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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수육과 맛의 논리
시나리오: 일요일 늦은 오전의 삼겹살 수육
일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차린다. 메뉴는 수육이다. 마침 포기김치가 딱 알맞게 익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시기가 일요일에 걸쳐있다. 김치 최상의 맛이 점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긴 선도 아니다. 며칠은 가지만 주말이 두 번 끼지는 못한다. 따라서 가장 맛있을 때 즐겨야 한다. 지금이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삶는다. 고민 끝에 오늘은 삼겹살을 택했다.
왜 고민했는가. 가격에 비해 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소위 가격 대 성능비와는 조금 다르다. 모두가 먹기 때문에 삼겹살은 가격 거품이 심하다. 돼지는 삼겹살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지만 돼지고기라면 대부분 삼겹살을 먼저 찾는다. 그래서 인기 부위의 비용에는 비인기 부위의 관리비가 포함된다.
한식의 삼겹살 선호는 이제 집착 수준이다. 비단 삼겹살이 아니더라도 돼지는 살코기와 지방의 켜가 뚜렷한 동물이다. 그래서 소시지 등의 가공육 주재료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분해 후 재조립’ 개념으로, 살코기와 지방을 한데 갈아 새로운 고기를 만드는 방식이다. 심지어 다리 살 같은 부위도 삼겹살만큼이나 켜가 뚜렷하지만 활발하게 소비되지 않는다. 국가 차원에서 소비 촉진에 나서지만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부위의 특성을 이해하고 제시하는 조리법이 별로 없다. 조리, 즉 불과 열을 활용하기보다 칼질로 분해하는 길을 택한다. 삼겹살의 기본 소비 방식과 사실 똑같다. 저며 불에 올린다. 질기고 뻣뻣해진다.
그래서 직화구이에 비하면 차라리 수육이 낫다. 그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뚜렷한 장점이 있다. 덩어리를 최대한 살리는 가운데 완만한 열의 매개체인 물을 통해 뚜렷한 두 켜, 즉 비계와 살코기의 최선 사이 타협점을 추구할 수 있다. 두 부위 모두 적당히 익는 지점 말이다. 하지만 물에 넣고 오래 삶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먹지 않을 국물로 맛이 빠져나가니 그만큼 손해다. 그래서 압력솥을 선택한다. 내부 공간을 진공상태로 만들어 끓는점을 높이는 원리다. 덕분에 조리 시간은 짧아지고 재료는 더 잘 익는다. 압력솥은 이미 익숙한 도구다. 일반 가정에 도입된 지 오래됐기도 하지만 밥솥의 대부분이 압력솥의 원리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겹살 수육을 만드는 데에도 두 압력솥이 동시에 돌아간다. 한 압력솥에서는 삼겹살이 마늘, 파, 생강의 향과 어우러지며 익고, 또 다른 압력솥은 밥을 짓는다. 한데 어우러지는 냄새가 고소하고 구수하며 또 달큰하다.
안주 삼아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다. 고춧가루와 매운맛 때문에 한식과 술은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매운맛이 대개 와인에 함유된 탄닌tannin의 쓴맛과 충돌한다. 맥주 또한 그 충돌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낮은 도수와 탄산 덕분에 입 안을 가볍게 씻어 내려주니 반주로는 괜찮다. 특히 라거lager나 밀 맥주가 잘 어울린다. 냉동실에 미리 넣어둔 잔의 차가움을 입술로 느끼며 상을 차린다.
삼겹살은 부스러지지 않도록 충분히 식혀 1cm 두께로 썬다. 종종 TV 요리 프로그램 등에서 수육을 뜨거운 물에서 건져내자마자 써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하면 손을 대기도 어려운 고기가 칼 끝에서 부스러지고 만다. 용케 형체를 유지하더라도 자른 면이 매끄럽지 않다. 음식에게는 잠시 숨을 돌리면서 맛을 한데 아우를 여유가 필요하다. 갓 구운 빵, 지어지자 마자 솥에서 퍼 담아 입에 넣는 밥이 실제로는 그다지 맛있지 않은 까닭도 같은 이치다. 수육도 건져 접시에 담아 은박지로 덮어준다. 적어도 20분은 두었다 썬다. 식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각보다 온도가 많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딱 먹기 좋아진다. 어차피 돼지고기는 차게 먹어도 맛있다. 머리고기를 생각해보자. 차갑게 먹는 매끈한 지방의 감촉이 매력이다. 수육도 마찬가지다.
김치도 잘 익었고 새우젓도 맛있다. 밥도 잘 됐다. 따로 찌개나 국을 끓이지 않은 상황에서, 삼겹살 수육에는 살짝 고두밥이 가장 잘 어울린다. 딱딱할 수 있는 살코기와 뭉개질 수 있는 비계의 켜 사이를 파고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쌀 알갱이가 약간 살아 있는 밥이다. 밑동에 가장 가까운, 두터운 포기김치 한 점을 집어 올린다. 통통한 새우 한 마리를 그 위에 얹고는 잠시 망설인다. 에라, 모르겠다. 마늘도 한 쪽 쌈장 찍어 올린다. 미각의 파괴자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생마늘을 먹겠는가. 정서에 장단을 맞추는 맛이다. 그쯤에서 일단 싸서 입에 넣는다.
몇 입 씹어본다. 돼지비계가 깔아준 멍석 위로 살코기의 감칠맛이 퍼진다. 밥을 젓가락으로 가볍게 한 덩이 집어넣고 함께 씹는다. 쌀알이 알알이 씹히며 조금 느끼하다 싶을 때 김치와 쌈장의 신맛이 지방을 가른다. 동시에 두터운 배추 잎사귀의 아삭함이 비계의 물렁함과 대조를 이룬다. 깻잎도 질세라 까끌함과 향, 쌉쌀함을 보탠다. 이제 마늘을 씹을 차례. 인상 찌푸릴 정도의 맵고 아린 맛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간다. 차가운 맥주를 털어 넣는다. 시원한 탄산이 단맛과 함께 입 안을 휩쓸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홉hop의 쓴맛이 전체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맛의 논리 1: 감각의 맛
맛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국 식문화는 아직 물음에 대답할 준비가 안된 듯 보인다. 결과, 즉 음식이 말해준다. 맛내기에 필요한 논리와 사고가 드러나지 않는다. 전통이라 믿는 습관에 기대는 맛이다. 그래서 맛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러 갈래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일단 물리적인 맛이 있다. 몸, 또는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생리적인 맛이며 또한 총체적 경험이다.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총체적 경험으로서 맛flavor= 다섯 가지 기본 맛taste+향/냄새aroma+질감texture’이다. 이 각각의 요소가 서로 호응은 물론, 대조까지 이룰 때 ‘맛있다’는 반응이 나오는 다채로운 경험의 문이 열린다.
‘일요일의 삼겹살 수육’은 이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한식의 시나리오다. 맛의 출발점은 매개체 역할의 지방이다. 문자 그대로 ‘멍석을 깔아’준다. 고소함맛과 매끄러움 또는 풍성함질감 또는 감촉을 선사하는 한편, 혀와 입 안에 막을 입혀 다른 맛을 전달하는 역할도 맡는다.
하지만 지방은 무한정 환대해줄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멋대로 굴도록 방치하면 음식이 느끼해질 수 있다. 균형을 잡아줄 요소가 필요하다. 짠맛과 신맛, 그리고 쓴맛이 주로 맡는 역할이다. 짠맛은 기본적인 균형을 책임진다. 지방이 적극적으로 개입할수록 소금 간도 강하게 맞춰야 느끼해지지 않는다. 소금이 지방을 훌륭하게 견제해주는 본보기가 한식에서 드문 가운데, 의외로 어느 곳에서나 쉽게 살 수 있는 조미김이 좋은 예다. 참기름이나 들기름이 고소하게 깔아준 멍석 위로 소금의 짭짤함이 퍼지며 균형을 잡아준다. 게다가 해조류의 감칠맛과 특유의 바삭함이 탄수화물인 밥과 잘 어울려 단순하면서도 다채로운, 흔하면서도 숨어 있는 맛의 보석이다.
한편 신맛은 잘라주는 역할을 맡는다. 문자 그대로, 흐르는 지방의 허리를 끊는다. 흔히 포기김치를 한판 크게 담그는 날대체로 김장에 보쌈을 먹는다. 맥락적으로는 더 이상 잘 맞아떨어질 수 없다. 김치가 가장 많은 날인 데다가 집약적인 노동의 수고를 고기로 보상한다. 따라서 즐거울 수 있지만 맛의 면에서 최선의 조합은 아니다. 갓 담근 김치에는 신맛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물론 새우젓과 쌈장도 나름의 신맛으로 제 몫을 한다. 하지만 젖산 발효로 얻은 김치의 복합적인 신맛의 수준은 아니다. 또한 신맛보다 날카로운, 폭발적인 짠맛이 잘라주는 역할을 맡는다. 김치와 다르다.
김치는 맛뿐 아니라 질감에도 공헌한다. 삶은 삼겹살의 대부분인 지방층은 부드럽다 못해 무르다. 계속 먹으면 쉽게 물려버릴 수 있는데 김치의 아삭함이 막아준다. 이렇게 질감의 대조를 이루는 요소가 맛의 경험을 한층 더 다채롭게 꾸며준다. 어쩌다 몸살감기 등으로 먹게 되는 흰죽에 물김치를 떠올려보자. 간이야 국물로 맞추지만 무든 배추든 건더기가 없으면 허전하다.
맛이나 눈치 없는 노란색을 감안하면 이젠 그다지 먹고 싶지 않지만 짜장면의 단무지도 같은 원리다. 신맛이 균형을 잡아주는 한편 질감의 대조가 맛의 경험에 피로를 덜어준다. 천편일률적으로 부드럽기보다 바삭, 또는 아삭한 요소가 있을 때 더 재미있게 먹을 수 있다. 반대로 바삭한 요소 일색일 때는 부드러운 요소를 곁들이면 더 맛있다. 프렌치프라이와 케첩의 짝만큼 좋은 예가 없다. 바삭함과 부드러움뿐만 아니라 뜨거움과 차가움, 단맛과 짠맛의 대조까지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토마토 덕분에 감칠맛도 빠지지 않는다. 지탄받는 ‘정크푸드’의 곁들이가 여러 겹의 감각적 대조를 복합적으로 품고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맛이라는 경험의 즐거움이 철저한 계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신맛이 지방을 끊는다면, 쓴맛은 그 여운을 완전히 가셔낸다. 주로 탄닌이 동서양에서 골고루 그 역할을 맡는다. 프랑스가 대표하는 서양식에서는 와인이 탄닌의 원천이다. 90년대 중반부터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라는 신조어까지 동원해가며 역할과 기능의 정확한 분석을 시도한 와인 말이다. 제2의 소스로서 맛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촉촉함을 불어넣는 한편, 신맛이 잘라준 지방을 말끔하게 걷어낸다. 동양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차의 역할이 크다. 튀김과 볶음의 넘치는 기름은 차가 걷어주지 않으면 때로 감당이 어렵다. 한편 이젠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적인 음료가 된 커피도 있다. 주로 식사의 끝에서 단맛 중심의 디저트와 쓴맛으로 밀고 당기며 식사 내내 쌓인 맛의 여운을 정리해준다.
맛의 논리 2: 정서의 맛
감각으로서 맛의 논리, 인과관계를 과학적 측면에서 따져보았다. 하지만 이게 경험으로서 맛의 전부는 아니다. 체크리스트 또는 매트릭스를 짜서 각 맛의 상관관계만을 조목조목 따지고, 각 요소들이 착착 들어맞는다고 해서 음식이 언제나 맛있어지지는 않는다. 가령 원리만 따져보면 맥주가 한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은 확실하지만, 맥주 탓에 함께 먹는 점심 식사가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는다. 두 가지 이유 덕분이다.
첫째, 먹는 행위 특히 생리적으로 맛을 느끼는 순간은 지극히 짧다. 맥주의 쓴맛이 고춧가루와 충돌하면 분명 유쾌하지 않은 맛이 생겨나지만 찰나에 벌어지는 일이다. 혀와 입 안에 여운을 남기지만 곧 사라지거나 무시할 만한 수준이다. 둘째, 맛은 한없이 정서 또는 감정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맥락, 즉 환경부터 사람을 비롯한 온갖 요소가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치열한 예약을 뚫고 자리를 얻은, 빼어난 고급 레스토랑에서 접객 실수 때문에 식사 전체를 망치는 경험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혼자 먹는 상황을 설정했다. 소위 ‘혼밥’이다. 최소한의 정서적인 논리가 식사를 이끈다. 한국에서는 맛의 경험 또는 개념이 정서적 측면에 거의 완전히 함몰되어 있다. 맛의 경험이 논리를 바탕으로 만든 음식 자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분위기’를 비롯한 온갖 정서적 가치가 자동적으로 전면으로 나오는 주객전도의 상황이다. 집 안에서는 모성의 족쇄가 작동한다. 집의 울타리 안에서는 ‘엄마 밥’ 또는 ‘집밥(또는 가정식)’이 우월한 음식 대접을 받는다. 바깥에서는 특히 ‘노포’로 대표되는 ‘맛집’을 중심으로 고착화된 습관을 전통으로 혼동하는 무리의 논리가 작용한다. 한마디로 오래된 맛집에서 여럿이 함께 즐겨야 진정한 경험이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현재 한국은 정서적인 가치가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단순한 정서적인 가치만으로 즐기기에는 음식 자체의 완성도가 너무나도 떨어지는 탓이다. 정서적 측면만으로 음식을 이해하려는 시도 또한 이미 포화 상태다. 더 이상 녹을 수 없는 설탕이 바닥에 잔뜩 고여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지, 맛과 조리의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음식을 추켜세우느라 바쁘다. 그래서 이 책은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간다. 길거리 트럭에서 파는, 기름 쪽 빠진 회전 통닭구이마냥 정서적 요소를 완전히 들어낸 맛의 이치와 원리에 대해 따져보겠다.
마지막으로 레시피 하나를 소개한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셰프 홍득기의 보쌈 레시피다. 기본 준비 과정은 비슷하지만 껍질을 바삭하게 만들어 마무리함으로써 우리가 전통이라 믿는 삶은 돼지고기와 사뭇 다른 음식을 완성한다. 돼지 껍질은 그 자체로도 직화구이의 재료로 팔리며, 삼겹살 또한 상황에 따라 껍질이 붙은 것이 선호되기도 한다. 이렇게 즐겨 먹으면서도 껍질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것이 음식과 맛의 경험에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의미한 효과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껍질은 그저 비계의 맨 바깥층에 붙어 있는 상태 그대로, 질긴 채로 전체의 부드러움에 방해가 된다. 이 레시피는 껍질을 바삭하게 구워내 그러한 부조화를 극복하고, 부드러움에 훌륭한 대조점을 준다.
따라서 이 레시피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첫째, 한식의 발전이 오히려 한국 바깥의 식문화 위성 지역에서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는 현지의 여건에 순응, 타협 및 극복하려는 시도와 다르다. 풍족하거나 유리한 재료의 여건, 또는 다른 식문화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한식에 치환이나 보정을 가하는 방식이다. 인용하는 레시피에선 설명되지 않지만, 돼지 껍질을 튀겨 바삭하게 만드는 조리법은 남미의 치차론Chicharrón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돼지 껍질을 튀겨 가볍고 바삭하게 만든 것으로, 남미 외의 지역에서도 기성품처럼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다.
다른 문화권의 음식이 발전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동력으로 자유로움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왜 하필 로스앤젤레스일까. 단일민족국가(이마저도 허상인 현실이지만) 또는 단일 집단을 유지할 수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는 곳이다. 이는 소비층 또한 특정 집단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타 민족, 인종, 국가의 성원이 자연스레 한식을 먹고, 반대로 한국인 또는 한국계 미국인이 다른 문화권의 음식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다. 삶의 과정에서 접한 음식이 자연스레 기존의 음식에 반영되고 변화가 일어난다. 2부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김치가 일종의 만능 맛 보정 요소universal flavor modifier로 남미에 뿌리를 둔 타코 같은 음식에 접목되는 현상 또한 같은 이치다.
김치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생각의 범위를 넓혀보자. 단일민족이 허상이라고 했다. 그것의 장점을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소위 ‘다문화(얼마나 끔찍한 명칭인가!)’의 존재와 영향을 이제 무시할 수 없다. 더불어 세계 식문화의 유입 가운데서도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권의 존재감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과연 한국의 식문화에 근본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까. 김치와 비슷하지만, 만능 맛 보정 요소로서 세계에 더 널리 알려지고 확고하게 자리 잡은 스리라차sriracha가 있다. 스리라차 소스는 고추와 식초의 조합으로, 세부 표정은 조금 다르지만 맛의 설계 원리는 초고추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껏 늘어놓은 맛의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다른 식문화를 개념적으로 적극 받아들여 확장과 보정, 궁극적으로 발전을 시도해야 할까. 반대로 발전을 저당잡는 대신 동일성 혹은 단일성을 자국 식문화의 우성을 보위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할까. 현재의 상황은 명백한 후자로 보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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