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간추린 생각들
2010
생명체를 기능에 따라 분석하려 드는 과학에서는 기관, 세포, 심지어 아주 작은 입자까지 나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그 행위에 담긴 보이지 않는 의도까지 알아야 한다.
물론 이 실제로 존재하는 지식의 가능성과 유용함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유용한 지식이 얼마나 좁은지, 유용함을 얻는 대신 어떤 것을 잃어야 했는지도 또한 잘 알고 있다. 이런 지식은 한편으로는 분명 진실이지만, 그 진실이란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또한 완벽하지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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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동안에는, 나는 내 생각과 행동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삶을 건강하게 하고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분석적인 과학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는 모든 주장에 반대할 것이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정말로 자기들의 일상생활에서 그런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는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분석적인 과학에 따르면 전체는 각 부분이 일시적으로 합해진 큰 덩어리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산도 마찬가지다. 시장에 내다 팔기에 적합하지 않은 물질들이 운 나쁘게 마구잡이로 뒤섞인 ‘자원’ 덩어리일 뿐이다.
사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사이에는 원래부터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 지구가 돈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해가 뜬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증거를 통해, 믿을 만한 방법으로 증거를 입증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안다. 때로는 이성에 의해 믿도록 설득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엄청난 양의 경험에 비춰 볼 때 이성은 제한되어 있고 허약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봄’으로써만 믿게 된다. 우리는 뚜렷한 것, 마음으로 상상하거나 ‘그려 볼 수’ 있는 것, 진짜라고 느낄 수 있는 것, 마음이 인정하는 것, 직접 겪어 본 것, 그리고 어쩌면 그 무엇보다 이야기로 들은 것을 믿는다.
우리가 부분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보는 행위가 없다면 부분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창세기」에 있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라는 대목은 옳다. ‘혼자’라는 말은 말 자체로 모순이다. 뇌만 혼자 따로 있다면 그것은 죽은 뇌다. 따라서 혼자인 인간도 죽은 인간이라 할 수 있다.
* 「창세기」 2장 18절.
흔히 인간은 동물일 ‘뿐’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그렇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에게 특별히 인간의 미덕에 대해 가르친다. 그것은 분명 인간이 ‘그저’ 동물일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식과 믿음에 대해서 마음 속에 자꾸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믿음과는 별개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단 말인가? 「욥기」 19장 25절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처럼, 비단 종교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나 공감, 용서 같은 우리 가족과 이웃의 평범한 동기에도 해당되는 의문이다. 사랑, 공감, 용서 같은 동기는 다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시장 가치만을 믿는 사람들은 같은 지식을 갖고 있는 걸까? 지식이 얼마나 다른지 재거나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증명된 셈이다. 의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동물 이상의 것이 있다.
지금은 인간의 몸을 해부해 내부 구조를 하나하나 분리된 원자**처럼 다 알고 이해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이들의 전체를 사랑하고 또 가르친다. 또 아이들의 온전함wholeness, 다시 말해 이이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책무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은 이리저리 쪼개고 나누어진 의료 산업에 간단히 넘겨줄 수 있는 책무가 아니다. 아무리 치료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산업 의학 분야에서 말하는 치료는 인간의 몸을 상품으로 만든다. 시장 가치가 있는 것들만 뽑아낸다. 그런 뜻에서 치료는 치유가 아니다. 치유는 사람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거나 아니라거나, 의학적으로 고칠 수 있다거나, 고치는 데 돈이 얼마나 든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 anatomy, '해부'와 '분리'에 해당하는 영어는 같다.
이것은 농업, 임업, 광업 같은 경관landscape 산업에도 마찬가지로 해당한다. 농업, 임업, 광업이 일단 산업화를 거쳐 버리면 기업은 더는 경관을 하나의 온전한 전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과 동물이 거주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연은 착취 산업의 자원으로 간주될 뿐이며 기업은 자연에 대한 관심도 신경도 ‘효율적’으로 벗어 던져 버렸다.
인류가 그렇게 된 것은 정신과 몸이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면만 중요하다고 하는 사고방식, 곧 대부분 청교도주의로 극단화되었다. 그래서 자연,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여러 창조물들이 다정하게 이어질 수 있는 육체적 기반을 잃고, 공감 능력도 잃어버렸다. 청교도주의를 높이 보는 현실은 얼핏 이해하기 어렵다. 유물론의 비호를 받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유물론자들은 물질성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을 기계적인 것으로 추상화한 뒤, 육체적이고 실제적인 속성을 없애 버리는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 물질적인 것을 기계적으로 바꾸었고, 또 하나, 금전적인 방향으로 추상화가 되었는데, 금전적인 방향은 다시 말해 ‘살림’, 즉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실제 경제와는 정반대인 소위 돈의 경제 쪽을 말한다. 어느 쪽으로 갔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즉 외형상으로는 유물론인 과학산업주의 문화는 유물론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근본주의적 경멸에 이른다. 그리하여 일상의 세계는 죽은 물질로 취급당하고, 그 세계의 가치는 오로지 ‘시장’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현실에 대한 이런 경멸감은 사람들에게 더 깊이 파고들었고, 또한 매우 정치화되었다. 영성만을 중시하는 종교가 현실에 대해 갖는 경멸감과 더해지면서 파괴력은 엄청나게 커졌다. 그 파괴력은 이미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니 누구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육체를 잃은 정신이 무너지고, 절제를 잃게 된 과정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 또한 변명일 따름이다.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이런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인간이 머리로만 하는 사고에서 나온 생각으로부터 저를 지켜 주옵시고…….”*
예이츠는 1916년에 이런 글도 남겼다.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로 떠올린 생각이다.”**
예이츠는 같은 글에서 ‘사상의 기계적 귀결’이라며, 앞날을 내다보는 듯한 구절도 남겼다.
필립 셰러드Philip Sherrard가 그리스 시인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Anghelos Sikelianos에 대해 쓴 글은 더 노골적인 사례다.
“시켈리아노스는 당대의 서구 세계가 삶에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부여해 주던 원칙들로부터 차츰 소외되고 있으며, 통제를 벗어나 버린 기계의 상태에 접근하고 있고, 파괴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고 보았다. (…) 삶에 대한 유기적인 감각은 무수한 파편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 순전히 기계적이고 아무 쓸모도 없는 암기 과정을 극단적으로 요구하는 교육 체계는 젊은 세대의 육체와 영혼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 「노년을 위한 기도」** 에즈라 파운드·어니스트 레놀로사 지음, 『일본 희곡집Certain Noble Plays of Japan』 서문.*** 『그리스의 상처The Wound of Greece』, 72, 74쪽.
시인이자 비평가인 존 크로우 랜섬John Crow Ransom의 지적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랜섬은 전문가 체계가 문제라며 좀 더 직접적으로 비판을 했다. 랜섬은 전문가 체계가 청교도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얘기했다.
“경험을 하나하나 분리하여 각각 이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최선의 결과는 그렇게 작게 분리한 경험을 차례대로 취해 본 뒤 그 과정이 다 끝나면 하나도 놓친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 도리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한 가지 작은 경험에 너무 빠져 버리면 다른 경험으로 나아가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정해진 과정을 마치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한 가지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을 탁월하다고 보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철저한 전문가가 될 것을 요구하는 그런 사회는 어떤 경험을 놓친다고 해서 특별히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금 쓰인 어휘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어 어원에서 ‘해부anatomy’는 ‘절개dissection’란 뜻이며, ‘분리analysis’는 ‘풀다undo’라는 뜻이다. 해부니 분리니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뜻이다. 해부란 말도 분리란 말도 형식적 통합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두 말의 반대말로 가장 적당한 어휘는 역시 그리스어에서 빌려온 말, 포이에시스poiesis다. 만들기, 창조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시인과 작곡가와 장인의 작업을 뜻한다. 분석가와 해부학자의 작업과는 필연적으로 정반대가 되는 말이다. 그러니 과학자 중에는 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이들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분을 어떻게 결합할지, 관심사를 어떻게 배우고, 또 어떻게 가르칠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확실히 사람들은 부분을 전체로 만드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한다. 그 점은 우리가 이미 전체인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의 형식적 통합성을 보존하는 방법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관심도 없고 방법도 모르면 보존을 위해 노력해도 허사가 될 것이다. 필수 연결고리와 인간과 자연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규모와 형식의 문제는 아무 의미도 없고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도 못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효율적이고 해를 끼치지 않는 규모의 일에 맞는다고 믿는다. 또한 모든 결과에 책임질 수 있고, 파국적인 놀라움을 가져오지 않을 규모의 일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에 인간은 들뜨지 않는다.
인간을 들뜨게 하는 건 말하자면 기술혁신 같은 것이다. 화석연료 혁명, 자동차 혁명, 조립라인 혁명, 항생제 혁명, 성 혁명, 컴퓨터 혁명, ‘녹색 혁명’, 유전체 혁명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혁명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이나 국가가 반드시 ‘사야만’ 하는, 팔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혁명들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어쩌면 진정 유일하게 혁명적이었던 혁명의 소소한 예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은 시작부터 오직 두 가지 목적만 수행해 왔다. 사람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 그리고 무슨 쓸모가 있든 무슨 효용이 있든 제품을 최고가로 ‘시장에 내다 파는 것’, 그리하여 가능한 극소수에게 최대의 부를 집중하는 것이 바로 그 두 가지 목적이다.
산업혁명은 지금까지는 사실상 견제도 좌절도 거의 없이 그 목적을 성취했다. 내가 ‘지금까지는’이라고 한 이유는 산업혁명의 최대 약점이 바로 ‘천연자원’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천연자원’이라 부르면서 지금껏 그것을 얼마나 개념 없고 무지막지하게 착취했으며 또 파괴해 왔던가. 요컨대 산업혁명의 약점은 산업혁명이 일시적인 혁명이며, 앞으로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자연의 ‘자원’을 함부로 써 댔기 때문에 산업혁명은 결국 자연의 교정 작업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인데, 장차 이 일은 더욱 가혹해질 것이 분명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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