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덕은 가르칠 수 있나?
젊은 교수가 첫 수업에서 느낄 만한 흥분이 수십 년을 가르치다 보니 사라졌다가, 지구 반대편인 칼림퐁에서 다시 샘솟았다. 학생들은 매우 짧게 깎은 머리에 붉은 승복을 입은,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는 스님들이었다. 나는 비아시아인에 백발이었다. 그들에게는 배우기는 했지만 원어민에게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언어를 구사하는, 이를 테면 약간 기이한 사람이었다. 그런 흥분과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진심어린 우호와 존경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젊은 교수처럼 흥분했음에도 계획했던 강의 소개말을 상당히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칼림퐁에서의 수업을 통해 정리하고 싶었던 대주제가 두 개 있었다. 그 첫째는 교육학적이라고 할 만하다. 강의의 시작으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두 스승인 붓다와 소크라테스를 살펴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명한 두 스승은 무지를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그들 제자들의 일반적인 생각들이 무지했으므로 여기서 무지란 곧 제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뜻하기도 한다), 특정 기술을 이용하면서 제자들을 더 높고 더 깊은 통찰과 이해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들의 그런 교수법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동서양의 대단한 차이점이 보이고, 그 차이점이 바로 내가 정리하고 싶었던 우리의 첫 번째 주제이다.
일반적으로 전통 서양철학은 엄정한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지적인 명료함을 얻으려 한다. 반면 전통 동양사상은 적절한 수행과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나는 이런 대조를 결론이 열려 있는 하나의 진행형 가설로 내세우려 한다. 이 가설이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 많은 생각과 문제들을 정리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테지만, 사실 이 계획은 많은 연구와 나아가 검증과 수정 작업을 필요로 한다. 바로 여기 시작점에서부터 우리는 이런 가설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지적인 명료함을 위한 서양적 시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나? 그러므로 토론을 하는 동안 “어떤 관점에서 동서양의 사고 형태를 비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 염두에 두도록 하자.
내가 탐구하고자 했던 두 번째 주제는 시간의 성질에 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서구의 우리는 직선적인 시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반면 불교도들은 순환적인 시간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다시 첫 번째 주제로 돌아가 사람들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붓다와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하나 살펴보는 것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붓다와 소크라테스 둘 다 그들의 추종자 혹은 제자들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전면으로 불러내려는 시도가 곧 교육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이란 기억해내는 것이지 정보를 많이 모은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교수법은 단순한 의견에서 이성에 의해 지성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유사하게 붓다도 우리가 일상에서 희미하게 만들어버린, 진정한 정신의 영원한 불빛 속으로 돌아가는 법을 보여주려 했다.
대화편 『테아이테투스』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가르침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즉 우리의 정신을 새장처럼 보는 견해를 조롱하게 한다. 우리의 정신이 새장 같을 때 스승은 새장에 새들을 마구 집어넣듯 지식의 조각들을 끼워 넣기만 한다. 붓다와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우리의 진정한 본성, 즉 늘 그곳에 있어왔던 깊은 수준의 우리 그 자체를 호소한다. 둘은 지식의 조각들을 추가하기보다, 진정한 우리 자신을 엄폐하고 방해하는 것들을 떨쳐버리려 한다.
그런데 이런 유사함은 그 즉시 하나의 차이점을 드러낸다(앞으로도 거듭 이렇게 유사함이 차이점으로 이어질 것이다). 붓다가 말하는 우리 정신의 진정한 본성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두 번째 수업에서 첫 강독으로 살펴보았던 플라톤의 『메논』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 대화편에서 메논은 으스대며 소크라테스에게 가서 “덕을 가르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평소보다 더 신랄해진 소크라테스는 “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잘 모르겠으니 당신이 나에게 덕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 문제의 단어 아레테arete가 등장한다. 보통 덕virtue으로 번역되는 아레테는 때로 탁월함excellence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나는 이 단어로 그리스인들이 의미했던 것을 알려주면서 이 대화편을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칼의 비유를 들었다. 그냥 최소한 버터라도 자를 수 있는 칼날이 있는 보통 칼이다. 하지만 잘 자르려면 칼은 그것만의 덕인 날카로움이 필요하다. 날카로움은 칼이 잘 기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카르마파는 즉시 이해했고 다른 스님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어리둥절해 했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주자 스님들도 덕이란 잘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고, 인간에 관해서라면 그런 덕을 갖고 있을 때 잘 살 수 있음(예를 들어 행복함)을 이해했다.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잘 겨루기 위해 몸 상태를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잘 살려면 인간 존재의 전체 중에서도 정신이 좋은 조건 안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을 만들어야 할까? 소크라테스가 말하려던 것이 바로 그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조건이다.
그때 카르마파가 “더 정확히 말하면 이기적인selfish 쪽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플라톤의 사상을 더 자세히 설명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덕이 많은 사람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 모두에게 좋은 일에 집중하는 것이며, 덕이 많은 사람이 공동체에서 그 역할을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다소 성급한 요약으로 답을 내려주었다. 카르마파는 그 대답에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중에 그와의 개별 토론 시간이 되어서야 내가 질문의 요지를 놓쳤음을 깨달았다.
그가 얘기한 이기적이라는 말은 사리사욕에만 급급한 것이 아닌 세속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에고에 과하게 갇힌 나머지 모든 의식 존재의 진정한 본성으로 인식되는 비개인적인 불성의 상태, 혹은 지혜와 자비가 합일된 상태로부터 유리된 상태를 뜻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라는 생각에 대한 모든 집착이 이기적이 된다. 개인적인 에고에 대단히 집중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 말 아레타는 비록 사회적 자각과 관계한다고 해도 개인적인 덕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불교적 의미에서 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 즉 인간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은 해탈이 될 것이다. 덕이란 잘 기능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그리스적 개념도 여전히 의미심장하지만, 불교도가 봤을 때 그 조건이란 이를테면 불성 혹은 무아selfless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덕에 대한 그리스적 해석은 불교의 그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그렇다면 카르마파의 질문은 매우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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