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란
뜨겁게 달군 스테인리스 팬에다 먹다 남은 갈비찜 국물을 붓는다. 불을 약하게 조절한 뒤, 찬밥 덩어리와 건채 후레이크를 넣고 주걱으로 섞는다. 국물이 밥알들에 잘 녹아들었다 싶을 때 참기름을 넣어 다시 한 번 볶는다. 가스 밸브를 잠그다 피식, 웃는다. 어제저녁 갈비찜을 먹을 때 딸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엄마, 내일 아침 메뉴 맞혀 볼까요? 이 국물로 밥 볶을 거지요? 맞죠? 맞죠?
볶음밥 네 주발, 오이냉국 네 대접을 퍼 담는다. 스크램블 달걀 한 접시, 배추김치 한 접시를 식탁 가운데에 놓는다. 마지막으로 수저 네 벌.
부엌 베란다로 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본다. 남편과 딸아이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남편이 친 공이 기다랗게 포물선을 그리며 다세대주택 3층, 우리 집 베란다 바로 밑까지 올라왔다가 떨어진다. 마음만 먹으면 내 손으로 공을 낚아채서 딸아이한테 던져 줄 수도 있을 성싶다. 딸아이가 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달려가 냉큼 받아 친다. 주말 아침마다 아빠한테 레슨을 받고 주중에는 가까이 사는 제 사촌이랑 연습하더니 실력이 꽤나 늘었다.
길게 또는 짧게 포물선을 그리며 왔다 갔다 하는 공을 바라보는데, 별안간 눈앞이 뿌예진다. 요즘 아이들 말마따나 ‘멍 때리는 병’이 도진 것이다. 선생님, 수업 시간에 가끔 멍 때리고 계시는데……. 그거 아세요? 반장 아이가 며칠 전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었다.
창틀을 부여잡고 눈을 끔벅거리다 머리를 흔든다.
“여보, 민지야, 아침! 아침 식사!”
남편이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민지가 보낸 공을 놓친다. 민지가 깔깔깔 웃으며 라켓을 흔든다. 말이 빠르고 몸도 재바른 아이. 욕심이 많은 만큼 다부지게 노력도 하는 아이. 민수가 저 녀석 반만 따라가도 무슨 걱정이 있을까.
창문에서 몸을 떼자 시선이 앞집 파라볼라 안테나에 머문다.
파라볼라, 포물선…….
마음의 수면에서 길고 짧은 포물선들이 들쭉날쭉 솟아오른다.
포물선, 쌍곡선, 초점, 준선, 춘희, 동백꽃,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그리고 류똥, 개새끼.
“민수야, 민수야아, 일어나 밥 먹자.”
아들아이 방 앞에 서서 방문을 두드린다. 두드리는 것쯤으로 녀석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그래도 오늘은 일요일. 여유가 있다. 살그머니 방문을 연다. 방문 잠금장치는 제 아빠가 오래전에 없애 버렸다. 걸핏하면 문 잠가 놓고 들어앉는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이제 문을 잠가 놓지는 않지만, 일없이 빈둥거리는 버릇은 여전하다.
“민수야, 엄마는 말이야, 아침부터 우리 민수한테 소리질고 싶지 않거든. 얼른 일어나라, 응? 세수하고 밥 먹어야지. 시계 좀 봐. 벌써 아홉 시 반이나 됐지 않니?”
민수는 기지개를 쭉 켤 뿐, 눈을 뜨지 않는다. 입가에 침버캐가 소금 가루처럼 허옇게 붙어 있다.
“일어나. 안 일어나?”
목소리에, 그리고 아이한테로 다가가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일어날래, 이따 아빠한테 벌점 받고 일어날래?”
아빠, 벌점. 두 단어에 아이가 눈을 뜬다. 그러나 몸을 일으켜 욕실까지 가는 데에 민지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시간이 걸린다. 아들이 아니라 나무늘보를 키우는 꼴이다. 쯧쯧, 혀를 차려다 겨우 참는다.
통, 통,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민지는 늘 저렇게 계단을 통통거리며 뛰어 올라온다.
“엄마아, 밥! 배고파요!”
“그래. 대충 씻고 얼른 먹어.”
뒤따라 들어온 남편이 민수 방을 살핀다. 내가 현관 안 쪽에 붙은 화장실을 가리킨다.
남편은 일곱 시에 일어나 거실과 안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해서 널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민지와 배드민턴을 쳤다. 민지도 아빠와 나가기 전에 제 방을 정리하고 독후감 숙제를 끝냈다. 나는 부엌과 냉장고를 청소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 집에서 제 몫을 못 해내는 사람은 아들아이뿐이다.
민지와 남편이 겨끔내기로 안방 화장실에서 씻고 나올 때까지 민수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현관 화장실 앞으로 가서 소리친다.
“민수 너, 1분 이내에 안 나오면 벌점 1점이다. 2분 지나면 2점, 3분 지나면 3점, 분당 1점씩이다.”
“저……. 지금 못 나가는데요.”
“왜? 왜 못 나와?”
“똥 싸는데요.”
식탁에서 민지가 피식, 웃는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남편의 눈초리가 파랗게 화를 낸다.
민수는 상황이 저한테 불리하다 싶으면, 화장실에 숨는다. 숨어서는, 똥을 싼다고 한다. 밥 먹다가도 공부하다가도 청소하다가도 그놈의 똥을 누러 도망친다. 일단 싸러 들어가면 함흥차사.
그래도 부모인데 똥 눈다는 자식놈을 문 부수고 끄집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보, 그냥 우리 먼저 먹자.”
내가 남편의 손목을 잡아끈다. 남편이 한숨을 거푸 쉬며 따라온다.
“민수 쟤, 오늘 설거지시켜. 이십 분 안에 못 끝내면 구두도 닦이고 제 교복 다림질도 시키고. 시간 딱 정해 놓고 시간 안에 못 끝내면 하루 종일이라도 시켜.”
남편의 표정과 말투가 신경에 거슬린다.
“알았어, 알았다고. 알았으니 밥이나 먹자.”
알았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설거지든 뭐든 자기가 시키면 되지 왜 나더러 이래라저래라 명령이야?’ 하는 마음이 뾰조록뾰조록 돋아난다. 어쩌면, 남편의 목소리에 류똥의 지겨운 설교 레퍼토리가 떠올라서일지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왜 시키는 걸 안 하고 지랄이야? 네년들이 지금 큰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세상은 네년들 멋대로 사는 곳이 아냐. 학교에서 일등으로 배워야 하는 게 뭔지 알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사는 법이야. 네년들이 나중에 시집을 가서도 마찬가지야. 서방이 여기하고 저기 좀 치워 놓으시오, 하면 치워 놔. 안 치웠다가 뒈지게 얻어터지지 말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부인에게 연민을 느꼈더랬다. 우리 역시 류똥에게 걸핏하면 얻어터지지만, 그래도 류똥과 평생 같이 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아빠, 오늘 저 이차방정식 활용하는 법 좀 가르쳐 주셔요. 그냥 계산하는 거는 잘하는데 식 세워서 푸는 걸 잘 못하겠어요.”
민지의 말에 남편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다.
“그래그래. 네 나이 때 아빠도 그거 어려워했어. 알고 보면 쉬운 건데 말이지. 아빠가 우리 민지 백 점 맞을 수 있게 잘 가르쳐 줄게,”
남편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나도 민지 같은 아이가 키우기 편하다. 하지만 어쩌랴. 민수도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인걸.
입맛이 떨어져 밥알을 께적거리며 숟가락 뒤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테인리스 볼록거울 속에 내 얼굴이 귀를 붙들린 채 대롱거리는 헝겊 인형처럼 걸려 있다.
나는 류똥의 양손에 귓바퀴를 잡힌 채 강제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고 진한 남자 향수 냄새에 숨이 막혀서 정말이지 바깥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창밖이 보고 싶었어? 수업 시간에?”
아뇨. 그냥 눈앞이 뿌예져서 고개를 돌린 거예요. 창밖이라고 해야 운동장밖에 없는데 보고 싶긴 뭘 보고 싶겠어요?
“봐라, 봐. 이 새끼야. 내가 이렇게 높이 쳐들어 주니까 더 잘 보이지? 봐. 더 봐.”
마침내 제 팔이 아팠던지 류똥이 손을 놓았다. 다리로는 재빨리 의자를 치워 버리면서.
나는 교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지만, 류똥이 무섭고 내 모습이 부끄러워 신음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 무렵의 나는 느닷없이 가수假睡 상태에 빠지는 버릇이 있는, 예민하고 우울한 소녀였다. 담임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은 그런 나를 이해해 주셨고 다른 선생님들은 나한테 별다른 관심이 없었건만, 유독 수학 교사인 류똥만 나를 못살게 굴었다.
나는 그게 예쁘장한 내 짝 춘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류똥은 내 자리에 앉는 걸 좋아했다. 아니 내 자리에 앉아 춘희를, 그때는 그걸 ‘추행’이라는 말로 정의할 줄도 몰랐지만, 추행하는 걸 좋아했다. 류똥은 춘희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곤 꽃향기를 맡듯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춘희의 귓불을 만지거나 겨드랑이께 연한 살을 꼬집었다. 춘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등허리를 옹송그리면, 류똥은 마치 대단한 위로나 해 주는 모양으로 춘희의 목덜미에서 허리선까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얄따란 손바닥은 춘희의 브래지어 끈 주변을 특히 좋아했다.
그 시간에 나는 뭘 했냐고?
나는 칠판 앞에서 류똥이 빼곡이 판서해 둔 문제들을 풀어야 했다. 적어도 다섯 문제 이상, 때로는 열 문제도 풀었다. 하나같이 진저리 쳐지는 시간이었지만, 포물선을 배울 즈음이 제일 심했다.
류똥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포물선 여러 개를 그려 놓고 색분필로 꼭짓점을 칠했다. 빵빵한 쌍곡선을 그려 분홍색 꼭짓점을 칠할 때는, 뒷자리에서도 얼마든지 그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아, 요거, 요거, 빵빵하네. 요런 건 꼭지도 예쁜 분홍색으로 칠할 수밖에 없지! 얘들아, 뒈지게 예쁘다, 그치?”
류똥의 끈적거리는 눈길이 갑작스레 춘희의 가슴에 꽂히면, 춘희는 홍옥처럼 빨개진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한없이 고개를 숙였다. 류똥은 홀쭉한 포물선에는 갈색 분필로 꼭짓점을 칠하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이건 축 늘어져 갖고……. 쩝. 이런 건 꼭지도 거무죽죽해. 에이, 못생겼어. 안 그러니, 얘들아?”
물론 아이들은 입을 바늘로 꿰맨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 같았으면 동영상을 촬영하여 인터넷에 올리고도 남았을 걸. 우리는 그저 가슴 달린 여자로 태어난 걸 창피스러워했을 뿐이었다. 감히 류똥에게 불만을 제기한다거나 어딘가에 류똥을 고발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류똥도 미워하고 춘희도 미워했다. 둘 다 더럽고 재수 없다고 했다.
나로 말하자면 속마음으로는 춘희를 좋아했다. 얼굴을 뒤덮다시피 한 좁쌀 여드름 때문에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던 나로서는 뾰루지는커녕 땀구멍 하나 안 보이는 춘희의 매끈한 피부가 너무 부러웠다. 동공이 유달리 큰 맑은 눈과 도톰한 입술, 잘 익은 사과 빛깔의 볼도 내 것이기를 바랐다. 춘희는 착한 짝이었다. 류똥 때문에 내가 매번 지겹게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게 마치 자기 탓인 양 늘 미안해했다. 내가 지우개나 샤프심을 빌려 달라고 하면 제꺽, 기쁜 얼굴로 빌려주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