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는 사람들
벌판을 가로질러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우우우.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굶주린 늑대가 뛰쳐나올 것만 같습니다.
아이는 무서움을 꾹 참았습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아이는 귀마개를 하고도 추운지 두 손으로 자꾸 귀를 가렸습니다. 곁에서 걷던 아버지가 싱긋 웃었습니다.
“우리 고만녜가 추운가 보구나. 그러게 엄마한테 업혀 가라니까.”
“이깟 추위쯤 참을 수 있어요.”
“허허, 우리 고만녜도 다 컸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면서 두 손으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자, 봐라. 저 두만강을 건너야 한다.”
짙은 눈보라 속에서도 꽁꽁 언 얼음강을 분명히 가려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두만강!
아버지에게는 지금처럼 얼어붙은 강 위에서 팽이를 치며 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동무들과 헤엄을 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고기를 잡아서 배가 터지도록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이 들 대로 들었지요. 슬플 때는 강둑에 나가 잔잔히 흐르는 푸른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 강은 어느새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어째 얼굴에 그늘이 짙소이다.”
키가 훤칠한 사내가 곁으로 다가서며 말을 건넸습니다. 고향 오룡천에서 함께 공부를 하며 자란 동무였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지 했으면서도, 막상 닥치니 어째 기분이 묘합니다.”
“당연하지요. 내 나라를 떠난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쉽겠소?”
“그래도 희망을 가집시다. 빼앗긴 나라를 반드시 되찾겠다는 희망 말입니다.”
사내가 아이 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자위가 약속이라도 한 듯 붉어졌습니다.
“어, 어른들이 우나 봐요?”
고만녜가 두 어른을 올려다보면서 물었습니다.
“울지 마세요. 두만강이 흉봐요.”
“뭐?”
아이의 말에 두 사람은 금세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래, 두만강이 흉보겠다. 저렇게 미련한 동포들이 다 있나 하고 말이야.”
“하하, 우리 희망은 바로 이런 아이들입니다.”
“그렇지요. 아이들만큼은 제대로 키워야지요.”
두 사람은 다시 각오를 다졌습니다.
눈보라는 좀처럼 잦아들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수레를 따라 길게 줄을 선 행렬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만녜의 아버지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눈보라 때문에 눈에 담기는 풍경이 더욱 아득해 보였습니다. 고만녜는 아버지의 눈자위가 또다시 붉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고만녜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고만녜에게 괜히 미안했습니다. ‘고만녜’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원래 딸은 이제 고만 낳으라는 뜻에서 어른들이 붙여 주신 이름이었거든요.
‘휴우, 고만 낳았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하하.’
아버지도 고만녜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1899년 2월 18일, 함경북도 종성과 회령에 살던 우리나라 사람 네 가문, 총 141명이 이렇게 두만강 너머 중국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명동학교
저만큼 떨어진 곳에 선바위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말이 바위지, 둘레의 나지막한 산언덕보다 훨씬 크고 웅장합니다. 나그네들이 이정표로 삼을 만했지요. 그 앞쪽으로는 실개천이 흐릅니다. 용정을 오가는 신작로도 구불구불 이어집니다.
동구 밖에서 마을 사람들이 그 굽이길을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모이를 바라는 닭처럼 목을 길게 뺀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선생님이실까?”
“보나마나 수염이 닷 발이나 늘어진 훈장 어른이시겠지.”
“에이, 그런 분이 신학문을 하셨겠어?”
사람들이 이렇게 두런거릴 때 누가 나타났습니다. 개천가를 따라 천천히 걸어오는 그 사람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졌습니다.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애걔걔, 저이가 선생님이야? 우리가 잘못 본 것 아냐?”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눈앞에 스물 서너 살쯤 되었을까 싶은 청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청년이 마을 사람들을 보고 빙긋이 웃었습니다.
“선생님, 잘 오셨습니다.”
누군가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젊은 선생님도 따라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마지못해 허리를 굽혔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정재면입니다. 여기 명동 땅에 신학문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겠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부디 많이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월급을 많이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이것만큼은 들어주셔야 합니다.”
“어떤 부탁이든 저희들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들한테 성서를 가르치게 해 주십시오.”
“네?”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성서가 뭐지?”
“성서도 몰라? 기독교에서 만든 책 말이야.”
“논어, 맹자 같은 건가?”
“낸들 아나?”
“나는 싫어. 그거 서양 귀신 믿자는 이야기 아냐?”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며? 그렇다면 왜놈도 사랑하라는 말인가? 도대체 간을 도려내도 시원찮은 마당에 어떻게 철천지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지?”
정재면 선생님은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그날부터 정재면 선생님은 명동학교에서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명동은 두만강 건너에 있었습니다. 두만강 만주 땅은 청나라 황제가 태어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먹을 게 없는 조선 사람들은 그 땅을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중국에 속해 있지만, 만주는 고구려의 옛 땅이기도 했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곤 했습니다. 낌새를 챈 관리가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둘러댔습니다.
“어디긴요, 간도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요.”
간도는 원래 두만강 안에 있는 섬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샛섬間島: 사이 간, 섬 도이 되겠지요. 그곳은 금지 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로는 강 건너 만주 땅에 들어가면서도 간도에 간다고 둘러댔던 것입니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간도’도 점점 넓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두만강 북쪽, 지금의 연변 땅을 다 간도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간도의 ‘간’ 자를 ‘개간할 간墾’ 자로 쓸 정도였습니다.
결국 조선과 중국은 합의를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을 건너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명동 땅의 조선 사람 마을들도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렇지만 ‘동쪽조선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는 마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명동에는 처음부터 교육을 목적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올바른 교육을 해야만 망해 가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동에는 두만강변에 자리한 회령과 종성에서 살던 김약연, 김하규, 문치정, 남위언 같은 선각자들이 미리 마련해 둔 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그 땅에 학교를 지었습니다.
1908년 4월 27일, 명동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학교는 세웠지만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신학문을 가르칠 선생님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모셔 올 수는 없었습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선생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수소문 끝에 서울 청년학관 출신 정재면 선생님을 모셔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학교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문치정의 아들 문재린도 이 학교 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학교에 나왔습니다. 나이에 상관 없이 다들 배우는 게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신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엇처럼 보이나요?”
“낫처럼 생겼어요.”
“맞았습니다. 낫처럼 생긴 이 글자가 기역입니다. 따라 해 보세요. 기역!”
“기억!”
“아니, 기억이 아니고 기역입니다.”
“기윽!”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모두 즐겁게 공부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약속대로 성서도 배웠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찬송가도 불렀습니다. 처음 예배를 볼 때는 ‘아멘’ 하는 소리가 꼭 송아지가 ‘음메’ 하고 우는 소리 같다고 깔깔거리기도 했습니다.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정재면 선생님이 갑자기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마을 어른들은 깜짝 놀라서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정재면 선생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른들도 성서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 학교를 그만두겠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더러 서양 귀신을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서양 귀신이라니오? 기독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사랑을 믿는 종교입니다.”
정재면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원수인 왜놈들을 어떻게 사랑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오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누구보다도 일본의 조선 침략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일본이 아주 싫어하지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의 힘이 총칼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민족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열심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의로운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어른들은 여전히 망설였습니다. 정재면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뜻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이 학교를 왜 세웠습니까? 바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뒤떨어진 생각에만 매달려 있으면 일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여러분을 헛된 길로 이끌지 않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며칠을 두고 의논을 거듭했습니다.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명동에 모여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선뜻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명동의 유학자들은 고리타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학을 공부했으되, 앉아서 책만 읽는 샌님은 아니었습니다. 논밭에 나가 김도 매고 물지게도 지어 날랐습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학문은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생활 속에서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자세도 잃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유학자들도 정재면 선생님의 뜻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일본을 이기는 일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앞선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11년,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은 명동학교 학생 문재린은 김하규의 딸 고만녜와 결혼했습니다.
1918년, 두 사람 사이에 첫아이 문익환이 태어났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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