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 사람을 알다
_엄마 룽잉타이의 서문
내가 유럽을 떠나올 때 안드레아는 열네 살이었다. 내가 타이베이 시 정부의 일을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안드레아는 열여덟 살 청년이 되어 있었다. 키 184cm의 고등학생 안드레아는 운전면허증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술집에도 드나들 수 있었다. 일찌감치 귀엽고 통통한 ‘젖살’이 빠진 얼굴은 선이 살아 있었고 고요하고 깊은 눈빛에는 거리를 두려는 의지가 묻어났다. 그런 안드레아가 와인 잔을 들고 탁자 맞은편에 앉아 ‘차갑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좀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의 사랑스러운 안안安安, 집에서 부르던 아명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에게 안기고, 입 맞추고, 내 손을 잡아끌고,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머리에서 땀냄새를 풍기던 그 남자아이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내가 다가가면 안드레아는 물러났다. 안드레아와 무슨 얘기라도 해볼라치면 그애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했다. 간절히 캐물으면 아이는 말했다. 전 엄마의 사랑스러운 안안이 아니에요. 저는 저라고요.
나는 안드레아와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드레아가 응한다 해도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열여덟 살 아들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안드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무엇에 신경쓰고 무엇에 신경쓰지 않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왜 이렇게 하고 왜 저렇게 하지 않는지, 무엇에 열광하고 무엇에 당혹스러워하는지, 나의 가치관은 그의 가치관과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지…… 내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독일에 있는 아이와 홍콩에 있는 나의 전화통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잘 지내?좋아요.학교는 어때?괜찮아요.……
방학 때 만나서도, 안드레아는 거의 모든 시간을 친구와 보내고 싶어 했다. 나와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서도 아이는 침묵만 지켰다. 눈은 휴대폰에 가 있었고 손가락은 문자를 보내느라 바빴다.
나는 그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도, 그냥 아는 것과도 다르다. 사랑은 때로 좋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할 때 핑곗거리가 되곤 한다. 사랑이 있으면 제대로 된 소통은 없어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이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 한다. 남자아이 안안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성장한 안드레아를 알아갈 수는 있다. 나는 이 사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열여덟 살의 이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안드레아에게 편지 형식의 칼럼을 함께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일단 수락하면 절대로 중간에 그만둘 수 없다는 게 조건이었다.
안드레아가 동의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나는 여러 차례 묻고 또 물었다.
“진짜? 너도 알겠지만 장난으로 하는 게 아니야. 원고 마감일까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써내야만 해.”
그때만 해도 책으로 낼 생각도, 독자가 있을지 없을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이 방법을 통해 어쩌면 열여덟 살의 세계에 들어가볼 수 있겠다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독자들의 편지가 전 세계에서 물밀듯이 날아왔을 때, 나는 정말이지 화들짝 놀랐다. 하루는 타이베이의 한 서점 계산대 앞에 줄을 서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낮고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글이 아니었다면 저와 제 아들은 서로 완전히 타인처럼 살았을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그의 눈은 억지로 참고 있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많은 부모들이 그 남자처럼 글을 복사해 아들딸에게 읽힌 다음 저녁 식탁에서 대화를 시도했다. 미국과 캐나다의 부모들도 편지를 보내왔다. 영어권에서 자란 자신의 아들딸과 나눌 수 있게 우리의 편지를 영문으로 받아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자식들의 입장에서 편지를 보내온 사람들은 이미 서른 혹은 마흔이 넘은 이들이었다. 그들에겐 부모와 소통할 길이 없었다. 설령 마음에 사랑이 남아 있다 해도 그 사랑은 오랜 세월 동안 두껍게 쌓인 침묵 속에서 얼어붙어버린 뒤였다. 마치 깊숙이 숨어 있는 고통스러운 상처는 어떤 붕대로도 싸맬 수가 없는 것처럼.
편지를 보낸 사람의 연령대가 다양한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이 한집에 살면서도 나눌 대화가 없고, 서로 절절히 사랑하지만 오히려 서로를 잘 모르고, 다가가기를 열망하지만 그 접점을 찾지 못하고, 표현하기를 원하지만 언어가 없다는 것을. 우리의 편지는 그들에게 캄캄한 바다에서 길을 잃었거나 항구를 찾아 헤매는 배에 가닿는 수기신호 같은 것이었다.
편지를 쓰는 과정은 매우 힘겨웠다. 안드레아는 나와 중국어로 말하지만 중국어로 글을 쓰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글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첫째, 안드레아는 영어로 편지를 썼다. 물론 안드레아는 독일어로, 나는 중국어로 쓸 때가 가장 자유롭게 잘 쓸 수 있지만, 우리는 각자 한 걸음씩 양보해서 영어를 쓰기로 했다.
둘째, 나는 안드레아가 쓴 편지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국제전화로 여러 차례 토론을 나누었다. 물론 통화할 때는 중국어로 말했다. 이 단어는 무슨 뜻이니? 왜 그 단어가 아니라 이 단어니? 이 단어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뭐니? 두 번째 단락을 마지막에 넣으면 주제가 더 뚜렷해지지 않을까? 네 뜻을 오해하지는 않았니? 중국어권 독자는 너의 그 논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데, 좀더 상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니?
셋째, 나는 답신을 영어로 써서 안드레아가 보고 답할 수 있게 했다.
넷째, 내가 쓴 영어 편지 역시 중국어로 한번 더 썼다. 다시 쓰는 도리밖에 없었다. 번역하면 오히려 의미가 모호해져버렸으니까.
이 네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는 무던히도 토론하고 논쟁했다. 나는 늘 안드레아에게 글이 엉성하고 ‘구체적이지 않다’고 비판했고, 안드레아는 내가 생트집을 잡고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쓴다며 참을 수 없어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우리의 인생철학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안드레아는 글쓰기를 ‘놀이’로 여겼지만 나에게 그것은 ‘일’이었다. 가치관과 생활태도도 대조적이었다. 안드레아의 태도가 3할이 세상에 대한 시니컬함, 2할이 농담, 5할이 진지함이었다면, 나는 8할이 진지함, 나머지 2할은 지성에 대한 회의였다. 안드레아는 나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늘었고 나는 그애를 진지하게 연구했다.
열여덟 살 사람을 알려면, 처음부터 배워야 하고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 한다.
무려 3년 동안 칼럼을 썼다. 중간에 원고가 늦어진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둔 셈이다. 안드레아에게 편지를 보내는 젊은 독자들이 이따금 물었다.
“어떻게 엄마와 소통할 수 있죠?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러면 안드레아는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사량으로 천 개의 도끼를 이긴다는 뜻의 권법으로 고수 대 고수의 대결에서 볼 수 있다. 엄청난 내공을 말한다의 내공으로 답하곤 했다.
“원고료를 벌거든요.”
지금까지도 안드레아가 애초에 왜 이 일을 수락했는지 모르겠다. 속으로는 여전히 불가사의하게 여겨지지만, 어쨌든 안드레아는 놀랍게도 3년 내내 잘 써왔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30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고, 또 각자 살고 있는 나라가 다를 뿐 아니라 그 사이에는 동·서양의 문화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도 안드레아가 열여덟 살이었던 그해에 물 위의 개구리밥처럼 각자 떠내려가서, 그후 서로 아득히 멀어져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시도를 했다. 나는 노력했고, 안드레아 역시 같은 노력으로 보답해주었다. 나는 열여덟 살 사람의 삶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안드레아 역시 처음으로 자신의 엄마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의 삶의 여정에서도 당연히 각자 흩어져 정처 없이 떠돌 것이다. 인생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3년 동안 바다 위 수기신호로 별을 응시했고, 달을 만끽했다. 뭘 더 욕심을 부리겠는가?
엄마 감사해요
_아들 안드레아의 서문
사랑하는 엄마, 우리의 편지가 책이 되어 나오려 하네요.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걸핏하면 엄마의 침대로 기어오르던 꼬맹이가, 귀신과 번개를 무서워하면서도 귀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며 좀체 잠들려 하지 않았던 꼬맹이가, 눈 깜짝할 새에 어른이 되어 혼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엄마와 대화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물론 우리가 쓴 글이 재미있을 수도 재미없을 수도 있지만요.
엄마, 편지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기억해요?
3년 전, 저는 제 감정에 유난히 충실했던 열여덟 살 청년이었죠. 제 딴에는 저 자신이 남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그 생각으로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3년 전, 엄마는 아들과 몇 년을 떨어져 지낸 탓에 나날이 안절부절못하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죠.
아이는 점점 자라고, 나이 차이와 서로 다른 문화, 따로 떨어져서 사는 데서 오는 거리감 때문에 엄마는 성인으로 접어든 자신의 아이를 전혀 ‘모른다’고 강렬하게 느꼈지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찾아낸 해결 방법이 바로 편지를 나누자는 거였고요. 이 편지가 엄마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일단 시작되고 나니 ‘맹수가 우리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엄마와 저 사이의 이견과 감정들이 쏟아져나와 수면 위로 떠올랐지요.
3년 동안의 그 과정은 진짜 무척 힘들었어요. 한 통 또 한 통 이어지던 국제전화와 메일들, 깊은 밤과 새벽에 메신저로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 수도 없이 벌였던 토론과 논쟁. 이 모든 것의 결과가 지금 독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네요. 엄마는 언제나 제 글쓰기가 정교하지 못하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원고 마감일이 됐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겠니?’라고 요구하고 또 요구했죠. 사실 이따금 저는 제 글이 엄마 글보다 더 좋은 것 같았다고요!
이제 지난 3년을 돌아보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3년 동안 편지를 나누고 난 뒤 엄마의 목적은 여전히 처음 시작했을 때와 다르지 않잖아요. 성인 아들을 이해하려는 거요. 하지만 제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졌어요. 저는 엄마가 왜 저랑 이 편지들을 쓰려 하는지 천천히 조금씩 알게 됐고, 얼마쯤 지나고 나니 저 자신이 실은 아주 즐기고 있더라고요. 물론 절대 티는 안 냈지만요.
처음에는 그저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데 엄마가 ‘마이크’까지 쥐여줬으니 내친김에 제 생각을 크게 외쳐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시간이 얼마쯤 흐르고 나서야 문득 이 일이 더욱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차렸어요. 바로 제가 엄마와 연결돼 있다는 거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엄마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아갈 ‘소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 한데 그것을 제가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3년 전,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아마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저냥 살아가면서 날마다 어정쩡한 안부만 반복해서 물었겠죠. 밥 먹었니? 예. 숙제했니? 예. 동생이랑 안 싸웠지? 예. 용돈은 부족하지 않지? 음……
3년은 정말 짧지 않아요. 되돌아보니 저 역시 엄마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이 편지들이 독자를 위한 글이지만, 실은 엄마와 저의 가장 사적이고, 가장 친밀하고, 가장 진실한 손의 흔적이었어요. 그것으로 3년 동안 우리의 삶을 기록하고 새겼죠.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영원히 잊힐 수 없는 한 시절이 되었고요.
그래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은요, 엄마 감사해요. 저에게 이 ‘소임’을 주셔서 고마워요. 책을 낸 것 말고요. 엄마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아갈 ‘소임’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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