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꽃
돌담 아래 등 붙이고 앉아
한 줌 햇살 외엔 다 필요 없는
더 갖고 싶은 것도 없고
더 가고 싶은 곳도 없는
저 노인!
더 피지도 않고 더 지지도 않을
환한 웃음!
시인의 침묵
문예창작부 동아리 애들과 또 교내 시화전을 준비했다
시를 쓰고 그림을 만들고 액자에 넣기 전
아이들이 시를 썼던 펜이라든가 붓이라든가
종이의 결도 한번 더 살펴보았다
나는 왜 해마다 붓펜으로 쓴 신작시 한 편과
약간의 곤혹스러움과 설렘을 액자에 끼워 넣는 걸까
이런 것도 시의 일이며 또 시인의 일일까
“쌤! 잘 썼어요?”
“암튼 그림도 좀 더 넣고 준비해라”
은재나 희정이 빼면 난생처음 쓴 시들이었다
애들은 처음 쓴 연애편지를 꺼내놓고
어떤 애는 눈물을 찍어가며 심장이 보일 듯 팔짝팔짝 뛰기도 하고
또 친구의 손을 붙잡고 손목이 휘어지도록 마구 뒤흔드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너희들은 시인이다 음…… 굳이 멀리 터키에 있는 오르한 파묵1952~의 말을 빌리면 지금 이 순간! 너희들은 신이 말을 걸어준 자들이다 기꺼이 축하한다! 허나 신은 많은 시인들을 방문해야하므로 바쁠 것이다 또 시인에게 말을 걸어주는 신이라 해도 모든 시인들에게 일일이 다 말을 걸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보다 먼저 시인들이 잘 알 것이다
본관 잔디밭에 쭉 세워놓은 시와 그림들을
또 자기들끼리 읽어보고 심장이 보일 듯 팔딱팔딱 또 뛰어다닐 것이다
또 누군가 시 앞에서 잠시 걸음 멈춘다면
그도 신이 말을 걸어준 자의 목소리를
잠시 엿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문청시절엔 시에게 자꾸 다가가 말을 붙였는데
이제 나이 먹고 나선
시가 언제 말을 걸어올지 몰라 침묵할 때가 많다
시만 침묵 속에 싹트는 것이 아니다
신의 음성도 시인의 음성도 침묵에 가까울 것이다
저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방금 싸인 한 시집을 받았지만
시 한 줄 읽지 않고 밥만 먹었다
시인들도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술만 마셨던 시인?
- 김종삼 박용래 천상병 박정만……
요새 술만 마셨던 시인?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비로소 그의 시집을 펼쳤다
-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 알아야*
내 가슴에 바람이 스치면 무엇이 되었을까
바람을 만났으면 바람이 되었을까
술을 마셨으면 술이 되었을까
꽃을 만났으면?
당신을 만났으면?
금계국金鷄菊
맥문동麥門冬
원추리
방금 누가 살다 간 어느 동네 지명 같던
저 꽃 앞에서 걸음을 또 멈추고
먼 길을 굳이 되돌아가도
어느 길에서 바람이 또 불었다 해도 바람을 만났다 해도
나는 결코 꽃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심지어 밥도 아니다
꽃 이름 같은 저 빈집에 들어가
몇 날을 살아도
저 꽃을 뿌리째 다 뽑아 쌓고 또 쌓아도
다시 또 무너뜨린다 해도
저 꽃으로부터 또 멀어질 것만 같다
당신은 어떠신지?
*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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