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보이지 않는 축구공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빈 공간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의견에 불과하다.
─ 아브데라의 데모크리토스
태초에 진공이 있었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물질도 빛도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이 존재했고, 신비한 진공은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바위가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상황과 비슷했다…….
여기서 잠깐.
바위가 굴러떨어지기 전에 미리 고백해둘 것이 있다. 사실 나는 지금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면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우주의 처음’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데이터가 없다. 그냥 없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도 없다. 빅뱅이 일어나고 10억×1조 분의 1초(10-21초)가 지난 후부터는 그나마 조금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만일 누군가가 우주의 탄생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다면, 그냥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주 탄생의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다면, 그냥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주 탄생의 순간을 논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에 가깝다. 태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게다가 무슨 연유인지 그 신은 137억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밀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래. 절벽이야기를 하다 말았지…….
진공의 균형은 깎아지른 절벽 끝에 걸쳐 있는 거대한 바위처럼 극도로 정밀하고 아슬아슬해서, 털끝만 한 변화가 생겨도 ‘우주 창조’라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태세였다. 그리고 그 사건은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무無가 초대형 폭발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빛과 함께 시간과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이 초기 에너지로부터 물질이 탄생했다. 복사輻射, radiation의 형태로 존재했던 플라스마 입자들이 물질로 변환된 것이다(이제야 비로소 몇 가지 사실로부터 이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입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새로운 입자가 탄생했고, 시간과 공간은 펄펄 끓어 블랙홀이 생성되었다가 분해되는 등 극렬한 변화를 겪었다. 구경꾼은 없었지만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우주는 탄생 직후부터 빠르게 팽창하면서 온도가 낮아지고 밀도는 감소했으며, 입자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하나였던 힘이 몇 개로 분리되었다. 이 무렵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생겨났고, 원자핵과 원자, 그리고 가스 구름이 곳곳에 뭉쳐서 별과 은하, 행성이 탄생했다. 그중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소용돌이 은하의 한 귀퉁이에 평범한 별 하나가 자리 잡았는데, 그 주변을 도는 조그만 행성에 대륙과 바다가 형성되고 바로 그 바다에서 탄생한 유기물 분자가 단백질 합성에 성공하면서 생명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후 단순했던 유기체들은 식물과 동물로 진화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 생존의 단계를 뛰어넘어 우주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변 환경에 강한 호기심을 갖는 유별난 종이었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몇 차례 돌연변이가 탄생하여 더욱 특이한 기질을 갖게 되었고, 그중 방랑벽까지 장착한 일부 종족들이 대륙의 이곳저곳을 떠돌기 시작했다. 평범한 종족이었다면 사냥을 마친 후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연과 우주의 웅장함을 즐기면서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만족을 몰랐던 그 변종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떠올렸다. ‘우주는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우주의 원재료는 어떤 조리과정을 거쳐 이토록 다양한 세계로 진화했는가? 별과 행성, 육지와 바다, 햇빛, 소나무, 수달, 그리고 인간의 뇌…… 이 복잡다단한 피조물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질문은 간단했지만 답을 찾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인류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100여 세대에 걸쳐 지식을 쌓고 전수하면서 수천 년을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애써 얻은 답 중에는 사실과 다르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많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물행인지, 이 변종들은 아무리 틀려도 창피한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그들을 “물리학자”라 불렀다.
해답을 찾아 거의 2,000년을 헤맨 끝에, 지금 우리는 창조의 숨은 비화를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인류에게는 꽤 긴 시간이었지만, 우주적 시간 스케일에서 보면 거의 찰나에 불과하다.). 관측실과 실험실에서 천체망원경과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창조의 순간에 만물을 지배했던 원초적 아름다움과 대칭을 조금이나마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림으로 보여줄 수도 있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다. 무언가가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단순함에서 시작되었을 것 같은데, 어떤 어두운 기운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 같다.
우주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나는 먼 옛날부터 과학자들을 괴롭혀왔던 어떤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질의 궁극적 최소단위는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의 가장 작은 단위를 ‘아토모스’atomos,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은 독자들이 학창시절에 배웠던 원자(수소, 헬륨, 리튬, …… 우라늄 등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목록)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현대적 의미의 원자는 아토모스보다 덩치가 크고 구조도 훨씬 복잡하다. 하긴, 데모크리토스가 우라늄원자를 알았다 해도 그것을 아토모스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리학자나 화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원자는 궁극의 최소단위가 아니라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담겨 있는 깡통이고 양성자와 중성자도 더 작은 입자(쿼크)로 이루어진 집합체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근원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면 가장 작은 단위인 ‘소립자’素粒子, elementary particle와 이들의 거동을 좌우하는 ‘힘’을 알아야 한다. 물질을 이해하는 키포인트는 화학시간에 배운 원자가 아니라 데모크리토스의 아토모스라는 이야기다.
우리 주변에 있는 물질들은 엄청나게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원자는 거의 100종에 가깝고, 이들이 결합해서 생긴 분자는 대충 계산해도 수십 억×수십 억 개에 달한다. 행성과 별, 바이러스, 산, 지폐, 신경안정제, 출판대행인 등 이 세상 모든 것은 바로 이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우주가 창조되던 무렵, 즉 빅뱅 직후에는 이렇게 복잡한 물질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원자핵도, 원자도 없고 궁극의 최소단위(아토모스, 또는 소립자)만이 우주공간을 배회하고 있었다. 집합제가 형성되기에는 온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운 좋게 원자핵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온도(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다시 소립자로 분해되었다. 창조의 순간에는 아마도 한 종류의 입자와 하나의 힘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또는 이들이 하나로 통합된 입자/힘의 형태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 외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장차 우주의 앞날을 결정하게 될 무형의 ‘물리법칙’뿐이었다. 이 원시적 입자와 물리법칙 속에는 장차 우주의 기원을 탐구하게 될 생명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었다. 원시우주는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았지만 입자물리학자에게는 최고의 연구과제이다. 뿌연 안개에 가려져 있는 극도의 단순함과 아름다움. 입자물리학자에게는 최고의 진수성찬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의 태동
나의 영웅 데모크리토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리스에는 미신과 신화, 또는 신에 얽매이지 않고 이성적 사고와 논리로 이 세상을 이해했던(또는 이해하려고 애썼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과학과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원인 모를 현상으로 가득 찬 세계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당시 그리스인은 낮과 밤, 계절변화, 불, 물, 바람의 관계 등 자연현상 속에서 변화의 규칙을 찾아냈고, 기원 전 650년경에는 지중해 연안에 찬란한 기술문명을 꽃피웠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토지를 측량하고 별자리로부터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으며 고도의 야금술과 달력계산법(별과 행성의 위치로부터 계산된 역법)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밀한 도구와 화려한 직물, 정교한 장식이 가미된 도자기까지 만들었다. 자연현상의 규칙을 이해하고 각 사건들 사이의 날짜 간격을 계산하는 달력도 있었으니, 앞날을 예견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 무렵 고대 그리스제국의 식민지였던 밀레투스Miletus에서는 “이 세계는 엄청 복잡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매우 단순하며, 그 단순함은 논리적 사고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아브데라의 데모크리토스가 단순한 우주의 최소단위로 ‘아토모스’라는 개념을 창안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요즘 대학에는 물리학과와 천문학과가 분리되어 있지만, 원래 물리학은 천문학에서 태동된 학문이다. 고대 철학자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행성의 움직임과 태양이 뜨고 지는 패턴으로부터 천문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모형을 만들었다. 그 후 하늘에서 땅으로 관심을 돌린 과학자들은 떨어지는 사과와 날아가는 화살, 단진자, 바람, 조수潮水, tide 등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자연현상을 서술하는 일련의 물리학 법칙을 알아냈고, 르네상스운동이 유럽을 휩쓸었던 1500년경 물리학은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로부터 다시 수백 년 후 망원경과 현미경, 진공펌프, 시계 등 다양한 도구가 발명되면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현상들이 관측되었으며, 관측결과를 숫자와 그래프로 기록하면서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수학적 규칙에 눈뜨기 시작했다. 드디어 물리학에 수학이 도입된 것이다.
20세기 초 물리학의 최대 현안은 ‘원자’였다. 그러나 1940년대에는 ‘원자핵’이 핫이슈로 부상했고, 세월이 흐를수록 연구 분야는 더욱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또한 관측도구가 정밀해지면서 물리학자들은 극도로 작은 영역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관측데이터를 종합하면서 자연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학문의 범위가 넓을수록 종합과 분석은 그만큼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고대에는 한 사람의 철학자가 모든 자연현상을 연구했지만, 현대물리학은 몸집이 너무 비대해져서 분업을 하지 않으면 발전은커녕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질 때마다 물리학은 점점 더 세분화되었고, 환원주의reductionism를 신봉하는 일부 물리학자들은 입자물리학으로, 다른 물리학자들은 좀 더 스케일이 큰 원자물리학과 분자물리학, 또는 핵물리학 등의 분야로 각자 제 길을 찾아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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