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도시형 경차를 몰고 있고, 정체 구간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여자는 허리가 아파오는데, 전날보다 조금 더 심하다. 등허리 오른쪽 아래가 특히 아프다. 깜빡이등처럼 쿡쿡 쑤시는 고질적인 통증, 물리치료사도 덜어주지 못하는 통증이다. 여자는 자기가 하는 일을 더는 견딜 수 없고, 일할 때 상대해야 하는 인간들은 더더욱 견딜 수 없다. 직업을 바꾸려면 기운을 차려야 한다는 것을 여자도 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쩌면 여자는 자신에게 그럴 기운을 불어넣어 주지 못하는 남자를, 오늘 저녁 자신과 거의 동시에 귀가할 그 남자를 나무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자야말로 늘 축 처져 있는 여자를 나무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를 왜 나무라고 있는지도. 아이들은 다 컸다. 이제는 집에 들어가 품에 안을 수도 없다. 말랑말랑한 흰 빵 같은 아이들 살을 주무르면서 기력을 되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 동글동글한 빵처럼 작고 귀여웠던 꼬마들이 어느새 덩치가 집채만 한 사춘기 아이들로 자랐다. 방금 앞차 운전자가 갑자기 급정거했고, 여자는 급브레이크를 밟아 가까스로 사고를 면한다. 바로 그 순간, 오른쪽 아래 등허리를 작은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전보다 더 날카롭고 더 끔찍한 통증이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지만, 그럴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라디오 버튼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요란한 시그널 송도, 슈퍼마켓 광고도 들리지 않고, 세상사를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다. 채널을 돌리던 중 스피커에서 우연히 미셸 베르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는 순식간에 여자를 사로잡는다. 여자는 노랫말을 귀담아듣지도 않건만, 그의 목소리는 단조로운 피아노 선율을 타고 여자에게 말을 걸고, 멜로디가 여자를 채운다. 단박에 여자 안에서 무언가가 뭉쳤다가 이내 녹아내린다. 모든 고통이 잦아든다. 아름답다.
이런 미적 감동의 순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는 완전히 깨어나서 그곳에 오롯이 존재하며, 마침내 자신 앞에 그리고 세계 앞에 깨어난다. 아름답다. 그런데 실제로 무엇이 아름다운 것일까? 음악인가, 아니면 음악이 여자에게 불러일으킨 어떤 것일까?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감정은 오래 지속하지는 않지만, 영원을 닮았다. 이 미적 쾌락은 일종의 신호나 약속과 같다. 노래의 아름다움은 여자에게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속삭이고, 여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오래된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한다. 여자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 삶에서 구하는 것, 즉 여자의 욕망을…. 이 여자의 이름은 뤼시다. 아름다움은 그렇게 자포자기의 순간에 뤼시를 구했다.
여자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이 남자는 열정적으로 여자를 유혹한다. 거의 직업이나 병에 가까운 수준으로 새로운 여자를 유혹하기 좋아한다. 남자는 여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말과 여자들에게 접근하는 수법을 꿰고 있으며, 여자들을 안심시키는 방법도, 딱 필요한 만큼 겁주는 방법도 알고 있다. 남자는 거리에서, 가게에서, 레스토랑에서, 회의실에서 여자들을 탐색한다. 우연한 만남이 촉발하는 흥분은 중독성 강한 마약처럼 번번이 남자의 의지를 꺾어놓는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가 서 있던 그 길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한 여자가 막 빵집에서 나오는 참이다. 갈색 머리에 투피스 차림의 여자는 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흩날리며 빠른 걸음으로 자기 차에 올라타고 있다. 처음으로 남자는 여자를 쫓아가거나 재치 있는 말을 찾아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유혹할 마음도 없다. 남자는 단지 여자를 바라보고만 싶다. 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규칙적인 동작을, 여자의 모습을…. 남자는 그 순간, 낯선 희열을 느낀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자신이 이처럼 사심 없는 기쁨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다. 여자의 아름다움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남자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여자의 온몸을 구석구석 뜯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접근할지 궁리하지도 않는다. 남자는 처음으로 성욕 없이 여자를 바라보며 아주 특별한 쾌락을 경험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미적 경험이다.
아름다움을 관조할 때 우리는 온전한 충족감을 느낀다. 남자는 자신이 새로운 육체를 쫓는, 사슬에서 풀려난 수캐와는 다른 존재로 느껴져서 흡족하다. 매혹된 채 한참동안 멍하니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멀어지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다. 그 수캐가 사실 심미가(審美家)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남자는 잊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
교통 체증은 점점 심해져 오르세 박물관 일대까지 이어진다. 라디오 진행자는 방송이 끝나기 전 시답잖은 농담을 늘어놓느라 미셸 베르제의 노래를 중단한다. 뤼시는 잊지 말고 딸의 무용 강습료를 내야겠다고, 얼마 전 선금을 낸 물리치료비는 환불받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아들이 이 박물관에서 쿠르베의 작품을 봤다는 사실을 뤼시는 알지 못한다. 아들의 머릿속은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 특히 사실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작품 「오르낭의 매장」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아들은 배운 내용을 그림에서 확인하기는 했지만, 쿠르베의 명화 앞에 섰을 때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이전에 하도 많이 들어서, 아들은 그 그림에서 더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감흥, 자신의 판단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학습이 끝나갈 무렵, 아들은 벌써 박물관에서 나간 뒤에 할 일에 온통 정신이 팔린 채 무심히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 앞을 지나간다. 그리고 갑자기 그림에 완전히 압도되어 걸음을 멈춘다. 주황빛 도는 노란색과 그 위로 펼쳐진 밤하늘의 암청색, 그리고 일렁이는 형상들…. 아들은 이 그림을 알지 못했고,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독특한 아름다움이 불시에 아들을 사로잡고, 서둘러 출구로 향하던 발걸음을 잡아 세운다. 아들은 그 아름다움이 선사하는 마음속 여행에 마음이 끌리고, 바로 그 순간 느껴지는 자유로운 기분이 너무도 좋다. 이 작품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아들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확신,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대한 자신감이 흐뭇하다. 그것은 아름답다. 의심의 여지없이 아름답다. 이 역시 아름다움이 종종 우리에게 일으키는 현상이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자유를, 힘을, 자신을 믿는 능력을, 즉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능력을 회복한다.
아름다움? 그렇다, 그 모든 아름다움 말이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불쑥 흘러나온 멜로디의 아름다움, 하늘빛 산봉우리와 바다 위로 깎아지른 듯 속아 있는 절벽의 아름다움, 그림의 아름다움,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움, 성당의 아름다움, 사물이 드러내는 아름다움까지, 아름다움 아름다움들, 그 모든 아름다움 말이다.
이 책에서 우리 관심은 ‘무엇이 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느냐’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느냐’다. 우리는 서두부터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시대에 따라 달라진 아름다움의 정의를 나열하지도 않을 것이고, 걸작들의 비밀을 파헤치거나 이미 잘 알려진 미의 황금률을 찾아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눈 덮인 산봉우리의 아름다움 이면에 신의 얼굴이 숨어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아름다움을 자아내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책에서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하는 일’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어디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 나는 십 대 시절, 그 나이에 종종 그러듯 방황하던 시기에 몇몇 음악의 아름다움이 나 자신을 깨닫고 발견하는 데, 어쩌면 발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일을 기억한다. 나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장지에서 무덤 위로 펼쳐진 하늘이 보여준, 마음을 뒤흔들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그 풍경을 본 순간 내 안에 예기치 못했던 힘이 차올랐던 일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우리가 함께 좋아했던 모든 것을, 모든 노래와 모든 풍경을, 아름다움이 우리 내면에 새겨놓은 모든 태도를 되짚어보았다. 그 아름다움에는 비록 죽음보다 강하지는 않아도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뒷날 철학 교사가 되자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는, 딱히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점점 더 내 강의의 중심 주제로 떠올랐다. ‘아름다움은 왜 우리를 사로잡을까?’ ‘아름다움은 왜 우리를 끌어당길까?’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일까?’ ‘신앙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사업에는? 사랑에는?’ ‘아름다움이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창의력, 통찰력, 결단력을 키우려면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야 할까?’ 나는 번번이 수업에서 학생들의 증언을 수집했다. 아름다움은 곳곳에서 우리를 도왔고, 일깨웠고, 해방했고, 불안하게 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진정시켰고, 그러면서도 활력을 주었다. 아름다움은 곳곳에서 삶을 더 강렬하게, 더 열려 있게, 더 충만하게 해주었다. 아름다움은 곳곳에서 치유했고, 아니면 적어도 치유를, 구원을, ‘탈출구’를 약속하는 것 같았다. 불안에서, 고통에서, 사실주의 혹은 편협한 합리주의에서, 씁쓸한 아이러니 혹은 자신감 부족에서 벗어날 구멍을 말이다. 이 책은 그렇게 쓰였다.
아름다움? ‘미적 감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단순히 관능적인 것도 아니고 정말로 지적인 것도 아닌 이 기이한 쾌락, 무상으로 주어지고 이해관계와 무관한 이 만족감,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순간 어느새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이 확실성. 나는 당신 자신의 마음속으로 떠나는 여행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자, 이것이 참 별난 모험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라. ‘인간’이라는 동물인 당신은 심오한 것들에 끌릴 수밖에 없다. 삶, 신, 진리에 대한 깨달음…. 하지만 당신을 매혹하는 이 아름다움은 표면적이다. 그렇다, 표면적이다.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는 화포에 발린 주황색과 파란색 물감에 지나지 않는다. 즉, 흰색 화포라는 표면에 펼쳐진 몇 가지 형태와 색채일 뿐이다. 어떻게 표면적인 것이 우리 깊은 곳을 건드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빵집에서 나오는 투피스 차림 갈색 머리 여자도 마찬가지다. 유혹을 일삼던 남자는 이 여자에게서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남자는 여자의 불멸하는 영혼과 대면하지도 않았고, 여자가 추구하는 가치들, 어쩌면 여자가 기꺼이 목숨이라도 바칠 가치들을 발견하지도 않았다. 이렇듯 사실상 남자를 홀린 아름다움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여자가 남자에게 등을 돌리기 직전에 드러낸 몇 가지 동작의 형태,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 옆얼굴에 떠오른 찰나적인 표정 같은 것 말이다. 뤼시를 사로잡은 노래의 아름다움도 본질적으로 표면적이다. 피아노 코드 세 개에 맞춰 가수가 단순한 낱말 몇 개를 흥얼거리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깊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아름다움의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물며 바다 풍경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다. 형태와 색 말고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햇빛이 조금 덜 강하고, 물빛이 조금 더 탁할 때 우리는 풍경 따위는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햇빛이 강렬해져서 갑자기 바다가 투명하게 빛나고 문득 수면에 터키옥 빛깔 선이 나타나면, 그제야 우리는 넋 놓고 그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여느 동물과 달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형태의 아름다움에 얽힌 기이한 역사를 이어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는 무언가는 아마도 우리의 비밀, 우리의 수수께끼, 즉 ‘인간 자신’이라는 수수께끼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흔히 행복(우리 자신 혹은 부모나 자식의 행복), 건강, 성공,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권력, 쾌락, 영생 등 또 다른 대답들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아름다움을 위해서 산다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비록 우리가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대상은 아닐지라도 아름다움에는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를 멈추는 힘이 있다. 나는 바로 이 수수께끼 같은 만남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왜 이 표면적인 형상들은 우리를 그토록 깊이 감동하게 할까? 왜 그런 감동이 우리에게 그토록 필요할까? 왜 우리에게는 그토록 아름다움이 필요할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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