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자세히 보아야 예쁜 것
봄이라 그런지 살아 있는 것들에 저절로 눈이 간다. 석 달 열흘 안 빗은 머리채 같던 버드나무 가지가 연둣빛 여린 잎을 조랑조랑 달고 낭창거린다. 가지마다 쪼글쪼글 올라오는 어린잎 덕에 은행나무는 초록빛 레이스를 두른 것 같다. 풀기 없던 앞산 뒷산도 어느새 생기가 돈다.
고개를 돌리면 참새가 포르르 날아오르고, 바람이 불면 라일락 짙은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사람 손길 잦은 화단에는 온갖 꽃이 흐드러지고, 배기가스 풀풀 날리는 찻길 귀퉁이에도, 쓰레기더미 쌓인 공터에도 노란 민들레가, 해끗한 꽃마리가, 보랏빛 제비꽃이 배죽 고개를 내민다. 이렇게 색채로 향기로 소리로 끊임없이 꾀어 대니 제아무리 자연보다는 사람이 만든 것에 더 관심 많은 ‘아스팔트 킨트’라도 한눈팔지 않을 재간이 없다.
봄에는 자연이 참 착해 보인다. 장마철 짙푸른 초록은 색깔도 향기도 너무 강렬해 압도당하는 기분인데, 봄의 신록은 색도 향기도 순하다. 꽃도 그렇고 벌레도 그렇고 땅도 그렇다. 그리고 이태수의 그림도 그렇다. 같은 세밀화라도 이태수의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순하고 애틋하다.
‘생태 세밀화가 이태수의 사계절 자연 앨범’이라는 부제가 붙은 『숲 속 그늘 자리』는 ‘자연을 그림에 담는 일’을 하는 사람이 5년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린 그림에 짧은 글을 덧붙인 것이다. 집 가까이 경기도 일대로부터 설악산이며 경남 창녕 우포늪까지 도시·농촌·늪·산·바닷가·무덤가를 아우르며 꽃·새·곤충·버섯·애벌레, 심지어 지렁이 똥까지 다양하게 그렸다. 글은 일기 같기도 하고 편지 같기도 하다. 생태 세밀화 옆에 붙는 글이 으레 그렇듯 생태나 특징, 쓸모를 밝히기보다는 소박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담았다.
커다란 잎사귀 밑에 숨어 핀 손톱만 한 족두리, 아기 손처럼 작고 여린 고사리순, 연잎 위에서 젖은 날개를 말리는 잠자리, 모래밭에 구불구불 아름다운 곡선을 남기며 가는 서해비단고둥, 긴 목을 잔뜩 움츠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왜가리, 오래된 기와지붕 위에서 꽃을 피운 바위솔……. 저마다 표정이 있고 몸짓이 있고 사연이 있고 제 몫의 삶이 있다. 이 책에 그려진 돌멩이는 “부딪혀 깨지고 모난 곳 닳고 닳아 상처투성이 작은 돌”이고, 호반새는 “시름에 찬 눈빛으로 울타리 쇠기둥에 한참 앉아 있다가” 그 맑고 깊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 그냥 가버린 새다.
놀이도 ‘체험 학습’이 된 세상이다. 그러나 자연은 이렇게 만나야 한다.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이고, 눈을 낮추고, 찬찬히.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애틋하고, 들여다보아야 보인다. (최정선)
큰오빠 개구리 힘내요!
백희나의 그림책에는 어떤 일관된 태도가 있다. 이야기의 기반은 굳건한 삶이되, 거기에 거침없는 상상력과 무람없는 유희 정신이 보태진다. 만원 버스로 출근하다가 구름빵을 먹고 날아오르는 아버지(『구름빵』), 무더운 여름밤에 녹아내린 달로 만든 셔벗(『달 샤베트』), 허술한 변두리 목욕탕에서 만난 선녀 할머니의 냉탕에서 놀기 신공(『장수탕 선녀님』). 이 이야기들은 모두 현실에 눌려 감상적이 되지 않고 환상에 부풀어 허망해지지 않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그림책에는 언제나 참신한 변화가 있다. 그림뿐만 아니라 종이, 봉제, 유토 인형 등 이야기를 맞춤하게 펼쳐내는 재료가 책마다 다양하게 구사된다. 그래서 백희나의 새 책을 집어들 때는 일관성과 새로움이라는 두 국면에 대한 기대로 설렌다.
『꿈에서 맛본 똥파리』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일단 백희나 그림책의 주요 모티프인 ‘음식’이 등장한다. 제목부터 노골적이며 강력하다. ‘구름빵’과 ‘달 샤베트’도 제목이기는 했으나 ‘맛본다’는 동사에 붙들린 적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환상이 섞인 다른 음식과 달리 이건 극사실적 요리(!)다. 포크와 나이프를 옆에 거느린 접시 위에 얌전히 발 모으고 엎드려 있는 똥파리라니. 똥, 코딱지 등등에 자지러지는 항문기 유아성이 내면에서 건드려진다. 짐짓 으윽, 미간을 찌푸리면서 마음속으로는 ‘꺄아’ 탄성을 지르게 된다. 유아적이고 유희적인 환상을 통해 내 안의 아이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이런 해방적 기능은 백희나 그림책의 강점 중 하나다.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큰오빠 개구리가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는 동생 올챙이들을 위해 정신없이 파리를 잡는다. 엄청나게 긴 혀를 휘릭휘릭 휘두르며 척척 파리를 잡지만 정작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건 하나도 없다. 녹초가 된 개구리는 잠이 들고, 꿈에서 커다란 똥파리를 통째로 삼킨다. ‘오색찬란한 똥파리는 치킨 맛, 군만두 맛, 떡볶이 맛, 순대 맛, 소시지 맛, 도넛 맛, 요구르트 맛, 꿀떡 맛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신기한 맛’이었다나. 그 힘으로 다음 날 큰오빠 개구리는 다시 힘차게 동생들을 위한 먹이사냥에 나선다.
이 책에서 새롭게 쓴 재료는 트레이싱 페이퍼다. 그 위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일일이 오려낸 뒤 라이트박스 위에 배치해서 사진을 찍었다. 덕분에 환하고 따듯한 연못 풍경과 개구리, 올챙이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떤 투명한 분위기를 주는 이 기법 덕분인지, 큰오빠 개구리가 ‘기운이 펄펄’했다는 텍스트에도 불구하고 그 고단한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아 애잔해진다. 부모도 아니고, 단지 ‘조금 일찍’ 개구리가 됐다는 이유로 수많은 동생의 배를 채우는 책임을 떠맡다니. 그림은 가장 유아적이고 역동적이지만 삶의 무게는 가장 무거운 이 책에서, 큰오빠 개구리의 사냥길을 응원해주고 싶다. (김서정)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