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이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어른인 것
내가 엄마인 것. 아빠인 것. 선생님인 것 아니 아이들에 대해서 단순히 어른인 것. 애들 책을 읽으면서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른 인물이 아니라 애들 인물에서 ‘나’를 보면서 달콤한 유혹과 씁쓸한 회환이 뒤섞인 감정으로 인물들이 살아 내는 제 몫의 삶을 따라다니는 게 독서 중인 나의 내면 풍경이다. 그렇게 한바탕 읽어 내고 나면 나는 늘 중심을 잡으려 애를 쓴다. 책을 덮은 채 책 속의 인물들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엉뚱한 생각이 든다. 어? 나는 정말 어른일까? 모호해지는 분류 기준을 따져 보기 이전에 솟구치는, 부질없지만 또한 강렬한, 억울함을 닮은 어떤 감정……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대체로 부정적인 어른 인물들에게서 문득문득 거울을 읽는다. 이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저절로 떠오르고 시대적 착오의 산물인 아이와 어른의 혼재 상태로서의 나, 혹은 이 ‘어른’들에 대해서 한편으론 부끄럽고 한편으로 연민이 생긴다. 우리의 아이들은 과연 어떤 선생님, 어떤 엄마 혹은 아빠와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 말을 바꾸어 ‘엄부자모嚴父慈母’의 공식이 깨어져 버린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몸으로 익히지 못한 부모 노릇을 어떤 ‘교과서’를 보고 해야 하는 걸까, 한숨이 난다. 그러자니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하는 나와 같은 부모들 밑에서 크는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자라나는 걸까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오진구. 초등학교 때부터 지진아에 ‘따’였던 아이. 그러나 Y 정보고 2학년에 다니는 지금, 심심치 않게 ‘담탱이랑 대판 붙’고 정학과 근신을 당하기 일쑤지만 ‘잘나가는 비보이’로 유명한 아이. 160이 간신히 넘는 키에 ‘비보이가 아니었으면 잘나갈 일이 하나도 없는 놈’ 오진구. 비보이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춤에 대한 전문 지식은커녕 가장 기본적인 상식마저 없었던 내가 신여랑의 『몽구스 크루』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귀찮아서 대강대강 넘겨 버리고 풋워크, 탑락, 핸드 글라이더, 나이키 프리즈, 토마스, 윈드밀, 코스프레 등등의 개념을 책 끝에 달린 ‘용어 풀이’까지 참조해 가면서 정신없이 읽고 만 것은 순전히 오진구 때문이다. ‘온몸에 멍이 들고, 무릎이 깨지고, 엉덩이뼈가 부서져도 춤을 추’는 오진구의 무대는 뜨거움과 비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자신감, 자만심, 오기로 똘똘 뭉친 ‘성질 더러운’ 오진구의 절정은 새로 옮겨 간 그룹에서 쫓겨나 압구정 길바닥에서 춤을 추는 장면.
내 가슴이 벌떡벌떡 뛰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음악이 없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오진구의 춤은 눈부셨다. 내 가슴을 후벼판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잔인하게. 아, 제길. 내가 본 오진구의 춤 중에서 제일 멋지다. 오진구는 지금 춤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아프다. 아프다. 너무 많이 아파서 피를 흘린다. 피가 멈추지 않는다. [……] “다 나오라 그래! 내가 얼마나 잘난 놈인지 보여 줄 테니까. 나란 놈이 얼마나 잘났는지. [……] 너! 열라 나 무시하는 너. [……] 너 이 새끼! 아직 안 끝났어! 절대 안 끝났어. [……] 안 끝났다고!
인생의 순간들을 포기와 체념과 타협으로 엮어 나가야 하는 ‘어른’인 내 눈엔 오진구의 바닥을 치는 절망과 절규가 부럽기만 하다. 어찌할 것인가, 이 아이를. 가진 것 하나 없는 왜소하고 ‘성질 드러운’ 괴물 같은 녀석, 제 엄마로 하여금 사람 노릇 못 하고 삐뚤어질까 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하는 녀석의 전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화려함이라니. 청춘의 치열함을 정직하게 살아 내는 오진구 같은 아이들은 많다. 적어도 ‘소설’ 속에는.
진유미. 교복을 줄여 입고 귀를 뚫고, 실연의 상처를 치료하느라 남자 친구와 크리스마스이브 여행을 떠나는 겨우 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 이혼한 ‘철학과’ 출신 엄마, 카페에서 노래하는 직업을 가진 베짱이 스타일의 개방적인 새아빠와 살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담임에게 “선생님도 귀 뚫으셨잖아요? 선생님도 술집에 나가세요?”라고 당차게 대꾸하는 아이.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오토바이를 타던 재준이가 죽자 “신이라는 게 있다면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어”라고 중얼거릴 수 있는 불같은 분노가 가슴에 담긴 아이, 밤을 새워 ‘판타스틱 소녀 백서’를 보고 ‘20세기 소년’ 만화를 아홉 권씩 읽으면서 잠재우지 못한 외로움을 ‘노래 가사’로 풀어내는 아이. 그렇게 유미는 유미대로 또 화려하다.
밤이 깊어도 죽음은 오지 않네
흐르는 강물에 청춘을 내던져라
오늘 그대는 살았는가
내일 그대는 살았는가
아침이 와도 죽음은 가지 않네
눈 쌓인 산 위에서 청춘을 포획하라
오늘 그대는 살았는가
내일 그대는 살았는가
어른들은 ‘네가 사는 모습 그대로, 네가 느끼는 그대로 편하게’ 쓰라고 하지만 유미는 싫다. “내가 사는 모습 그대로 쓰면 무슨 재미람. 일어나서 학교 가고, 야단맞고, 공부하고 졸다가 집에 와서 텔레비전 보고 자는 거. 내가 느끼는 거라고 해 봤자 애들한테 짜증나고, 선생님들 미워 죽겠고, 엄마한테 화나고, 그런 거밖에 더 있냐 말이다.” 맞다. 이경혜의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에 나오는 유미같이 튀는 아이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김혜진의 『프루스트 클럽』에 나오는 윤오처럼 조용하고 모범생인 아이도 ‘진짜 삶은 언제 시작되는 것일까’ 하고 한숨을 쉰다. 사춘기 아이들 특유의 열기와 방황과 우울을 그들 삶의 전부인 ‘학교’가 도대체 알아주질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날이 밝는 것도 해가 지는 것도 교실에서 겪어야 하는 아이들이 학교를 감옥으로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그런가, 속속 출간되기 시작하고 있는 우리의 청소년 소설들은 하나같이 감옥으로부터의 탈출만을 시도하고 있다. 학교의 담장 안에 갇힌 아이들을 감각적으로 위로하려고만 하고 있다.
이금이의 『유진과 유진』에 나오는 ‘작은 유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교 1등짜리 외국어 고등학교 입시 준비생 작은 유진이 처음으로 ‘공부 이외의 것에 마음이 끌려 본 것’도 정해진 길 이외의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려 본’ 것도 음악과 춤의 유혹이다. 작은 유진은 학원을 빼먹고, 거짓말을 하고, 학원비를 빼돌리고, 담배를 피우고 집을 나오는 아이가 된다. 그러나 유진이 이렇게 되는 것은 춤에 인생을 거는 오진구와는 달리 유년기의 상처 때문이다. 유치원 때의 성추행 사건의 후유증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작은 유진이, 같은 경험을 했으되 건강하고 정상적인 아이로 자라나 있는 ‘큰 유진’을 만나면서 유치원 때의 사건 아니, 그 이후 어른들의 잘못된 사후 수습 방식 때문에 생긴 상처를 자각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삶이라는 점에서 『몽구스 크루스』와 『유진과 유진』은 닮았다.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달라도 크게 다르다. 춤에 죽고 춤에 살려는 진구의 필사적인 태도가 출구 없는 감옥, 지도 없는 세상에서 저항하는 그 나이 아이들 나름의 치열한 존재 방식이라면 유진에게 춤은 하나의 우연일 뿐이다. 유치원 원장의 성추행은 어린 유진이 인형의 목을 자르고 사지를 찢어 놓게 만들었다. 그만큼 유진의 몸은 강하게 반응을 했던 것이다. ‘깨어진 그릇’ 취급을 하던 할아버지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이의 살갗을 벗겨 내기라도 하려는 듯 문질러 대’며 딸의 몸을 박박 닦고 또 닦았던 엄마는 결국 유진으로 하여금 머릿속에서 ‘그 일’을 완전히 지워지게 만들어버렸다. 같은 일을 당했던 ‘큰 유진’의 부모가 ‘네 잘못이 아니’라며 딸에게 사랑을 퍼부었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성추행, 성희롱, 성폭력. 여자아이들에게 평생 씻겨지지 않는 정신적, 육체적 상흔을 남기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들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심심치 않게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한다. 작가 이금이로 하여금 『유진과 유진』을 쓰게 만들었던 것도 바로 그런 기사였다고 한다. 그런 의식으로 쓰여진 작품이 요 근래에 많이 나왔다. 성폭력 예방 차원에서 출간된 『가족앨범』(울리케 볼얀 그림, 실비아 다이네르트, 티네 크리그 글), 『네 잘못이 아니야, 나탈리』(질 티보 글, 마리 클로드 파브로 그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작품들은 성폭력을 당한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알려 준다. ‘큰 유진’의 부모는 꼭 그렇게 한 셈이다. 그런 만큼 큰 유진은 후유증 없이, 자기 존중감이 뛰어난 아이로 자라났다. 작가가 그려 놓은 작은 유진과 큰 유진의 대조, 아니 작은 유진 부모와 큰 유진 부모의 대조를 보면서 나는 입맛이 썼다. 너무나도 교과서적이지 않은가! 성추행-찢겨진 인형-깨어진 그릇-아프도록 박박 닦는 엄마-탈선 혹은 춤이라는 모티브들을 관통하는 것은 ‘몸’이다. 그러나 『유진과 유진』에는 ‘몸’이 없다. ‘몸에 대한 설명’ 이 있을 뿐이다. 역시 성추행 문제를 다룬 티에리 르냉의 청소년 소설 『운하의 소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숨 막히게 몸을 느끼게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두 유진 부모들의 서로 다른 ‘사후 처리’ 방식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래서 그 친절한 설명 방식에도 불구하고 성추행을 다룬 문제 소설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청소년 성장소설이 되어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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