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젠더와 섹슈얼리티
여성 혐오와 표현의 자유
로빈 시크의 싱글 「블러드 라인blurred line」(흐릿한 선)에서 로빈 시크는 굿 걸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소울풀하게 노래한다. 말하자면 기절할 정도로 환상적인 섹스 말이다. 그녀가 원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더라도 주겠다고 한다. 이 노래는 귀에 쏙쏙 박히게끔 잘 만들어진 노래다. 2013년 여름의 공식 주제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블러드 라인」은 여성의 ‘노우no’가 ‘예스yes’를 의미한다는 구시대적 믿음을 다시 살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비평가들은 모두 이 노래 밑에 깔린 성폭력의 뉘앙스에 반발했다. 그들이 틀린 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 로빈은 그냥 안단다. 여자여, 당신이 원한다는 걸. 그냥 잘 안단다. 그러니까 잔소리 말고 그에게 주어라. 남자와 여자가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블러드 라인은 로빈 시크의 최대 히트곡이다. 또 다른 싱글 「Give It 2 U」에서는 나쁜 남자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자기가 여인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다고 말하는데 다름 아닌 그의 성기를 의미하고 있다. 비판이 쏟아졌지만 시크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여성과 여성의 신체는 아름답습니다. 남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고 싶어 하죠.” 아마 그래서 그런가 보다. 남자는 원하는 것을 원한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는 이 두 곡을 좋아한다. 저절로 흥이 나 춤도 추고 싶고 따라부르고 싶다. 이 노래들은 들으면 기분 좋아지도록 잘 뽑아낸 팝음악이 맞다. 하지만 나는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팝음악을 즐겨야 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 노래들을 즐긴다. 그러니까 내가 감정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야만 한다. 나는 가벼워져야만 한다.
카니예 웨스트가 「이저스Yeezus」라는 제목의 앨범을 발매했다. 매우 강렬하고 야심찬 앨범으로 사운드는 적대적이지 않으면서 적당히 공격적이다. 처음 이 앨범이 나왔을 때 나는 그 노래들을 계속해서 들었다. 하지만 이 앨범을 사랑하고 싶었으나 가사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리더가 있고 추종자가 있어. 하지만 나는 스왈로어가 되기보단 딕이 될래.”You see it’s leaders and it’s followers. But I’d rather be a dick than a swallower 「뉴 슬레이브New Slave」란 곡의 가사다. 여성 비하적인 가사가 차고 넘친다. 그중에는 「블러드 온 더 리브즈Blood on the Leaves」 같은 명곡도 있어서 이 앨범을 전부 다 거부할 수도 없다. 우리는 계속 좋은 실력과 나쁜 행동이라는 불편한 조합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건 그냥 노래일 뿐이다. 이 아티스트들은 그저 자신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나 또한 작가이고 창작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급기야는 웃기는 강간 농담을 들을 때도 있었다. 에버 메이나드가 모든 여성들은 강간 공포를 피할 수 없다고 한 말이나 완다 사익스가 강간을 피하기 위해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질을 갖고 싶다는 말이 그렇다. 물론 난 강간 농담을 싫어하지만 검열 또한 싫어한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다.
픽업 아티스트(여성을 유혹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 켄 호인스키Ken Hoinsky는 그의 책 『게임을 넘어서Above the Game』를 출판하기 위해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받았다. 그 책은 여자 앞에서 수줍어하거나 어색해하는 남자들을 위해 자신의 기술을 나누어 주는 책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호인스키의 프로젝트에 펀딩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한 조언 때문에 반발이 일어났다. 그 조언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는 ‘예스’와 ‘노우’의 선을 흐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킥스타터라는 회사는 펀딩 프로젝트를 취소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서야 회사는 사과를 했고 이런 유혹의 달인들이 자사 사이트에서 펀딩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성폭력 방지 단체에 금전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호인스키는 책을 출간할 것이고 여성을 인간이 아닌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여성의 ‘싫어’를 ‘아마도’로 제멋대로 해석하는 픽업 아티스트들의 클럽에 가입할 것이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대놓고 원한다. 우리 사회의 문화는 남자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문화이다. 고등학교 남학생이 모델 케이트 업튼을 졸업 무도회에 초대하면 대단한 녀석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비욘세의 남성 팬이 콘서트에서 무대에 올라가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엉덩이가 거기 있으니까, 그녀의 엉덩이가 탐스럽게 생겼으니까, 만지고 싶었으니까. 공상과학소설 인터넷 커뮤니티를 들어가 보면 여성들이 모임에서 얼마나 성희롱을 당하는지에 대한 글들이 곧잘 올라온다. 모임에 참석한 수많은 여성들은 남자들이 자신을 더듬고 추파를 던지고 호텔방까지 유인하고 난데없이 안아서 번쩍 들어올리기도 했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여성이자 페미니스트로서, 그것이 수만 가지 형태의 크고 작은 여성 혐오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분명 나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냥 웃어넘기기는 어렵다. 가볍게 넘어가라는 말을 듣는 것이 힘들다. 가볍게 넘어가면 그 망할 것들을 계속 하라고 놔두는 꼴이 되니까. 문제는 이런 일 중에 하나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노래들 말이다. 지나가는 장난이고 농담이란다. 예뻐서 한번 안아본 건데 어때? 그냥 가슴 한번 만진 건데 어때? 웃고 넘어가요. 당신은 아름다우니까요. 남자가 외모로 칭찬 좀 할 수도 있지, 뭘 그래요? 과연 그럴까? 이것들은 훨씬 심각하고 근본적인 이 사회적 질병의 증상들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여성들은 남성의 변덕과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고 여성의 가치는 계속해서 폄하되거나 무시되어 버린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이라고. 여성 혐오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가장 끝에는 대중문화에서의 여성 혐오가 자리 잡고 있고, 중간에는 여성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행태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이 나라의 입법자들이 있다. 입법자들은 이 모든 여성 혐오가 활개 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용히 만들어 주고 있다.
2013년 텍사스, 오하이오, 노스캐롤라이나 주 의원들은 여성의 생식권과 임신 출산의 자유를 다시 한 번 완전히 짓밟으며 여성의 낙태 여부, 낙태 장소, 태아의 정의를 자기들끼리 정하고 있다.
여성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문화, 여성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여성의 자립성과 사적인 공간을 가볍게 무시하도록 종용하는 대중문화를 웃으며 지지하는 문화는 곧 낙태 제한법을 제정하려고 오늘도 열심히 땀 흘리며 달리고 있는 저 입법자들을 선출하는 문화이다. 혹은 이 의원들이 낙태 제한법을 통과시키려고 오늘도 열심히 땀 흘리며 달리는 바람에 다른 남자들도 쉽게 여성을 대상화하게 된 걸까? 이것은 여성 혐오의 낙수 효과일까? 닭이나 달걀이냐 무엇이 먼저일까?
2013년 6월 30일,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의 토론방에서 이런 주제를 내놓았다. “만약 더 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털어놓으면 낙태권을 지지하는 인구가 늘어날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을 보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성들은 과거의 아픔을 털어놓으면서까지 계몽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더 위대한 선을 위해 개개인이 희생할 수 있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 모른다.
여기 한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친구, 여동생, 엄마, 이모 중 누구든 될 수 있다. 그녀가 임신을 했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었으나,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남자 친구와 함께 ‘그래 한번 해보자.’라고 결정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낙태할 수 있다고 믿는 낙태 합법론자였을 수도 있겠지만 임신 소식을 듣는 순간 자기의 몸에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도 그녀는 이제까지 낙태 합법 찬성론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만약 그녀와 남자 친구가 아이에게 좋은 삶을 약속하지 못했다면 낙태를 했을 것이다. 이런 그녀가 임신 27주에 부엌에 있다가 하복부에 통증을 느껴서 쓰러졌는데 하혈이 멈추지 않는다. 남자친구와 병원으로 달려간다. 의식을 잃는다. 일어났을 때 그녀 안에 있던 아이는 사라졌다. 그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이후 수년 동안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해보자. 이것이 바로 임신과 출산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한 여성의 삶과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선택은 이루어졌다. 선택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 여성이 생명의 고귀함을 위해 이 선택권이 희생되어야 하는 주에 살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때는 누가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 해줄 것인가?
만약 그녀가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다면 어떨까? 너무 개인적이고 너무 고통스러워 남들 앞에서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고백이 효과적이긴 할까? 감동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그들은 이미 낙태 찬성을 하는 이들일 것이고 생식권을 깎아 내리는 법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감동받지 않는 사람들은 그녀의 아픈 과거 고백에도 감동받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슬픈 사건이 되고 사람들은 잠깐 동안 동정한 다음에 그다음 슬픈 이야기로 넘어갈 것이다. 여성과 여성의 임신에 관한 슬픈 이야기는 많고도 많을 테니까.
로빈 시크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노래한다. 그래, 괜찮아. 넘어가자. 다니엘 포쉬는 팬들에게 여성의 아랫배를 가볍게 만지고 그 장면을 녹화하라고 말했다. 그래, 넘어가자. 켄 호인스키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했다. 텍사스 주지사 릭 페리는 웬디 데이비스 민주당 상원 의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싱글맘의 딸입니다. 또한 십 대에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텍사스 상원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모든 생명은 태어날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단 말입니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 넘어가자. 오하이오에서는 낙태를 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반드시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하고 낙태 합병증이 있을 때는 일반 병원이 아닌 개인 병원을 찾아가야만 한다. 이런 갖가지 법안을 만드는 전국의 입법자들은 다 여성을 보호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고요. 남자들은 여자를 보호하고 싶어 하니까요. 여자 엉덩이를 움켜잡고 싶을 때는 빼고 말이죠.
그냥 가볍게 넘기란다. 남자들은 원하는 것을 원하니까. 그리고 자기들의 욕망을 나조차도 따라 부를 수밖에 없는 근사한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예스냐 노우냐, 그 사이의 선이 흐리다더니blurred line 정말 그렇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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