건설업자들은 지붕을 덮친 나무 두 그루를 치우는 데 무려 2만 3000달러를 요구했다. 가정용 소형 발전기를 취급하는 상점에서는 평소 250달러 하던 발전기를 2000달러에 팔았다. 일흔일곱의 할머니는 나이 든 남편과 장애가 있는 딸을 데리고 허리케인을 피해 모텔에서 묵었다가 하루 방값으로 16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평소 요금은 40달러였다.
플로리다 주민들은 바가지요금에 분통을 터뜨렸다. <USA 투데이>는‘폭풍 뒤에 찾아온 약탈자’라는 머리기사를 실었다. 한 주민은 지붕 위로 쓰러진 나무 한 그루를 치우려면 1만 500달러가 들 것이라며 “남의 고통과 불행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말했다. 플로리다 주 법무장관 찰리 크리스트도 같은 생각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에 남의 고통을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의 탐욕이 도를 넘었다.”
플로리다에는 가격폭리처벌법이 있어서,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 법무장관 사무실에 2000건이 넘는 피해 사례가 접수되었다. 이중에는 소송에서 승리한 경우도 있다. 웨스트팜비치에 있는 숙박업소‘데이스 인’은 벌금 7만 달러를 내고 추가로 받은 숙박료를 투숙객에게 돌려줘야 했다.
그러나 크리스트가 가격폭리처벌법을 집행하려 하자 일부 경제학자들은 해당 법에, 그리고 주민들의 분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전통이나 물건 본래의 가치로 결정되는‘공정 가격’에 따라 물물교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지켜본 결과, 시장 사회로 진입하면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었을 뿐‘공정 가격’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시장 경제학자인 토머스 소웰(Thomas Sowell)은 가격폭리를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표현”이라고 말하면서, “경제학자 대다수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너무 복잡해서 구태여 신경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웰은 <탬파 트리뷴> 에 기고한 글에서, “‘가격폭리’가 어떻게 플로리다 주민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가격이 사람들에게 익숙한 수준보다 현저히 높을 때” 가격폭리라는 혐의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다 익숙해진 가격 수준”은 도덕적으로 대단히 신성한 것이 아니다. 그 가격은 허리케인 습격을 비롯해 다양한 시장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다른 가격보다 “더 특별하거나 ‘공정한’ 가격”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소웰의 주장에 따르면 얼음, 생수, 지붕 수리, 발전기, 모텔 방의 가격이 높아지면 수요자는 소비를 억제하고 공급자는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먼 곳까지도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려는 욕구가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뜨거운 8월에 플로리다가 정전되었을 때 얼음주머니 가격이 10달러라면, 제조업자는 얼음을 더 많이 생산해 나르려 할 것이다. 소웰은 비싼 값이 전혀 부당하지 않다면서, 그것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서로 교환할 물건에 부여하기로 한 가치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친시장 논평가 제프 제이커비(Jeff Jacoby)는 <보스턴 글로브> 기고문에서 비슷한 논리로 가격폭리처벌법에 반대했다. “시장이 견딜 만한 값을 요구하는 행위는 폭리가 아니다. 탐욕도 뻔뻔스러움도 아니다. 그것은 자유 사회에서 재화와 용역이 분배되는 방식이다.” 그는 “가격 급등은 강력한 폭풍으로 삶이 수렁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특히 화가 나는 일”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화가 난다고 해서 자유시장을 방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언뜻 터무니없어 보이는 가격이지만, 필요한 물건을 더 많이 생산하도록 공급업자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사실은“실보다 득이 훨씬 많다”. 제이커비의 결론은 이렇다. “장사꾼을 악마로 만든다고 해서 플로리다의 복구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 장사를 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오히려 낫다.”
주 법무장관 크리스트(공화당원으로, 나중에 플로리다 주지사가 되었다)는 <탬파 트리뷴> 특별기고난에 가격폭리처벌법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비상사태를 맞아,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대피하고 가족을 위해 기본 생필품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업자들이 비양심적인 가격으로 이득을 보는 상황을 정부가 팔짱을 끼고 바라볼 수만은 없다.” 그는 “비양심적인” 가격이 진정한 자유 교환을 반영한다는 의견을 반박했다.
지금은 자발적 구매자가 자유로운 선택으로 시장에 들어가 자발적 판매자를 만나고,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정상적인 자유시장 상황이 아니다. 비상 상황에서, 강요받는 구매자에게 자유는 없다. 안전한 숙박시설 같은 생필품에 대한 수요는 불가피하다.
허리케인 찰리가 지나간 뒤에 일어난 가격폭리 논쟁은 도덕과 법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재화와 용역을 판매하는 사람이 자연 재해를 이용해, 시장이 견디기만 한다면 어떤 가격을 불러도 상관없는가? 이때 법이 조금이라도 힘을 쓸 수 있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가격폭리 금지가 구매자와 판매자의 자유로운 거래를 방해할지라도 주정부는 가격폭리를 금지해야 하는가?
행복, 자유, 미덕
이러한 질문은 단지 개인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법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한마디로 정의를 묻는 질문이다. 여기에 답하려면 정의의 의미부터 따져봐야 한다. 사실 앞에서 이미 이 문제를 생각해보았다. 가격폭리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주장은 세 가지 항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정의를 바라본다.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는 전형적인 입장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행복이고, 하나는 자유다. 우선, 시장은 공급업자들의 사기를 북돋아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부지런히 공급하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행복을 높인다(행복이란 개념은 워낙 광범위해서 사회복지 같은 비경제적 부문도 포함하지만, 대개는 부유한 삶과 동일시된다). 둘째, 시장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재화와 용역에 고정된 가치를 부여하기보다는 그것을 교환하는 사람들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게 만든다.
가격폭리처벌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두 가지 익숙한 주장을 내세운다. 그렇다면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첫째, 이들은 어려운 시기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행위는 사회 전체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가격이 높으면 재화의 공급이 늘어날지언정, 거기서 나오는 이익은 그 가격을 감당하기 벅찬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감으로 상쇄되고 만다. 돈 있는 사람이라면 폭풍이 닥쳐 기름 한 통이나 모텔 방 값에 웃돈을 한참 얹어준다 한들 짜증이 나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서민에게는 심각한 고통이어서, 안전하게 몸을 피하느니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전체의 행복을 측정할 때는 비상사태에 가격 폭등으로 생필품을 구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특정 상황에서는 자유시장이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트의 지적대로, “강요받는 구매자에게 자유는 없다. 안전한 숙박시설 같은 생필품에 대한 수요는 불가피하다”. 허리케인으로 가족과 함께 몸을 피하는 상황에서, 기름이나 대피소에 터무니없는 값을 지불하는 행위는 자발적 교환이 아니다. 차라리 강탈에 가깝다. 따라서 가격폭리처벌법이 정당한가를 판단하려면 행복과 자유에 대한 상반된 주장을 비교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때 고려해야 할 주장이 하나 더 있다.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하는 주장은 대개 행복이나 자유보다 더 본능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타인의 절박함을 이용해먹는 ‘약탈자’에게 분노하고, 횡재라는 포상을 내리기는커녕 그들을 처벌하고 싶어 한다. 이런 정서는 공공 정책이나 법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원초적 감정으로 무시되곤 한다. 제이커비가 썼듯이, “장사꾼을 악마로 만든다고 해서 플로리다의 복구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가격폭리에 대한 분노는 단순히 지각없이 성을 내는 게 아니다.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는 도덕적 주장의 표현이다. 분노는 자격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얻는다고 생각될 때 느끼는 특별한 종류의 화다. 다시 말해, 부당함에 대한 화다.
“남의 고통을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의 탐욕이 도를 넘었다”는 말은 그러한 분노의 도덕적인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크리스트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심리와 가격폭리처벌법을 드러내놓고 연관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언급에는 미덕 주장이라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겼다.
탐욕은 악덕, 즉 나쁜 태도이며, 특히 타인의 고통을 망각하게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때는 개인의 악덕으로 끝나지 않고 시민의 미덕과 충돌한다. 사람들은 최대 이익을 실현하려 애쓰기보다는 서로를 탐색한다. 어려운 시기에 이웃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활개치는 사회는 좋은 공동체가 못 된다. 따라서 지나친 탐욕은 좋은 사회라면 가능한 한 억제해야 하는 악덕이다. 가격폭리처벌법으로 탐욕을 완전히 추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독히 뻔뻔스러운 탐욕을 억제하고, 그것에 반대한다는 신호를 보낼 수는 있다. 사회는 탐욕스러운 행동에 포상보다는 벌을 내림으로써 공동선을 위해 다 같이 희생을 감수하는 시민의 미덕을 지지한다.
미덕 주장의 도덕적 효력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다른 주장에 우선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곳에서는 ‘악마의 거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격폭리를 허용하면 도덕을 희생하고 탐욕을 인정하는 대신, 멀리 있는 지붕 수리업자들과 건축업자들을 다수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지붕부터 수리하고 사회조직은 차차 손보자.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가격폭리처벌법을 둘러싼 논쟁은 단지 행복과 자유에 관한 논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덕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기질, 즉 인격을 다듬는 문제다.
그러나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미덕 주장이 어쩐지 불편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행복과 자유에 호소하는 논리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심판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이 경제 회복 속도를 높일지,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할지 알아본다고 해서 사람들의 선호도를 ‘심판’ 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누구나 적은 소득보다는 많은 소득을 원한다고 가정하며, 사람들이 돈을 어떻게 쓰든 그것을 심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강요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정말로 선택의 자유가 있는지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들의 선택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강요받기보다는 직접 선택했는가, 직접 선택했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러했는가’이다.
그러나 미덕 주장은, 탐욕은 악덕이니 주정부가 나서서 억제해야 한다는 심판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무엇이 미덕이고 무엇이 악덕인지 누가 판단하겠는가? 다원화 사회의 시민은 그러한 판단에 반대하지 않던가? 그리고 미덕에 대한 판단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니던가? 이러한 우려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대개 정부는 미덕과 악덕에 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선한 마음가짐을 주입하거나 악한 마음가짐을 억제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가격폭리에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다들 자격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얻을 때 분노하며, 인간의 불행을 이용하는 탐욕은 포상이 아닌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법을 만들어 미덕을 심판하려 할 때는 우려를 표한다.
이 딜레마는 정치철학의 중대한 문제 하나를 드러낸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시민의 미덕을 장려해야 하는가? 아니면 법은 미덕에 관한 서로 다른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시민 스스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해야 하는가?
교과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질문은 고대 정치사상과 근대 정치사상을 가른다.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이 설명은 옳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거라고 가르친다.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결정하려면,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주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식부터 심사숙고해야만 무엇이 정의로운 법인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법은 좋은 삶을 묻는 질문에 중립적일 수 없다.
반면 18세기의 이마누엘 칸트부터 20세기의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미덕과 최선의 삶에 관한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 각자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현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앞으로 이 둘의 장단점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식의 대조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오늘날의 정치를 움직이는 정의에 관한 주장들, 특히 철학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더욱 복잡한 그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세우는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경제적 풍요를 지지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주장에 찬성하거나 맞서면서, 어떤 미덕이 영광과 포상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좋은 사회가 장려해야 하는 생활방식은 무엇인지에 관해 은근슬쩍 다른 신념을 넘보기 일쑤다. 다시 말해 풍요로움과 자유를 굳건히 지지하면서도 정의에서 심판이라는 한 가닥 끈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한다. 정의에는 선택뿐 아니라 미덕도 포함된다는 생각은 뿌리가 깊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상처를 입어야 상이군인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미덕과 영광을 둘러싼 문제가 너무 두드러져서 부정하기 힘든 사안도 있다. 상이군인훈장을 받을 자격을 놓고 벌어진 최근의 논쟁을 보자. 미군은 1932년부터, 전투를 벌이다가 적의 군사행동으로 다치거나 사망한 군인에게 훈장을 수여해왔다.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영광을 누릴 뿐 아니라 재향군인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을 얻는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시작된 이래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는 재향군인의 수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들은 잦은 악몽이나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재향군인 가운데 적어도 30만 명이 외상에 따른 스트레스나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보고도 들린다. 이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들에게도 상이군인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신 손상도 신체 손상만큼이나 사람을 쇠약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국방부 자문단은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2009년 상이군인훈장 대상은 신체 손상을 입은 군인으로 한정한다고 발표했다. 정신장애와 심리적 외상에 시달리는 재향군인은 정부가 지원하는 치료와 장애보상금을 받을 수는 있지만 훈장을 받지는 못한다. 국방부는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웠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적이 군사행동을 통해 의도적으로 유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객관적으로 진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방부의 결정은 과연 옳았는가? 이유만 놓고 볼 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라크전쟁에서 상이군인훈장 수여 대상으로 인정받은 가장 흔한 손상은 고막 파열이었다. 가까이에서 폭발물이 터졌을 때 생기는 손상이다. 그러나 총격이나 포격과 달리 폭발은 적이 아군을 다치게 하거나 죽일 목적으로 구사한 전술의 결과가 아니다. 그보다는 (외상후스트레스처럼) 교전중에 생긴 부수적 피해에 해당한다. 그리고 외상에 따른 정신장애는 다리가 부러진 경우보다 진단은 어렵지만, 그 후유증은 더 심각하고 오래간다.
상이군인훈장 논란이 확산되면서, 훈장의 의미와 훈장이 칭송하는 미덕이 문제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훈장과 관련한 미덕은 무엇일까? 다른 무공훈장과 달리 상이군인훈장은 용맹이 아닌 희생을 칭송한다.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적에게 입은 손상만이 기준이 된다. 문제는 어떤 손상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재향군인이 모인 상이군인훈장협의회(MOPH)는 훈장 수여 대상을 정신 손상까지 확대하는 데 반대하면서, 그럴 경우 영광을 “깎아내리게” 되리라고 주장했다. 이 단체의 대변인은“피를 흘린”행위가 훈장 수여의 자격 요건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피를 흘리지 않은 손상을 왜 제외해야 하는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 손상도 수여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인 전직 해병대 대위 테일러 부드로는 이 논란을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 그는 외상후스트레스를 일종의 나약함으로 여기는 군대 내의 뿌리 깊은 사고를 반대 의견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강인한 마음가짐을 요구하는 사회는 정신이 무척 건강한 사람도 전쟁의 폭력으로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은 근히 부정하도록 부추긴다. (…)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군대가 전쟁에서 입은 정신적 상처를 은연중에 경멸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정신 고통에 시달리는 재향군인들은 절대 상이군인훈장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상이군인훈장 논란은 손상의 진상을 결정하는 의학적·임상학적 논란에 그치지 않는다. 논란의 핵심에는 도덕과 군인의 용맹함이라는 서로 다른 엇갈린 생각이 존재한다. 피를 흘린 상처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외상후스트레스를 영광과는 거리가 먼 나약한 성격 탓으로 돌린다. 정신적 상처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외상에 따른 스트레스나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재향군인도 팔다리를 잃은 사람만큼이나 국가를 위해 영광스럽게 희생했다고 주장한다.
상이군인훈장 논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 담긴 도덕 논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무공훈장은 어떤 미덕을 칭송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고서는 수여 대상자를 결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려면 인격과 희생이라는 서로 다른 개념을 따져보아야 한다.
무공훈장 논란은 영광과 미덕에 관한 고대의 윤리관을 되짚어보아야 하는 특별한 사례일 수도 있다. 정의와 관련한 오늘날의 주장은 거의 다 번영의 열매나 고난의 짐을 어떻게 분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논의를 지배하는 사고는 행복과 자유다. 그러나 경제적 분배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다 보면, 어떤 사람이 도덕적 자격을 갖추었고 왜 그러한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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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
1953년 미네소타에서 출생했다. 브랜다이스대학교를 졸업하고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를 발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 책에서 '공동체주의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해,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마이클 월저, 찰스 테일러 교수 등과 함께 공동체주의의 4대 이론가 중 한 명이자 존 롤스 이후 정의 분야의 세계적 학자로 평가된다. 1980년부터 30년간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정의(Justice) 수업은 현재까지 20여 년 동안 하버드대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힌다. 이러한 명성으로 2002년 앤 티 앤드 로버트 엠 벳 교수, 2008년 미국정치학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교수로 선정되었다.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 외의 다른 주요 저서로 『민주주의의 불만』(1996), 『공공철학』(2005), 『완벽함에 대한 반론』(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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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창신
번역을 전공한 후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창조자들』, 『신의 언어』, 『하프타임』, 『욕망의 식물학』, 『고추, 그 맵디매운 황홀』, 『거세된 희망』, 『스파이』, 『식물 추적자』, 『나비에 사로잡히다』, 『커피견문록』, 『목격』, 『세상을 바꾼 25인의 연설』, 『아첨론』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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