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자들은 대개 연애편지를 다른 서신들과 함께 보관하는 데 반해 여자들은 옷 속에 보관하는 경우가 많을까? 왜 여자들은 언제나 보내는 것보다 더 많이 편지를 쓸까?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차이를 보이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무엇이 여성을 여성으로 만들고 남성을 남성으로 만드는가? 앞으로 함께 보겠지만 이런 질문의 경로를 따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남녀관계를 보증하는 것은 없다. 여자 또는 남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라고 말해주는 정해진 공식은 없다. 남성의 성생활에 여성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지만, 그 반대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남성의 현존 이상의 무엇과 연루되어 있다면, 다른 무엇이 그녀의 파트너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섹슈얼리티는 무엇에 이끌리는가? 이런 질문들을 따라가보면, 남녀의 근본적 고독을 둘러싼 문제를 조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됨이란 무엇인가
이 고독은 당신이 파트너에게 “무슨 생각해?”라고 물을 때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생각하는 능력의 유무라고들 한다. 하지만 진짜 차이는 인간만이 습관적으로 서로를 향해 “무슨 생각해?”라고 묻는다는 점이다. 대개 연애관계는 정확히 이 질문 주위를 맴도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아니야” 혹은 “이런저런 생각” 같은 말이 최선이자 최악의 대답인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머뭇거리며 답하고, 질문 자체를 침해로 느끼는 것일까? 왜 당신은 답변이 무엇일지 잘 알고 있을 때조차 이런 질문을 상대에게 계속해서 던질까? 섹슈얼리티는 두 영혼이 결합할 공통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듯하지만 오히려 두 영혼을 분리하기 십상이다. 이에 관한 역설은 잘 알려져 있다. “다른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분리를 이겨내려고 하면 할수록 분리는 강화된다.” 이것은 단순히 상대와 자신의 기본적 차이를 대면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해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질문을 수반하며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는 요구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것은 그의 다름, 타자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런 중에 다른 이가 자신에게 속하는가 하는 문제가 우리가 자신에게 얼마나 속해 있는가 하는 더 기본적인 문제를 흐려버린다. 이야말로 남자들과 여자들이 나름의 고집스럽고 특유한 방식으로 실패하는 부분이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여성성에 대한 모든 탐구가 “여성The Woman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진술은 부조리하고 공격적으로 보인다. 이를 라캉의 논의 맥락에서 떼어내보면 여성의 실존이라는 경험적 사실을 거부하고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성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라캉은 도발적인 문장 뒤에 숨은 그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곧 여성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단일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성의 본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소녀는 여성이 되지만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준비된 답이 없다. 심리세계 안에 여성에 대해 미리 프로그래밍된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적 정체성의 자리에는 간극이 있다.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자동적으로 얻을 수 있는 답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녀에게 핵심적인 질문은 “여성됨이란 무엇인가?”이다.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친구처럼 행동하는 것인가? 유행하는 경향을 따르는 것인가? 아이를 가지는 것인가?
초경을 겪고 나서 생기는 우울증을 어떤 정신분석학자들은 신체나 신체반응에 대한 불안이 활성화된 것과 연결짓는다. 그런 분석이 맞는 경우도 많겠지만, 우울증은 여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초경 자체에 대한 놀람보다는 초경을 겪었음에도 어떤 변화도 없다는 사실, 즉 아무런 놀라움도 없다는 놀라운 사실에서 기인한다. 열두 살짜리 소녀는 일기에 초경을 치른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적기 위해서 방으로 달려간다. 뒤이어 우울이 밀려오는데, 그것은 초경을 치렀음에도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월경으로 나타나는 생물학적 변화는 “여성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월경은 단숨에 소녀를 여성The Woman으로 만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주는 공식이 아니다.
여성성 문제에 대한 상상 속의 반응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지만,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그런 반응 가운데 어떤 것도 궁극적 해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놀랍게 들릴 수도 있지만 라캉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 반응이 남자와의 동일시라고 주장했다. 여성됨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소녀가 남자의 신발에 자기 발을 밀어넣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테제이다. 이는 사실 충분히 필연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여자는 최선을 다해 삼각관계를 만든다
한 남자가 카페에 앉아서 남녀 한 쌍이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 그는 여자의 매력에 이끌려 그녀를 쳐다본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에서 여자는 좀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여자도 남자에게 끌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남자와 함께 가는 여자를 보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쓴다. 달리 말하면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남자 혹은 여자라기보다 그들 간의 관계이다. 저 여자는 남자를 어떻게 자기 짝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바이올라가 일리리아에 도착할 때, 그녀는 그 지방의 공작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는 사람이고 그가 올리비아라는 여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작과 자기 아버지의 관계를 생각하면 공작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는 편이 올바른 행동임에도, 그녀는 곧장 그가 사랑하는 여성에 대해 질문한다.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요?” 여기서 핵심은 어떤 여성이 여성적 정체성, 여성됨의 의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면, 또다른 여성, 즉 한 남자의 사랑 또는 욕망의 대상인 그녀 말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더 나은 모델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바이올라의 질문은 대단히 여성적이다. 여자가 남자의 아파트에 들어가서 처음 하는 일은 그가 이전에 사귀던 여자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별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여성들에게 중심적인 질문이 남자와 또다른 여자의 관계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또다른 여성은 무엇이 남자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지, 그 미스터리의 은밀한 해답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미스터리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바이올라는 남자의 위치에서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자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 이에 그녀는 정말 시동侍童으로 변장하고 공작을 시중든다. 그리고 말 그대로 올리비아를 향한 공작의 구애를 대신 수행한다. 바이올라가 소년으로 위장하고 구애의 말을 읊조리는 것은 단지 희곡적 관습이 아니다. 그 당시 많은 희곡들이 동일한 착상을 극적 요소로 활용했지만, 그 때문에 이 위장 행위 자체의 의미를 흐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희곡에서 남자의 여장은 익살스럽게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가 남장을 하면 진지한 모습이 유지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갑자기 소극笑劇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런 위장 행위는 욕망의 경로가 교란되지 않게 해줌으로써 극의 진행을 더 매끄럽게 하는 듯하다. 이때 진행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욕망에 대한 탐구이다. 이것은 왜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나 한 여자가 아니라 한 쌍의 남녀에 관심을 갖는지 설명해준다. 여자들은 최선을 다해 삼각관계를 만든다. 왜냐하면 삼각관계는 다른 사람의 욕망을 탐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데버러 태넌(Deborah Frances Tannen(1945~ ) 미국 조지타운 대학의 언어학과 교수. 『남자를 토라지게 하는 말, 여자를 화나게 하는 말』(1990)이라는 대중적인 저술로 큰 명성을 얻었다)이 논의한 일련의 어린이게임들은 이런 역학을 잘 보여준다. 탁아소에서 부엌놀이를 할 때, 수는 메리가 요즘 가지고 노는 인형을 탐낸다. 하지만 수는 그 소망을 직접 말하지 않고 메리에게 인형을 원하는 또다른 소녀 리사를 위해서 그것을 가지러 왔다고 말한다. 뒤이어 세 명의 소년이 같은 장소에서 놀이를 한다. 닉은 케빈이 가진 인형을 보자 그것을 달라고 요구한다. 인형을 갖기 위해서 닉 또한 수처럼 제3의 아이를 끼워넣는다. 하지만 방식은 다르다. 그는 조라는 제3의 아이의 욕망을 내세우지 않고 대상을 소유하는 데 도움을 얻으려고 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닉은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지만, 수는 다른 사람의 욕망에 호소한다고 할 수 있다. 수의 욕망은 다른 소녀의 욕망에 의존하고 그것을 끌어들여야만 하는 듯하다. 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인형을 가져가겠다고 요구하는 반면 닉은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독해하기에 따라서 수는 그녀의 욕망이 다른 누군가의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곧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떠안는 것이다.
이런 작은 시나리오는 남성과 여성이 욕망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보여준다. 소년은 소망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서 라이벌을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소녀는 대상보다는 다른 소녀의 욕망을 목표로 한다. 여자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안에서 탐색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이다. 수집가 중에 여성이 극히 드문 것도 그래서이다. 여자들의 관심은 이 남자 혹은 저 여자가 아니라 그들 간의 관계와 욕망에 있다. 여성이 종종 이리저리 얽힌 친구들의 연애관계에 큰 흥미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레이더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욕망에 주파수를 맞춘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여성들이 뛰어난 심리치료사나 분석가가 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일 터이다. 그것은 몇몇 논평가들이 주장하듯이 여성들이 피분석자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 주파수에 더 밀접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충족된 욕망은 더이상 욕망이 아니다. 그 귀결은 여자가 자신을 남자에게 ‘주기’를 거부하는 한에서만 남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녀는 무엇이 남자의 욕망을 구성하는지 탐색하기 위해서 그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으려 한다. 남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는 그녀에게서 정확히 무엇을 보는가? 이것이 ‘잘 안 주는’ 여성이라는 표준적 이미지를 복잡하게 만들며, 연애가 연구 프로그램, 즉 남자가 여자의 생각을 알아내는 작업을 필요로 함을 보여준다. 한 여자와 남녀 한 쌍 사이의 삼각관계가 “그에게 그녀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방법인 것처럼,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사귀는 행위는 “그에게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어가는 방식의 하나이다. 두 가지 질문은 모두 여성성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를 명료하게 해준다.
프로이트의 환자였던 도라는 「히스테리 사례에 대한 단편적 분석」이라는 프로이트 논문의 대상이 된 여성이다. 그녀는 1900년 열여덟 살 때 분석을 받았다. 도라는 처음에 자기가 복잡한 성적 역학관계를 가진 가족 속에서 장기판의 말 같은 신세라고 투덜거렸다. 아버지는 K의 부인과 연인관계였고, 도라 자신은 K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분석을 진행하면서 그녀가 의식적으로는 저항하지만 사실상 이런 구조를 유지하고 아버지와 K 부인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녀는 적절한 순간에 아버지와 K 부인만 따로 남겨두어 그들이 방해받지 않도록 신경썼다. 이 임상 사례에 대한 라캉의 재독해에 따르면 도라가 그렇게 한 이유는 K 부인이 도라에게 여성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라는 아버지와 K 부인의 외도를 보호해줌으로써만 아버지가 그 여자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는지 계속해서 탐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발기불능이었기 때문에 이런 역할에 아주 잘 맞았다. 달리 말하면 그가 여성과 맺고 있는 관계는 성교라는 영역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사랑으로 묶어줄까? 그것은 확실히 이상적인 삼각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섹스도 하지 못하면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K 부인이 아버지에게 매우 매력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 요소에 도라는 흥미를 느낀 것이다. 그녀는 K와 동일한 종류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그를 만나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같이 자지도 않는 여자를 욕망하는 남자’라는 구조를 복제해낸다. 프로이트는 치료과정에서 도라가 진정으로 K를 사랑한다고 계속 생각했지만, 라캉은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 라캉은 사랑과 동일시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도라는 여성성에 대한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서, 즉 K 부인이라는 인물이 구현하고 있는 신비로움을 이해하고자 K와(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K 부인은 따라서 전체 시나리오의 진짜 중심이다. 도라는 삼각관계를 구성한 다음 그 관계 속의 행위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이는 기침이나 인후염 같은 그녀의 징후를 통해서 식별된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실수는 도라에게 특별한 존재가 K 부인이 아니라 K라고 가정한 점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구조를 친구나 아버지에게 파트너를 찾아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여성들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구조 덕에 그들은 자신이 소개한 여성에게서 남자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그들에게 여성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면밀히 검토한다. 이런 교묘한 조치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 시도는 여성을 소외시키고 남자의 욕망의 덫에 빠지게 한다. 왜냐하면 이때 “여성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남성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가 특정한 여자를 욕망한다면 그는 그녀 안의 무엇을 욕망하는 것인가? 여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남자가 여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 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는 이런 방식대로라면 여성의 욕망에 대해 탐구하면 할수록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됨을 뜻한다. 아마도 이것이 낸시 프라이데이(Nancy Colbert Friday(1933~ ) 미국의 작가. 『나의 비밀정원: 여성의 성적환상』(1973)의 저자로 유명하다) 같은 작가가 만든 ‘여성적 환상’의 목록이 독자들에게 불신을 자아내는 이유일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의 대부분은 남자들이 만들어낸 듯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위의 논증을 따른다면 모순은 없다. 여성의 환상은 남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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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대리언 리더 (Darian Leader)
영국 런던에서 개업해 활동하는 정신분석가로, 런던 프로이트 분석연구센터의 창립 멤버이자 미들섹스 대학교 정신분석센터의 명예 방문교수이기도 하다. 영미권에서 라캉 연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복잡하고 난해한 라캉 이론을 대중에 소개하는 데 기여해왔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사랑, 일상, 예술의 다양한 면면을 독창적 시각으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탁월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두워질 때 연인들이 하는 약속들』이라는 책으로 영국 일간지 가디언으로부터 “자아를 탐구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 밖에 지은 책으로 『라캉 입문』, 『프로이트의 각주』, 『모나리자 훔치기』, 『새로운 어둠: 애도, 멜랑콜리아 그리고 우울』, 『사람들은 왜 병에 걸릴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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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종엽
문화평론가이자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07~8년 창비주간논평 기획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저서로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 『연대와 열광』, 『시대유감』, 『87년체제론』(공저), 역서로 『토템과 터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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