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언어, 문학, 번역 그리고 나*
나는 오랫동안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을 뿐 생계를 위하여 일하는 전문 번역가는 아니다. 나는 뒤늦게야 거의 백 권 가까이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어 텍스트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고 한국 소설이나 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나는 실제 번역을 통해 무수한 문제들과 마주치면서 그럭저럭 성공하거나 거의 실패에 가까운 결과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번역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거나 설명 혹은 비평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못했다. 무관심했다기보다는 직접 번역을 하면서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론적인 반성이나 검토보다는 단순히 ‘언어, 문학, 번역’과 관련하여 나의 지나온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따라서 오늘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보다는 ‘나는 왜 번역을 하게 되었는가?’ ‘나에게 번역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번역하고자 했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 혹은 설명의 시도라고 하겠다.
서울말 배우기
나의 의식적인 삶은 ‘타자’와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타자’와의 만남은 나와 세계 사이에 가로놓인 소통의 어려움에 대한 의식을 의미하고 그 의식을 출발점으로 나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능력의 배양, 그리고 타성에 젖은 일종의 쇼비니즘에서 해방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타자와의 만남 중 두 가지 경험만 말해보겠다.
나는 경상북도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세 살 되던 1955년 봄,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혼자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에 입학했다. 낯선 곳에서 경이롭고도 두려운 ‘타자’와 만난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수도 서울의 중심부는 거의 폐허였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타자’는 ‘서울말京語, 어찐 말’이라는 낯선 언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당시는 교통, 정보, 경제적 장애 때문에 원거리 유학이 쉽지 않았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토박이 서울말만이 통용되고 있었다. 나는 주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유일한 시골 출신의 ‘미운 오리 새끼’가 되고 말았다. 소외되어 조롱당하지 않기 위해서 ‘타자의 언어’를 신속하게 습득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 언어 습득에는 교사가 따로 없었다. 같은 한국어였지만 어휘, 어미 변화, 특히 억양에 있어서의 미묘한 차이는 배우기 쉽지 않았다. 어린 나는 차이를 ‘눈치’로, 즉 세심한 주의와 발견을 통해서 신속하게 숙지하고 적응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통과 관련하여 흔히 거론되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는 번역이론에서 말하는 ‘기점 언어-목표 언어(출발어-도착어)’ 모델과 상통하는 것이다. 두 가지 다 판독과 해석의 과정, ‘약호 조립-약호 풀이’라는 처리 과정을 거친다.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서나 동일한 언어 내에서나 ‘소통’은 언제나 일종의 ‘번역’이다. 모든 번역 이론가들이 지적하듯 ‘번역을 연구한다는 것은 언어를 연구하는 것이다’. 내가 위기의식과 함께 이 점을 깨달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언어 습득이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르렀을 무렵, 첫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한 날, 밥상머리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나는 또다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야가 언제부터 이리 어찐 말을 잘 씨부리게 됐노……” 나는 ‘우리’의 낯익은 세계에서 다시 미운 오리 새끼가 된 느낌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언어의 여러 층위와 미묘한 음성학적 차이에 민감해졌다. 한편, 고향의 광범위한 지역 일원에 널리 알려진 규방가사 작가였던 나의 조모는 『몽유록』을 위시하여 여러 편의 규방가사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의 머리맡에서 항상 우리의 고전소설 『춘향전』 『사씨남정기』 『숙향전』 등을 일정한 박자와 리듬에 실어 암송하면서 가사노동의 시름을 달래는 습관이 있었다. 이 또한 어린 나의 언어 감각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린 나는 부모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외톨이의 고독감과 민감해진 언어적 감각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점차 시 읽기와 쓰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당시 명성 높은 소설가, 평론가였던 국어교사들 역시 나의 언어 감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미당 서정주 선생의 이런 리드미컬한 시를 처음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나는 어떤 슬픔의 정조와 더불어 그 정조를 싣고 흐르는 미당 선생 시의 운율 속에서 어린 시절 내 몸안으로 들어온 생래적 노래의 물결과 재회하는 느낌이었다.
이때 이후, 언어와 문학에 대한 관심과 천착은 나의 변함없는 운명이요 천직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장래의 진로 문제 때문에 고민해본 적이 없다. 그저 언어와 문학의 길을 계속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삶이 마음에 들었고 행복했다.
프랑스어 배우기
나는 상과대학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물리치고 문과대학의 불문과에 진학했다. 내 가정 환경의 모태였던 유가儒家의 고루한 예절, 사고방식, 학습 방식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고, 다른 한편 번역판으로 간신히 접하여 감동받은 앙드레 지드 등 몇몇 프랑스 작품들을 원어로 읽는 것이 꿈이었다. 일제강점기 지식인 세계의 지배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당시 이 나라의 지식인, 특히 문학인들의 세계에서 불문학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게 대학 시절은 가난했지만 빛나는 자유의 체험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1961년은 4·19 학생혁명의 회오리가 막 지나간 축제 마당이었고, 또한 전후의 폐허로부터 조금씩 정신을 추스르기 시작한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몇 종의 세계문학전집과 포켓판 문고본들을 통해 외국 문학 작품들이 번역되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최초의 『불한佛韓 소사전』이 서점에 등장한 해로 기록된다. 언어, 문학, 번역의 측면에서 볼 때 특히 중요한 사실이 또하나 있다. 나는 이른바 ‘4·19세대’ 혹은 ‘한글세대’에 속한다. 즉 일제강점기에 성장하고 교육받은 관계로 일본어를 공용어와 교육 수단으로 강요받아온 앞선 세대와 달리 우리는 해방 전후에 태어나 일본어 교육을 강요받지 않고 전과정을 한국어로 교육받고 한국어만을 사용한 첫 번째 세대, 즉 일본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외국어(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배우고 읽고 번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대였던 것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전쟁에 동원되는 일 없이 평화 속에서 모든 정규 교육 과정을 결손 없이 이어갈 수 있었던 행복한 첫 번째 세대였다.
대학에는 한국 불문학계에서 명성 드높은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강의는 휴강이 잦았다. 불문과 강의는 대부분 강독으로 진행되었다. 물자가 부족한 시대였으므로 원서를 구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교재는 질 나쁜 종이에 조악하게 등사된 프린트나 얄팍한 원서 문선집文選集, pages choisies이 고작이었다. 그 교실에서 나는 ‘해석’이라는 외국어 교육 방식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종의 ‘번역’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나는 고등학교 때의 관심을 이어 대학에서도 시를 썼고 발표했다. 나의 관심은 언제나 언어가 가진 결과 풍미와 그 무한한 가능성에 집중되었고 나의 정신은 두 개의 언어와 문학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했다. “인식connaissance은 곧 비교comparaison”라는 시인 클로델의 말은 나의 정신의 일관된 존재 방식, 실천 양식이 되었다.
프랑스, 그 타자의 충격
내가 진정으로 ‘타자’의 세계 그 자체를 만나게 된 것은 1959년 말, 프랑스 정부 장학생이 되어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였다. 그때까지 받아온 대부분의 프랑스어 교육이 책을 통한 읽기, 즉 해석하기와 문법 습득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니 말하는 습관을 익힐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돌연 프랑스의 대학 생활 속으로 던져진 나의 경험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박사 과정과 별도로 학부 과정 강의를 수강하기 시작했다. 첫 강의는 에밀 졸라에 대한 것이었다. 소설 『제르미날』은 첫 페이지부터 탄광 광부들의 채탄 과정, 낯선 도구들, 그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전문적 어휘들로 가득차 있었다. 교수는 강당에서 빠른 속도로 말을 했고 프랑스 학생들은 그 빠른 말을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 그들의 노트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와 기호로 가득한 속기록이었다.
대학 강의실만이 아니라 기숙사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일상적인 대화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 식당에서 한 프랑스 친구를 만난 나는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즉 “헬로” “안녕” “살뤼salut, 친한 친구 사이에 가볍게 하는 인사” 같은 ‘친교적 기능fonction phatique’을 수행할 기회였다. 나는 “식사했니?” 하고 말을 붙이고자 했다. 이것은 “너 밥 먹었니?”라는 구문에 해당된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 평범한 한국어 구문이 신속한 통사론적 분석을 거쳐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를 상징하는 프랑스 사람의 주식은 ‘밥’이 아니라 ‘빵’이다. 따라서 문화적 상응관계를 바탕으로 유추해낸 목적어와 함께 내 입에서 나온 번역판 의문문은 이랬다. “Est-ce que tu as mangé du pain?(너 빵 먹었니?)” 친구는 즉시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Du pain? Mais quel pain?(빵이라니? 아니, 무슨 빵?)” 프랑스어에서도 “식사했니?”라는 질문은 한국어처럼 목적어를 생략하고 ‘먹다’ 동사를 자동사로 활용하여 그저 “Tu as mangé?(너 먹었니?)”라고 표현하면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나는 대화에서 항상 말하는 쪽이 아니라 미소 지으며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쪽이 되어버렸다. 내가 침묵을 지키며 짓는 ‘동양적’ ‘낙천적’ 미소는 사실상 언어 능력의 결핍을 은폐하는 가면이었다. 그러나 달변의 타자는 나를 침묵의 피난처 속에 늘 방치해두지는 않았다. 자신의 의견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때 나는 대개 긍정으로 대답했다. 부정으로 답할 경우는 복잡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역 작품 이후의 반성─내가 좋아하는 텍스트만을 번역한다
나의 첫 번역 경험은 1974년 여름, 내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에 찾아왔다.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거처마저 마땅치 않았던 나에게는 서울이 오히려 ‘타자’의 세계처럼 낯설었다. 대학에 교직을 얻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나를 딱하게 본 누군가가 내게 번역 일거리를 주선해주었다.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내가 처음 해본 번역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신간 소설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번역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나의 선택이 아니라 생계의 수단이었다는 점이 따분했다. 원작에 감동받아 시작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문장의 묘미나 번역의 재미에 끌리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경험은 중요했다. 반성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곧 대학 강당에 서게 되면서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번역 청탁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반드시 텍스트가 번역할 만한 흥미와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즐거운 번역만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번역할 것인가였다. 나는 수동적으로 청탁받기에 앞서 먼저 번역 소개할 서적을 정하고 출판사와 접촉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교섭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당시 출판계는 외국 정보에 어두웠다. 문학 서적의 경우, 출판사들은 기껏해야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나 프랑스의 공쿠르상 수상작에 매달렸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장 그르니에의 『섬』, 미셸 투르니에와 파트릭 모디아노를 소개하다
한 예로 장 그르니에의 철학적 에세이 『섬』의 번역 출판 과정을 들 수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카뮈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장 그르니에의 몇몇 저작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에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섬』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몇몇 출판사에 이 책의 출판을 제안했을 때 그들의 질문은 늘 같았다. “이 저자 유명한 사람입니까?” 당시 국내에서 장 그르니에라는 이름을 아는 독자는 거의 없었다. 무려 다섯 곳의 출판사가 거절했다. 나는 결국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에 『섬』의 첫 번째 산문 『공空의 매혹』을 번역 소개했다. 독자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거절했던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책은 출판되었고 좋은 판매 성적을 얻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는 르 클레지오, 파트릭 모디아노, 미셸 투르니에, 크리스토프 바타유, 로맹 가리, 로제 그르니에, 에마뉘엘 로블레스 등 프랑스의 유수한 현역 작가들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말 나는 다시 약 2년간 프랑스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나는 1969년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도착한 이래 줄곧 『르 몽드 데 리브르』나 『마가진 리테레르』 같은 프랑스의 서평지와 문예지를 거의 빠짐없이 구독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아왔다. 그와 같은 지속적 관심은 지난 30~40년간 프랑스 문단과 독서계의 동향을 관찰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프랑스 문단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외국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나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주로 평가가 안정적인 1960년대 이전의 ‘고전’에 한정되어 있다. 그 결과 오늘의 프랑스 문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쉽다. 나는 1978년 어느 날, 한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출판사를 개업한 그는 내게 출판에 적당한 책이 있으면 한 권 번역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을 번역하여 보냈다. 내가 오래전부터 주목하고 있던 작가의 대표작이었다. 번역 원고를 받은 친구의 출판사로부터는 1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소설이 길고 무겁고 난해한 탓인 듯했다. 걱정이 된 나는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의 출판을 보류하도록 요청하고 그 대신 당시 호평을 받으며 공쿠르상 후보에 자주 오르던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번역하여 보냈다. 그러나 출판사는 두 번째 원고를 받고도 또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에 모디아노는 그해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늘 그랬듯이 여러 출판사가 경쟁적으로 이 책의 번역 출판에 열을 올렸다. 수상 소식을 접한 다른 출판사가 여러 역자를 동원하여 신속하게 번역했다는 소문과 함께 책이 나오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의 묵은 번역 원고가 출판되었다. 베스트셀러 번역에 연연하는 듯한 인상이 거부감을 주었다. 한국이 아직 세계 저작권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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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9월 13일, 한국문학번역원 주최 제4회 세계번역가 대회 〈번역의 진화〉에서 가진 기조 강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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