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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공모전이라는 시스템
문학공모전, 대학 입시, 대기업 공채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상대방은 자신을 한국경제신문의 문학 담당 기자라고 소개했다. 어색하고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용건이 나왔다.
“저희 신문사가 올해로 3회째 한경 청년신춘문예2017년부터 한경 신춘문예로 바뀌었다 공모전을 하고 있거든요. 혹시 들어 보셨나요?”
“어…… 그…… 아! 압니다. 『청춘 파산』이 그 공모전 작품이죠?”
내가 간신히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예, 맞아요! 저희 2회 수상작입니다.”
문학 담당 기자는 청년신춘문예 공모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수 있게 돼 안도하는 눈치였다. 나는 『청춘 파산』을 읽지 않았으므로 가급적 화제가 그쪽으로 가지 않길 바랐다.
“그 공모전 올해 접수 마감이 이제 일주일가량 남았거든요. 그래서 저희 공모전을 준비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선배 문인들이 전하는 조언을 모아서 기사로 써 보려 하고 있습니다. 장강명 선생님한테서도 한 말씀 들을 수 있을까요?”
문학 담당 기자가 물었다.
“어…… 그…… 그러니까 그게 뭐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5년 전의 내가 지금 앞에 있다면 무슨 조언을 할까?
“떨어져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공모전은 소개팅 같은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꼭 내 탓이 아니더라도 인연이 안 닿을 수 있는 거고, 안 되면 다음 소개팅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요.”
말을 마치고 난 뒤에야 ‘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은 ‘청년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나를 몰라봐 주면 그 원고로 세계문학상에 또 응모하면 된다’는 식의 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다행히 문학 담당 기자는 노련했다.
“아, 좋은 말씀이네요. 그리고 또 어떤 조언을 더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4년 전쯤의 내가 앞에 있다면 무슨 말을 해 줄까, 하고 생각했다. 『표백』을 써서 한겨레문학상에 응모했을 때…… 그때 나는 접수 마감일에 맞춰 글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퇴고는커녕,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선된 다음에 제출했던 원고를 다시 읽어 보니 뒷부분에 정확히 똑같은 문단이 두 번 들어가 있었다.
“음…… 마감에 쫓기면 무리하게 결말을 바꾸거나 요행을 바라면서 퇴고를 생략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느니 차라리 이번은 아니다, 다음 공모전을 노리자, 그런 생각으로 원래 쓰려던 글을 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 이것도 아닌데. 상대방은 지원자들이 무리해서라도 청년 신춘문예에 많이 글을 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전체 응모작이 몇 편이었고, 당선작이 몇 대 일의 경쟁률을 뚫었다는 정보는 문학상의 권위와 직결된다.
문학 담당 기자는 이번에도 노련했다.
“아, 좋은 얘기네요. 그러니까 마감에 너무 심하게 압박받지 말고 자신의 호흡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제가 하려던 이야기가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화가 몇 분간 더 오갔다. 우리는 의례적인 덕담을 나눈 뒤 통화를 마쳤다.
처음에 나는 이때 통화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글로 쓰려 했더랬다. 뭔가 실질적인 조언들 말이다.
폰트는 어떤 글씨체로, 어떤 크기로 쓰는 것이 유리한가? 줄 간격이나 용지 여백은?
문학상마다 선호하는 문체나 스타일, 주제가 있는가?
한 원고를 여러 공모전에 내면 불리한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가?
필명으로 내는 것이 좋은가, 실명이 나은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문학공모전 당선자들이나 심사위원들에게 물어보고, 그들이 말하는 답을 전해 주는 글을 쓰고자 했다. 실제로 그런 내용도 이 책에 어느 정도 들어 있다.
그런데 그런 작업을 하는 동안 질문들은 점점 늘어났다.
‘문학적인 글’을 내야 하나? 장르소설 내면 떨어지나? 충격적이고 트렌드에 맞는 소재를 선택하는 게 좋을까? 가능하면 사회비판적인 내용으로? 우파보다는 좌파적인 관점에서?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심사는 신뢰할 만한가? 그들의 심사에 공통된 기준이나 합의 같은 것이 있는가? 일관되게 높이 평가하는 중점 요소라도 있나? 아니면 매년 오락가락하는 건가? 왜 어떤 해에는 파격적이지만 어설픈 작품이 뽑히고 어떤 해에는 아름답지만 고루한 작품이 뽑히는가? 가끔 칙릿이나 역사소설이 뽑히는 이유는 뭔가?
문학상마다 스타일이 있다면 그건 주최 측이 의도한 건가? 아니면 저절로 만들어진 걸까? 거기에 맞춰 응모 전략을 짜야 하나? 문학상마다 뚜렷한 선호 스타일이 있는 게 좋은 건가, 반대인가? 총체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의 ‘문학상 스타일’이라는 게 있을까? ‘문학상 소설’, ‘문학상 시’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그것은 좋거나 나쁜 것인가?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모조리 거부해야 할 정도로 나쁜 것인가, 아니면 서점에 적당한 비율로는 존재하는 게 바람직한 정도로 나쁜 것인가?
이른바 ‘등단’을 하지 않고 작가가 되면 불리한가? 불리하다면 어떤 점이 불리한가? 불리하다면 어떤 점이 불리한가? 등단을 하지 않은 작가에 대한 차별은 실제로 있나? ‘문단 권력’은 존재하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또는 필요악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동안 문학공모전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入試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몇몇은 이 시스템 자체가 뭔가 잘못됐다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 시스템이 그럭저럭 기능한다고 여긴다. 어쨌거나 그 시스템은 한국 사회에 너무나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기가 참으로 팍팍하다.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패배자로 살아가는 게 나을 정도다. 수능을 거부하는 학생운동가보다는 대학에 떨어져 고졸 학력인 사람이 눈총을 덜 산다.
다만 이 ‘입시-공채 시스템’이 예전처럼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한다. 몇몇은 이 시스템이 거의 한계에 온 것 아닐까 내심 걱정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선발 시험이 이제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시험 자체가 부당한 계급사회를 만드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는 지망생들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는 경직성이 근본 원인이다.
비판자들은, 합격자들이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지위를 단단히 하는 데 입시를 악용하고, 그걸 일종의 산업으로 만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문단의 폐해’라는 것들도, 큰 틀에서 보면 사실 한국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끼리끼리 문화’의 문학계 버전에 불과하다.
이런 공격들은 아직까지는 입시-공채 시스템을 흔들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일단은 그런 비판이 막연한 이론과 발작적인 인신 공격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안이 없다. 진보적인 가치와 근거 없는 기대를 섞은 실험이 몇 번 있긴 했다. 하지만 대개 부작용은 눈에 확 띈 반면 긍정적인 효과는 잘 보이지 않았다.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다. 문학관에서건 기업 공채에서건.
문학공모전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시스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또는 이런 질문.
이런 시스템이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입시-공채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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