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들의 창조자이다.
예술을 드러내고 예술가를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비평가는 아름다운 사물에서 받은 인상을 다른 방식으로 혹은 새로운 재료로 옮겨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비평의 가장 저급한 형태이자 가장 고급한 형태는 자서전적인 양식이다.
아름다운 사물을 보고 추한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은 매력적인 면모가 없는 추악한 사람이다. 이것은 결함이다.
아름다운 사물을 보고 아름다운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로서, 그들에게 아름다운 사물은 오직 아름다움만을 의미한다.
도덕적인 책이라거나 부도덕적인 책이라는 것은 없다.
책은 잘 썼거나 잘못 썼거나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실주의에 대한 19세기의 혐오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칼리반(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밀라노의 영주 프로스페로를 섬기는 반인반수의 노예)의 분노다.
낭만주의에 대한 19세기의 혐오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지 않는 칼리반의 분노다.
인간의 도덕적인 삶이 예술가의 주제 가운데 일부를 형성하는 반면,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수단을 완벽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
어떠한 예술가도 무언가를 증명하길 원하지 않는다. 진실한 것들조차 증명될 수 있다.
어떠한 예술가도 윤리적인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예술가에게 윤리적인 동정심은 양식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매너리즘이다.
어떠한 예술가도 결코 병적이지 않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 생각과 언어는 예술의 도구이다.
예술가에게 악덕과 미덕은 예술을 위한 재료이다.
형식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예술 양식은 음악가의 예술이다. 감정의 관점에서 보면, 배우의 기교가 그 양식이다.
모든 예술은 표면인 동시에 상징이다.
표면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상징을 읽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예술이 진정으로 반영하는 것은 관객이지 삶이 아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은 그 작품이 새롭고 복합적이며 생명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비평가들이 인정하지 않을 때 예술가는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유용한 것을 만든 이가 그것에 감탄하지 않는 한 그를 용서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에 열렬히 감탄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전혀 쓸모없다.
오스카 와일드.
1
화실에는 짙은 장미향이 가득했고, 가벼운 여름 바람이 정원의 나무 사이를 산들산들 지나가면 라일락의 진한 향기나 섬세한 분홍색 꽃이 피는 가시나무의 더욱 섬세한 향기가 열린 문틈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헨리 워튼 경은 페르시아산 안장주머니처럼 생긴 소파 겸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 언제나처럼 끝도 없이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꿀처럼 노란 금련화들이 꿀처럼 달콤한 향기를 내뿜으며 활짝 피어 있는 모양을, 바람에 흔들리는 금련화 가지들이 가지만큼이나 불꽃같은 아름다움의 무게를 간신히 감당하고 있는 듯 한 모양을 어렴풋이 보고 있었다.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커다란 창문 앞에 드리워진 기다란 터서 실크(인도나 중국에서 생산하는 갈색의 투박한 실크) 커튼에 기이한 그림자들이 펄럭이면 잠깐 동안 일본풍의 그림이 만들어져, 부득이 고정될 수밖에 없는 예술 매체를 통해 날래고 동적인 느낌을 전달하고자 애쓰는 파리한 비취빛 얼굴의 도쿄 화가들을 연상시켰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제멋대로 삐죽하게 자란 풀들을 헤치며 날아다니거나, 금박을 뿌린 듯 헝클어진 인동덩굴 꽃들 주위를 지루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빙글빙글 돌고 있는 벌들의 볼멘 듯 웅웅거리는 소리가 화실의 침묵을 더욱 숨 막히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득한 런던의 외침이 저 멀리서 어렴풋이 울리는 오르간의 최저음처럼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똑바로 세워진 이젤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한 젊은이의 전신 초상화가 집게로 고정되어 있고, 그 앞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초상화를 그린 화가이자 몇 년 전 갑자기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며 해괴한 추측을 난무하게 만든 당사자, 바질 홀워드가 앉아 있었다.
화가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그려놓은 우아하고 잘생긴 작품 속 인물을 바라보며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별안간 놀라서 벌떡 일어서더니, 깨어날까 두려운 어떤 기묘한 꿈을 뇌리 속에 가둬두기라도 하듯 눈꺼풀에 지그시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자네가 그린 최고의 작품이군. 바질, 자네 일생의 최고의 작품이야.” 헨리 경이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내년에는 반드시 그로스브너에 출품해야 해. 왕립 미술원 전시회는 너무 크고 너무 천박해. 그곳에 갈 때마다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도대체가 그림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정말이지 끔찍하더군. 하긴, 그렇지 않으면 또 그림 천지라서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는데, 그건 더 재미가 없지. 자네 그림을 출품할 곳은 그로스브너뿐이야(당시 그로스브너는 인상주의 작품과 같이 형식과 소재에서 실험적인 작품들을 전시한 반면 영국 왕립 미술원은 보다 보수적이었다).”
“어디에도 보내고 싶지 않아.” 화가는 옥스퍼드 시절 친구들의 비웃음을 사곤 했던 이상한 방식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대답했다. “그래.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거야.”
헨리 경은 눈썹을 치켜뜨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편이 짙게 섞인 담배에서 대단히 비현실적인 모양으로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는 엷고 푸른 연기 사이로 바질을 바라보았다. “아무 데도 보내지 않겠다니? 이봐, 대체 왜 그래? 무슨 이유라도 있나? 자네 같은 화가들이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인간들이라니까! 자네들은 명성을 얻으려고 별별 짓을 다 하지. 그러다 막상 명성을 얻고 나면 당장에 그걸 내다버리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굴더군.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인데, 세상에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딱 한 가지 있으니, 바로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라네. 이 정도 초상화라면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보다 단연 뛰어날 테고, 노인네들은 꽤나 시샘을 부릴 거야. 물론 노인네들이 무슨 감정이라도 드러낼 줄 안다면 말이지.”
“자네가 날 비웃을 줄 알았어.” 바질이 대꾸했다. “하지만 난 절대로 이 그림을 전시할 수 없네. 이 그림에는 나 자신이 너무 많이 반영되어 있거든.”
헨리 경은 소파 겸 침대에 길게 누워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비웃을 줄 알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결심에는 변함이 없어.”
“그림 속에 자신이 너무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이런 세상에, 바질, 자네가 그렇게 자만심이 강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네. 무뚝뚝하고 억센 얼굴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자네와 상아와 장미 꽃잎으로 만든 것처럼 잘생긴 이 젊은 아도니스 사이에 어디 닮은 구석이 있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는걸. 이보게, 바질, 자네 초상화 속 인물은 나르키소스이고, 자네는… 아, 물론 자네한테는 지적인 표현력이나 뭐 그런 것들이 있지. 하지만 아름다움, 그러니까 진정한 미는 지적인 표현력이 시작될 때 끝나버린다네. 지성은 그 자체가 과장된 양식이라서, 어떤 얼굴이든 조화를 파괴해버리지. 생각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는 순간, 사람은 오로지 코나 이마만 남거나 끔찍한 무언가가 되어버린다고. 학식이 필요한 전문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게나. 하나같이 어찌나 그렇게들 흉측하게 생겼는지! 물론 교회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예외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교회에서는 너무들 생각을 안 해. 주교는 여든 살이 되어도 열여덟 살 소년 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말하고 있으니, 언제나 대단히 유쾌한 표정을 짓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지. 자네가 그린 저 신비로운 젊은 친구는 말이야, 아직 내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친구의 초상이 내 혼을 쏙 빼놓는 게, 보나마나 이 친구는 생각이라는 걸 전혀 하지 않을 거야. 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이 친구는 딱히 볼 만한 꽃이 없는 겨울에 반드시 이 자리에 있어주어야 하고, 머리 식힐 무언가가 필요한 여름에도 언제나 이곳에 있어주어야 하는, 머리가 빈 아름다운 피조물이야. 착각하지 말게, 바질. 자네와 저 그림은 조금도 닮지 않았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해리.” 화가가 대꾸했다. “물론 난 이 친구와 닮지 않았어. 그건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네. 사실 내가 이 친구를 닮았다면 그것 또한 무척 유감스러운 일일 거야. 믿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난 사실을 말하는 걸세. 육체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모든 탁월한 면모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어떤 숙명이, 역사를 통틀어 몰락해가는 왕들 곁에 끈질기게 붙어 다니는 숙명과도 유사한 비운의 숙명이 깃들어 있어. 그러니 차라리 주변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생기는 편이 훨씬 좋은 법이지. 추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언제나 이득을 보기 마련이야. 그들은 입을 헤벌리고 만사태평하게 앉아 연극을 구경할 수 있거든. 승리가 뭔지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패배가 뭔지 모르고도 잘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들은 우리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삶, 마음 편히, 아무런 걱정 없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거라고. 다른 사람을 몰락하게 하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 때문에 몰락하는 일도 없어. 해리, 자네에게는 지위와 부가 있고, 나에게는 변변치 않지만 두뇌가 있으며 그 가치야 어떻든 나만의 예술 작품이 있네.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에게는 아름다운 외모가 있지.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신들이 우리에게 준 것들 때문에 고통을 치르게 될 거야. 아주 혹독한 고통을 말이야.”
“도리언 그레이라고? 그게 이 젊은이 이름인가?” 헨리 경이 화실을 가로질러 바질 홀워드를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그렇다네, 그것이 이 젊은이의 이름이야. 이름을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왜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는 건가?”
“글쎄,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워. 난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에게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지. 이름을 말해버리면 그 사람의 일부를 내주는 것 같거든. 난 점점 비밀을 좋아하게 됐다네. 오직 그것만이 현대의 삶을 신비하게 혹은 경이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 같아. 아무리 흔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밀로 감추고 나면 아주 매력적인 것이 되니까 말이야. 만일 내가 지금 이 도시를 떠난다면, 어디로 갈지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말을 해버리고 나면, 나만의 즐거움을 온통 빼앗기게 될 테니까. 어쩌면 어리석은 습관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습관이 인생에 어마어마한 로맨스를 가져다줄 것 같거든. 이런 나를 지독하게 어리석은 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헨리 경이 대답했다. “이보게, 바질, 그럴 리가 있나. 자네는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은데, 결혼의 매력이라면 한 가지, 부부 두 사람 모두를 위해 반드시, 기필코, 기만적인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것이지. 나는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아내 역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몰라. 우리가 만나면아, 물론 가끔은 만나기도 한다네, 가령 같이 외식을 한다든지, 공작의 집에 초대되어 간다든지 할 때 말이야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아주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지. 아내는 그런 일에 아주 능숙해실제로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니까. 아내는 다른 남자와 만날 약속을 헛갈리는 일이 결코 없지만 나는 매번 약속을 헛갈리거든. 하지만 설사 내가 하는 짓을 들킨다 하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소란을 피우는 법이 없네. 가끔은 아내가 좀 그래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지만, 그저 나를 비웃을 뿐이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듣기 좀 거북하군, 헨리 경.” 바질 홀워드가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자넨 실제로는 아주 좋은 남편이면서 자신의 미덕을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것 같군. 자네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도덕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행동을 한 적도 없지.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자네는 그저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것뿐이라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것이지. 세상에 그것처럼 짜증나는 가식도 없을걸.” 헨리 경은 소리 내어 웃으면서 크게 외쳤다.
곧이어 헨리 경과 화가는 함께 정원으로 나가 커다란 월계수 그늘에 놓인 기다란 대나무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앉았다. 반짝이는 나뭇잎 위로 햇살이 미끄러져 내렸다. 풀밭 속에 핀 하얀 데이지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헨리 경이 시계를 꺼내들었다. “이만 가봐야겠군, 바질.”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기 전에 조금 전 자네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겠는데.”
“무슨 질문 말인가?” 화가는 줄곧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자네도 잘 알잖아.”
“모르겠는데, 해리.”
“그렇다면 다시 말하지. 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전시하려 하지 않는지 설명해주었으면 해. 난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
“진짜 이유에 대해 이미 말했을 텐데.”
“아니, 자네는 아직 말하지 않았어. 그림 속에 자신이 너무 많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긴 했지. 한데 그건 너무 유치한 이유 아닌가.”
“해리.” 바질 홀워드가 헨리 경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떤 초상화든 화가가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린 그림이라면 모델이 아닌 바로 화가 자신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어. 모델은 그저 우연히, 필요에 의해 그 자리에 앉게 된 인물에 불과하지. 화가의 손에 의해 드러난 인물은 모델이 아니라네. 채색된 캔버스 위에 나타난 인물은 모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화가 자신이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이 초상화를 전시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깃든 내 영혼의 은밀한 부분을 보여주기가 꺼려져서라네.”
헨리 경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다면 그 은밀한 부분이란 게 뭔가?” 그가 물었다.
“말해주지.” 홀워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정말 기대되는걸, 바질.” 친구가 화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 실은 별로 이야기할 만한 거리도 못 된다네, 해리.” 화가가 대꾸했다. “그리고 자네가 내 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할까봐 걱정되기도 하고. 그래, 아마 자넨 좀처럼 믿지 못할 거야.”
헨리 경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앞으로 구부리더니 풀밭에서 분홍색 꽃잎이 달린 데이지 꽃 한 송이를 꺾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네 말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네.” 그가 동그란 원 주위로 황금빛이 감도는 하얀 털이 달린 데이지 꽃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무얼 믿는 일에 대해서라면, 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바람이 나무의 꽃들을 흔들어대자, 별모양의 꽃잎들이 송골송골 맺혀 무겁게 드리워진 라일락 꽃들이 나른한 공기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메뚜기 한 마리가 담벼락 아래에서 츠츠츠츠 울어대기 시작했고, 푸른색 실처럼 길고 가녀린 잠자리는 갈색 거즈 같은 날개를 펴고 허공을 날아다녔다. 헨리 경은 바질 홀워드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고,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몹시 궁금했다.
“별 이야기는 아니야.” 얼마 후 화가가 입을 열었다. “두 달 전, 브랜든 부인 댁에서 열린 연회에 갔었지. 알다시피 우리처럼 가난한 예술가들은 이따금씩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야 해. 우리가 무례한 족속들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일러두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언젠가 자네가 내게 말했듯이, 연미복에 흰색 타이를 매면 누구라도, 심지어 주식 중개인조차도 교양이 높다는 평판을 얻을 수 있으니까. 과하게 몸치장을 한 미망인들과 따분한 왕립 미술원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십 분쯤 방 안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 나는 반쯤 몸을 돌리다가 도리언 그레이를 처음 보았다네. 서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내 안색이 차츰 창백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 묘하게 두려운 감정이 엄습하더군. 그 존재만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이라, 내 본성 전체와 내 영혼 모두와 내 예술 자체를 송두리째 흡수해버릴 것 같은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지. 지금까지 난 인생에서 외부의 어떠한 영향도 받고 싶지 않았어. 해리,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내가 천성적으로 얼마나 독립적인 사람인가. 난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속박을 받은 적이 없어.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래 왔지,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런데…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무언가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어. 이제 곧 내 인생에서 아주 끔찍한 위기가 닥치게 될 거라고 말이야. 운명이 나를 위해 더할 수 없는 기쁨과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준비해두었구나, 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어. 나는 점점 두려워져서 방을 나오려고 얼른 몸을 돌렸다네. 양심 때문에 그랬던 건 아니야. 뭐랄까, 겁이 났다고나 할까. 어쨌든 도망치려고 했으니 잘한 짓이라고 볼 수는 없지.”
“사실상 양심과 비겁함은 같은 것일세, 바질. 양심은 고집 센 사람들이 갖다 붙인 이름일 뿐이야. 그게 전부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해리. 그리고 자네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네. 그렇지만 내 동기가 무엇이 됐든그래, 난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자존심이 동기가 됐을지도 모르겠군분명히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어.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서 브랜든 부인과 마주쳤지 뭔가. ‘설마, 벌써 달아나려는 건 아니시죠, 홀워드 씨?’ 브랜든 부인이 큰 소리로 외치더군. 그녀의 찢어질 듯 날카로운 그 희한한 목소리, 자네도 알지?”
“알다마다. 그 부인은 모든 면에서 공작새 같은 여자야. 미모를 내세울 수 없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야.” 헨리 경이 길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손가락으로 데이지 꽃잎을 조각조각 뜯으며 말했다.
“도무지 브랜든 부인을 떼어낼 재간이 없더군. 그녀는 왕족들에게 나를 소개시켰고, 스타 훈장과 가터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보석이 박힌 거대한 티아라로 머리를 꾸미고 코는 앵무새 부리처럼 생긴 중년 부인들에게도 데리고 갔어. 나를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소개하면서 말이야. 연회 전에 그녀를 본 건 딱 한 번뿐인데,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나와 각별한 사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지 뭔가. 물론 당시 내 그림 몇 점이 제법 성공을 거두어 어쨌든 여러 일간지에서 화제로 떠오르긴 했지. 불후의 명성에 대한 19세기식 기준이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전 강렬한 매력으로 나를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하게 만들었던 그 젊은이와 정면으로 딱 마주보고 서 있지 않겠나. 서로 어찌나 가까이 서 있었는지 거의 몸이 닿을 정도였다네. 다시 우리의 눈빛이 마주쳤어. 나로서는 무모한 일이었지만, 젊은이에게 나를 소개해주십사 하고 브랜든 부인에게 청했지. 하긴 어쩌면 그다지 무모한 짓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우리의 만남은 그야말로 필연적이었으니까. 소개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었을 거야. 난 그렇게 확신해. 도리언도 나중에 그렇게 말하더군. 우리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었다는 걸 그도 알았던 거지.”
“그렇다면 브랜든 부인은 이 굉장한 젊은이에 대해 뭐라고 설명하던가?” 화가의 친구가 물었다. “내가 알기로 그 부인은 자기 손님들에 대해 신속하고도 간단하게 설명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 것 같던데. 한번은 온몸에 훈장이며 리본을 주렁주렁 단 호전적이고 얼굴이 붉은 노신사에게 나를 데리고 가더니만, 내 귀에다 대고 쉬쉬 하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노신사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 놀랄 만큼 자세하게 들려주는데, 방 안에 있던 사람 모두 부인이 말하는 소리를 똑똑히 듣고도 남았을걸. 물론 난 얼른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지. 난 직접 사람을 찾아나서는 걸 좋아하거든. 하지만 브랜든 부인은 마치 경매인이 경매 물건 대하듯 자기 손님들을 대한단 말이지. 손님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모조리 시시콜콜 설명하거나, 아니면 알고 싶어하는 부분은 쏙 빼고 그 나머지만 주야장천 이야기하지.”
“불쌍한 브랜든 부인! 너무 가혹하게 말하는군, 해리!” 홀워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봐, 그녀는 상류사회 명사들의 모임을 만들어보려 했지만 기껏해야 음식점을 여는 데 그쳤을 뿐이야. 그런 여자를 내가 무슨 수로 칭찬하겠어? 그건 그렇고, 이제 말해봐, 브랜든 부인이 도리언 그레이 군에 대해 뭐라고 말했나?”
“아, 대략 이런 이야기였지. ‘정말 매력적인 젊은이에요… 불쌍한 그 어머니와 난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랍니다. 아,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시는지 깜박했네, 그래… 안 됐지만…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고 하셨던가… 아, 그래요, 피아노를 친다고 했지… 아닌가, 바이올린이었나요, 우리 그레이 씨?’ 그러다 보니 둘 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고, 그렇게 금세 친구가 되었네.”
“웃음은 우정을 시작하기에 결코 나쁘지 않은 방법이며, 우정을 끝내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지.” 젊은 귀족이 데이지 꽃 한 송이를 더 뜯으며 말했다.
홀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우정이 뭔지 잘 모르는군, 해리.” 그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넨 적개심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자네는 모든 사람을 좋아하니까 말이야. 다시 말해 그건 모든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말도 안 되는 말씀!” 헨리 경이 모자를 뒤로 젖히고, 희미한 청록빛 여름 하늘 위를 떠다니는 흰색의 매끄러운 비단 실타래 같은 작은 구름들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렴, 말도 안 되는 말이고말고. 내가 사람을 얼마나 가리는데. 나는 외모가 잘생긴 사람은 친구로, 성격이 좋은 사람은 그냥 아는 사람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적으로 삼는다네. 모름지기 적을 선택할 땐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지나치지 않지. 아, 물론 멍청한 사람은 어느 쪽에도 가까이 두지 않는다네. 그들 모두가 어느 정도는 지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결국엔 모두들 나를 높이 평가해. 내가 허영심이 너무 큰가?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난 허영이 다소 과한 편이지.”
“그렇고말고, 해리. 한데 자네 범주대로 따르자면 난 그저 아는 사람에 불과하겠군.”
“이봐, 바질, 자네는 그냥 아는 사람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야.”
“그렇다면 친구보다는 훨씬 덜 중요하겠군. 형제쯤 되나?”
“오, 형제라! 난 형제들을 좋아하지 않는걸. 내 형은 도통 죽을 것 같지 않고, 밑으로 동생들은 다른 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기 때문이지.”
“해리!” 홀워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봐, 진담은 아니야. 하지만 난 내 피붙이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네. 그건 아마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걸 도저히 참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거야. 나는 소위 상류층의 악덕에 반대하는 영국 서민들의 분노에 깊이 동감하는 바네. 서민들은 술주정이라든지 어리석은 행동, 부도덕한 행동이 자기들만의 특별한 소유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우리 같은 상류층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런 바보짓을 하면 마치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것처럼 여기더군. 가난한 동네 서더크에 이혼 법정이 들어섰을 때 서민들의 분노는 말도 못할 정도였잖은가. 그렇지만 최하층민 가운데 똑바로 사는 사람은 십 퍼센트도 되지 않을걸.”
“난 자네가 하는 말에 한마디도 동의할 수 없고, 해리 자네 역시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네.”
헨리 경은 뾰족한 갈색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술이 달린 흑단 지팡이로 자신의 에나멜가죽 부츠의 발끝을 톡톡 두드렸다. “자넨 정말 영국 사람 같은 말만 하는군, 바질! 자네가 이런 발언을 한 게 벌써 두 번째야. 누군가 전형적인 영국 사람에게 어떤 생각을 제시하면이런 짓은 언제나 경솔한 짓이지그 사람은 그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그가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오로지 사람들이 그 생각을 믿느냐 아니냐 하는 것뿐이지. 한데 이 생각의 가치라는 게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의 진실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네.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이 진실하지 않을수록 생각은 순수하게 지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큰데, 왜냐하면 그 경우 생각이 말하는 사람의 바람이나 욕망 혹은 편견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자네와 정치학이나 사회학, 형이상학 따위를 논하자는 게 아닐세. 나는 원칙보다는 사람이 좋고, 세상 그 무엇보다 원칙 없는 사람을 좋아해. 그나저나, 도리언 그레이 군에 대해 좀 더 말해보게. 그와 얼마나 자주 만나나?”
“매일 만나. 하루라도 그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거든. 그는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야.”
“정말 의외군! 자네는 자네의 예술 말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가 내 예술 자체라네.” 화가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리,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세계 역사에 중요한 시기는 단 두 번뿐이라고 말이야. 첫 번째는 새로운 예술 매체가 등장했을 때고, 두 번째는 역시 새로운 예술의 성격이 등장했을 때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유화의 발명이 그랬듯이, 후기 그리스 조각에서 안티노오스(로마 황제 하이드리아누스가 총애하던 미소년)의 얼굴이 그랬듯이, 머지않아 내게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 중요한 의미가 될 거야. 나는 단순히 그를 그리고 색칠하고 스케치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거라네. 당연히 그런 작업들도 모두 이루어지지. 하지만 그는 내게 단순히 모델이나 초상화의 대상 이상의 존재야. 그를 그리는 작업이 만족스럽지 않다거나 그의 미모가 예술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예술이 표현하지 못할 것은 없으며, 내 작업은, 정확히 말해 도리언 그레이를 만난 후 내 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사실상 내 인생 최고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존재는 내게 좀 묘한 방식으로글쎄, 자네가 내 말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완전히 새로운 예술 방식을, 예술 양식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방식을 제시해주었지. 나는 이제 사물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게 됐어. 이제는 과거에 내 속에 감춰졌던 방식으로 삶을 재창조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색의 시대에 외형의 꿈을(오스틴 돕슨의 시 ‘그리스 소녀에게 To a Greek Girl’의 한 구절. 이 시에서 시인은 상상 속에서 ‘꿈’으로 존재하는 ‘님프를 닮은’ 처녀 아우토노에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묘사했다)’이라는 시구가 있지이 시에서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더라? 누군지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내게는 이 시에서 가리키는 대상이 바로 도리언 그레이라네. 이 소년사실상 스무 살이 넘었지만 내게는 소년이나 마찬가지니까의 존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그저 보기만 해도 그의 존재를 알 수 있단 말이지…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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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1854-1900)
1854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시인인 어머니와 유명한 의사이자 민속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유미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888년 단편집 『행복한 왕자』를 발표했고, 1891년에는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2년에는 단편집 『석류나무 집』을 발표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발표 당시 격론을 일으켰으며, 특히 『행복한 왕자』는 19세기 말 물질주의가 만연한 영국 사회에 사랑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이상주의를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 작품으으로, 비평가 월터 페이터로부터 동화 중의 걸작이라는 격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독설과 위트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탁월한 말솜씨로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원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진지함의 중요성』(1895) 같은 희곡으로 극작가로서 위상을 다졌으며, 1893년에는 비극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1895년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옥중기』를 썼다. 1897년에 출옥하여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900년에 사망했다. 사후 거의 백 년이 지난 1998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제명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와일드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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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서민아
전문번역가. 학부에서 영문학과을,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했다. 옮긴 책으로는 『아르테미스 파울』, 『모자를 먹는 남자』, 『달콤한 잠의 유혹』, 『아담과 이브의 일기』, 『프랑켄슈타인』,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주홍글씨』, 『라라의 눈부신 날들』, 『책사냥꾼』, 『첫 출근 전날 읽는 책』, 『히든 페이스』, 『프로즌 파이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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