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7월 14일
200년 전 오늘 프랑스 시민군은 드디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다. 국왕이 외국의 용병을 끌어들여 국민의회를 해산하려고 획책하자 시위대로서는 무장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우선 상이군인 병영의 무기고를 털어 총은 손에 넣었으나 화약이 없어, 파리 외곽의 옛 요새인 바스티유 성을 탄약 보급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물론 시작은 '말'로 했다. 처음에는 일이 잘 풀려나가 수비대 사령관은 성안으로 들어온 협상 대표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또 성루에 배치된 대포의 위치를 바꾸어 달라는 그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선의와는 달리 스스로 예비한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갔다. 성 밖에서 기다리던 시민군들은 오히려 수비대가 대표들을 억류한 채 그들에게 발사하기 위해 대포를 이동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또 몇 가지 오해가 더 보태져 마침내 총알을 나르고 대포가 불을 뿜는 사태가 벌어졌다. 평소에 신의를 잃은 정부는 항상 이런 비극을 부르게 마련이다. 결국 1명의 수비대원과 98명의 시위대원을 희생시켰던 그 바스티유 감옥에는 7명의 잡범-그중 2명은 스스로를 예수와 카이저라 일컫는 정신이상자였고 다른 1명은 근친상간범이었다-만이 갇혀 있을 뿐이었지만, 그 함락은 그대로 절대왕정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베르사유에 피신해 있던 루이 16세는 리앵rien-영어로 하자면 nothing쯤 된다-이란 단 한 단어로 그의 일기를 끝내고 말았지만, 현대의 사가 미셸 위녹Michel Winock은 "그 일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그것으로) 파리는 혁명을 구해냈기 때문이다"라고 자랑스럽게 평가했다.
파리의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연초에 '혁명이 다시 일어난다면'이란 주제의 여론조사를 통해 1789년의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이 무엇인지를 물은 적이 있다. 그 1위는 단연 바스티유 점령이었고, 2위는 '8월 4일의 밤'이 차지했다. 이제 그 밤의 얘기를 하기로 하자. 혁명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승세를 잡아나갔지만, 혁명의 성과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꼭같이 제3신분에 속했던 부르주아지가 혁명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무거운 짐을 지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과중한 노동이 문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오래 쉬게 하면 못쓰게 될 우려가 있는 노새"와 같은 농민들은-이 말을 한 작자는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이다-즉시 그 '자유와 평등과 우애'의 잔치에 참여할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분노한 농민들에 의해 영주의 장원이 파괴되고 토지 문서가 불살라지는 혼란이 따랐고, 이어 용병과 건달을 불러모아 농민들을 습격하려고 한다는 이른바 '귀족의 음모' 소식은 마침내 피를 부르고야 말았다.
고통은 도시의 민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사학자 라브루스Ernest Labrousse의 추산에 따르면 1788년 7월에는 네 식구가 하루 동안 소비하는 4파운드짜리 빵 한 덩어리가 9수였으나 1년 뒤 혁명 전야에는 3프랑(60수)으로 뛰어올랐는데, 여하튼 하루의 품삯이 하루의 빵 값으로 전부 지출되어야 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체제 존속의 기능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뜩이나 모자라는 곡물에 갑자기 자유 거래를 허용하고 거기다가 수출까지 장려했던 그야말로 멍청한 국가 시책의 소산이었다. 말하자면 정부가 곡물 투기꾼들에게 멍석을 펴준 셈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는 "빵을 구하기 위해 떠났으나 결국은 살인과 방화로 끝내고 말았다"는 텐Hippolyte Taine의 탄식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뒷날 사가들의 논쟁거리로 등장하지만, 여하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혁명의 주역을 일단 부르주아지에게 돌리면서도(마티에Albert Mathiez), 거기에 농민의 역할(르페브르George Lefébvre)과 '상 퀼로트'-어원상으로는 부자들이 걸치던 '반바지조차 못 입는 녀석'이란 뜻이다-라고 불리던 민중의 기여(소불Albert Soboul)를 추가하려는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이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차를 타고 한식경을 달려도 끝이 안 나오는 그 광활한 들녘과 산야가 예전 한 귀족의 사냥터였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그 가혹한 수탈과 그리고 그 수탈이 자초했을 처절한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툼의 내용에 '원한'이 개입하면 이미 말은 별로 소용없게 되어버린다. 포악한 국왕 하나를 교수대에 매달고도 여전히 가슴 아파하는 영국의 혁명과 피를 도랑물처럼 쏟고 나서야 피차 계산을 끝내는 프랑스의 혁명이 각기 간직한 그 운명적인 차이의 한 가닥을 나는 여기에서 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굳이 '명예'혁명일 필요가 없이 그저 혁명la Revolution이면 되는 것이다.
여하튼 혁명이 더 이상-혹은 그들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한 부르주아지는 어제까지 한편이던 농민과 도시의 민중을 '반혁명'으로 몰아 진압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요구를 기정사실로 수락할 것인지를 놓고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국왕의 상비군 뿐이었는데, '반도'들을 토벌 하러 나간 군대가 오히려 총부리를 돌려대는 날에는 만사가 허사가 되 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얻어놓은 것이라도 우선 지키고 보자는 영리한 계산이 국민의회로 하여금 이제까지 귀족이 향유하던 모든 '특권'privilege의 포기를 선언하게 만들었다. 그 다짐 속에는 조세의 공평이나 부역의 철폐에서부터 "환락에 지친 귀족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밤새껏 연못에 돌을 던져 개구리를 쫓아야 했던" 가신들의 고달픈 노역의 폐지까지 들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구제도'의 철폐일 뿐이지 수탈 계급의 철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선언은 이 역사의 기회에 참여했던 한 대의원이 눈물에 젖어 외친 대로 "결코 어느 민족도 이런 장엄한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위대하고 찬란한 밤이여! 우리 모두 함께 울고 서로 껴안았다. 이 얼마나 멋진 나라인가! 프랑스인이란 사실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얼마나 큰 명예인가"라는 벅찬 감격으로 받아들여졌다. 1789년 8월 4일 밤, 1,000여 년을 버텨오던 프랑스의 봉건제도는 이와 같이 무너졌다.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그렇게 '귀족의 특권'이 끝나고 이제 새로 '부르주아지의 특권'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은 우선 '정치적'이지만 그 정치적 행동을 이끌어낸 배후에는 반드시 경제적 요인이 잠재해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혁명은 본래 '경제적'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혁명의 원인에 대한 평가는 또한 바로 이 점에서 여럿으로 갈라진다. 미슐레Jules Michelet와 텐을 잇는 일련의 해석에서는 구제도 아래서 농민층이 겪은 극심한 '빈곤'이 혁명을 유발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에 반해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과 조레스Jean Jaurès 쪽의 생각으로는 이미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번영'의 결실을 제도적으로 독점하려는 부르주아지의 투쟁이 곧 혁명으로 전화된 것이다. 이 '빈곤이냐 번영이냐'의 논쟁에 대한 제3의 입장으로서는 마티에, 르페브르, 소불로 이어지는 다소 좌파적 성향의 시각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특히 '번영 속의 빈곤' 내지는 '빈곤 위의 번영'을 혁명의 주요 동기로 강조한다. 그렇다. 사회의 한 부분이 온통 번영을 구가하는데, 다른 한 부분은 거기서 제외되거나 그에 의해 희생되어야 한 다면, 기껏해야 결핍에 불과하던 이제까지의 빈곤이 이후로는 굴욕으로-이어 굴욕의 폭발로-돌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이와 같이 빈곤만도 번영만도 아닌, 빈곤과 번영이 같이 하는 자리를 발판으로 삼는 법이다. 실로 이 맥락에서 나는 "혁명에는 정규군이 없다"라는 라브루스의 주장에 동의하며, 이것이야말로 프랑스혁명 200주년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여론조사는 프랑스혁명이 지금 다시 일어난다면 어느 정당의 지지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하겠느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이 아주 흥미롭다. 공산당 선거인의 79퍼센트가 그리고 사회당 선 거인의 57퍼센트가 적극 가담을 표명한 데 반하여, 어떤 의미로는 그 혁명 유산의 가장 큰 수혜 세력이었을 두 보수정당 프랑스 민주연합UDF과 공화국연맹RPR은 그 비율이 각각 37퍼센트와 39퍼센트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혁명 이후 200년이 지난 프랑스 사회의 한 모습이다. 어허 고얀지고!
(1989년 7월 14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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