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의 개들
봄날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던 그 일요일, 나의 책 신촌의 개들이 집으로 배달되어 온 그다음날, 바흐의 첼로 선율로 온종일 내 오랜 우울을 재고 있던 나는 결국 집을 나섰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신촌에 있는 카페 개들을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이 있다는 옛 농담을 생각하며 버스에서 내린 나는, 이 시시한 이분법을 아는 자들이 한때는 또다른 이분법, 즉 옛날처럼 변함없이 개들을 찾는 자들과 오래전에 이미 발길을 끊은 자들을 구성했으나 이제 전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이어서 생각했다. 세월은 흐르고, 모였던 것들은 흩어지며, 세워진 것들은 무너지고, 아름답게 담아낸 모든 음식들의 마지막 흔적은 똥이다. 삼십 년 넘게 한자리를 지킨 개들은 그 세월만으로도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파멸의 길에 들어서 있었는데, 이 낡고 병든 카페는 오래전에 청년기를 졸업한 올드팬들이 떨어져나가면서 맹렬한 속도로 몰락해갔으며, 그 붕괴의 풍경에 어울리게 우리가 개 주인이라고 부른 카페지기 또한 끔찍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개 주인은 원래 남달리 맑고 뽀얀 얼굴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 맑은 나라에 누리끼리한 불청객들이 자리를 잡는다 싶더니, 그 역겨운 것들은 흘러가는 나날과 더불어 점점 더 검은색으로 변해갔으며, 그 추한 꼴을 본 최후의 극소수 옛친구들마저 “어휴, 정말 개 같네!” 하면서 발길을 끊고 말았다. 인간은 죽어가기 시작한 다른 인간을 혐오하며 멀리하게 되어 있다고, 나는 텅 빈 카페에서 힘든 듯 주저하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바흐의 첼로 선율을 따라가면서 생각하곤 했다. 자연의 잔인한 작별 의식이 시작된 것이었다. 모든 생명체의 마지막 추악한 무대가 열린 것이었다. 그것은 만인이 웃으며 들여다보는, 탄생의 밝고 따뜻한 무대와는 정반대의 무대였다. 모든 존재는 아름답게 만개한 대가로 구역질나는 추악함을 마지막 무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진리를, 마땅히 그렇게 한 다음에 가차없이 퇴장당해야 한다는 진리를, 그가 어떤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위대한 이상을 품었다가 이제 파멸에 이르렀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진리를, 그것이 바로 자연이라는 진리를, 살아 있는 시체로 변신중인 우리의 개 주인이 웅변하고 있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그처럼 무자비한 무대의 막이 열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는 양 개들을 지켰으며, 어쩌다 카페를 찾은 올드팬들은 그 살아 있는 시체의 시커먼 얼굴을 보고는 진저리를 치며 서둘러 달아났다. “도대체 왜 병원에 가지 않는 거야?” 어느 날 애통한 마음에 내가 억지를 부리자 개 주인은 나른하게 웃으며 너무나 명백한 진단을 내놓았다. “친구, 내 병은 병원이 구원해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내 몸은 주인에게 배신당하고 괴사중인 청춘인데 병원에 간다고 청춘이 소생할 리 없잖아. 하지만 청춘은 죽어도 청춘이니 내 손으로 이곳의 문을 닫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는 자신을 찾는 옛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끝까지 문을 열고 있겠다고, 아무리 기다려도 단 한 사람도 찾지 않을 때까지 문을 열고 있겠다고, 영원히 아무도 오지 않는 기다림의 막장에 도달할 때까지 문을 열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신촌 내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카페 개들을 향해 한 발 한 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일요일의 불 꺼진 골목들은 간밤의 악몽을 회상하는 얼빠진 늙은 창녀처럼 추해 보였고, 초등학교 담장을 떠받치고 있는 긴 축대는 까마득한 옛날에 버려진 이름도 없는 성벽처럼 무상했다. 나는 개발의 손길에서 밀려나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으며, 어두운 허공에서 희미한 불빛을 퍼뜨리고 있는 낡디낡은 간판을 보았다. 벽에다 직각으로 박은 쇠막대기에 매달린 그 직육면체 나무상자가 느릿느릿 다가가고 있는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그것은 먹으로 창호지에 쓴 개들이었고, 먼지 낀 유리 너머에 있는 개들이었으며, 그 안쪽의 백열전구가 비춰주는 개들이었고, 처음엔 개들이 아니라 새들로 잘못 읽었던 개들이었으며, 그다음엔 카페에 모여 있는 우리들이 아니라 카페 바깥에 있는 자들이 개들일 거라고 한참 잘못 생각했던 개들이었다. 우리는 참으로 뜨거웠으나 참으로 무지했다. 그런 우리는 개들에서 각자의 고독을 달랬고, 위안을 받았고, 자기를 알았고, 인간을 이해했으며, 죽지 않고 그 시절을 통과해갔다. 하지만 그때의 청춘들은 다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개들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찾지 않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기피했다. 어느 가을날 개 주인은 맥주를 마시러 들른 나에게 고자질하듯이 말했다. “그 친구들, 이젠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나봐. 신촌에 오면 갈 데가 없어서 쓸쓸해하고 분개하고 그런다면서?” “그런가?” “왜 그 친구들은 옛날 그 자리에서 조금도 변함없이 문을 열고 있는 나를 찾지 않는 거지?” 나는 대답이 마련되어 있었다. “청춘이 중년을 생각하지 않듯이 중년은 결국 청춘을 버리게 되어 있어.”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이 십대와 이십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미성숙 취향의 한국사회를 성토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대학가는 이제 유흥가의 다른 이름이야. 그런데도 유흥을 제대로 알고 주머니 사정도 되는 중년이 찾아갈 만한 공간은 잔인할 정도로 없어.” 내가 아는 어떤 노학자 한 분은 젊은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는데, 여든이 넘어서 다시 찾아가보니 캠퍼스도 그 주변도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고 나에게 자랑했다. “음식이 통 입에 맞지 않았어. 그나마 유일하게 먹을 만한 게 캠퍼스 앞의 조그마한 카페에서 파는 통닭이었지. 장작불에 구운 놈이었는데 소금에 절였는지 좀 짜긴 했지만 괜찮더라고.” 그는 헤벌쭉 웃고 나서 이었다. “하, 그 기특한 시부랄 놈들. 그 카페가 그대로 있는 거야. 페치카 앞의 개들. 이게 그 카페 이름인데, 이 고색창연한 카페는 물론이고 내가 먹던 그 통닭 메뉴에다 내가 항상 앉았던, 입구에서 세 번째 창가 자리까지 다 그대로 있더라고.” 그러나 한강의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 서울의 신촌에서 세월은 똥과 동의어이다. 여기서는 그 어떤 고집 센 사물이라고 한들 자기 개성을 잃고 똥처럼 균질하게 퇴락하는 데 채 십 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바로 그 거대한 똥의 세계에서, 날마다 모든 것들이 몰개성의 균질한 똥이 되어 가는 매정한 망각의 세계에서, 옛날의 그 생생하고 유일무이한 시간들을 지켜주기 위하여 카페 개들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가을 내내 틈만 나면 개들을 찾았다. 나는 술을 마시고 싶으면 가급적 개들로 갔다. 나는 개들로 가서 내 청춘을 만났다. 개 주인은 내가 나타나면 언제나 얘기를 해달라고 했으며, 때로는 또 무슨 얘기가 더 남아 있어서 왔느냐며 웃었는데, 그러면 시커먼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서 구역질을 불러일으켰다. 나에게 그는 언제나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 즉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의 온갖 종류의 얘기를 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경멸하고 혐오하는 인간들의 얘기도 다 잘 들어주었다. 개들이 상대를 가리면서 관계를 갖지 않듯이, 그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청하기만 하면 언제나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는 카페 개들을 찾는 이들의 청춘 그 자체였다. 내가 얘기를 할 때마다 개 주인의 얼굴은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 같아졌으며, 내가 무슨 얘기를 하건 어떤 섬세한 선율을 따라가듯 추악한 시커먼 얼굴을 나에게 고정시킨 채 귀를 기울였다. 그가 원하면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원하면 나는 무슨 얘기건 들려주었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바흐를 틀어놓고, 웃음이 터지는 일상 잡사로부터 욕지거리가 나오는 일상 잡사까지, 내가 나의 책 신촌의 개들에 채굴해놓은 웃음이 터지는 기억들로부터 욕지거리가 나오는 기억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정성을 다하여 내가 아직도 청춘의 그 아이인 양, 개 주인이 아직도 그때의 그 사람인 양 쉬지 않고 조잘대며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즐겁지 않았다. 추악하게 퇴락한 개 주인이 듣고 싶어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가 하고 싶어서 늘어놓았던 그 시절, 말을 했다기보다는 내 속에서 말이 터져나왔다고 해야 할 그때처럼은 결코 즐겁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잘 들어준다는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위안이 되는 법인데, 나는 바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갖은 굴욕을 견뎌낸 끝에 당당히 대학생이 되어 이제 처음으로 나 자신의 말을 하려고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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