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책 × 사람 = ∞(무한대)의 세계’
지하실에서 탄생한
사설 아카데미 아크도시주쿠
일본에서 ‘동네도서관’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어떤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하고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을까? 맨 처음 계기가 되었던 시점을 떠올려보면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니 그 역사가 절대 만만치 않은 셈이다. 그 무렵 나는 일본 최대 부동산 회사인 모리 빌딩주식회사의 롯폰기 재개발사업 현장에서 지역 주민과 협상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녹록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때까지 진행 중이던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교육 사업을 새롭게 맡으라는 사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재개발사업은 일단 시작하면 10년, 혹은 15년 동안 같은 업무를 담당할 정도로 상당히 호흡이 긴 작업이다. 그런 터라 업무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그 일에서 손을 떼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솔직히 새로운 업무에 대해 기대하고 말고 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경황이 없었고 약간 혼란스러웠다.
모리 빌딩주식회사의 창립자인 모리 다이키치로 사장은 대학교수를 지낸 분으로, 54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회사를 창립하여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규모로 키워냈다. 그는 교육자로 오랫동안 강단에 섰기 때문에 인재양성에 특히 대단한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런 터라 모리 빌딩주식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은 누구나 예외 없이 1년간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사장의 강의가 있을 때는 전 직원이 감상문을 써서 제출해야 했다.
아무튼, 나는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사장의 선택을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도 사장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보다는 과연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고 겁부터 났다. 게다가 발령 날짜가 한 달 뒤였는데도 “내일부터 당장 일을 시작하라”는 지시를 받고 혼자 외롭게 업무 파악에 들어갔다.
사장이 구상한 교육 사업은 완공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복합시설 아크힐스의 지하실을 이용하여 독특한 콘셉트의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도쿄대학의 이토 시게루 교수(현재 같은 대학 명예교수이자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를 비롯해 같은 대학의 이시이 다케모치 교수(현재 도쿄대학 명예교수)와 지금은 고인이 된 문화복장학원의 고이케 치에 원장, 나고야대학의 쓰기오 요시오 조교수(현재 도쿄대학 명예교수)를 초청해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공부 모임을 가졌다. 어떤 형태의 학교를 만들어야 할지 전문가의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모임의 운영 업무를 맡았다.
문과·이과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배움터를 만들자는 것이 모임의 주요 주제였다. 일본의 고등교육은 메이지 시대(1868∼1912) 이후 전문 분야로 나뉘어 체계화되었는데, 1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도시 문제의 경우 일본에서는 도시공학으로 정하고 기술공학 일부로 가르치기 때문에 도시 조성은 지극히 획일적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일본과 달리 기술뿐 아니라 디자인, 감성, 역사, 인간학 등 종합적인 능력을 중시한다. 모임 참석자들은 당시 주목받기 시작하던 컴퓨터 과학과 통신기술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며 디자인, 패션, 예술을 중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모리 사장은 ‘도시대학’을 신설해 문과·이과를 뛰어넘는 새로운 융합형 인재를 양성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학 설치 기준이 워낙 까다로워서 허가를 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회인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이시이 다케모치 교수의 제안으로 사회인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된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당시 그는 임시교육심의회에서 평생교육 담당인 제2 부장을 맡고 있었다. 먼저, 시험 삼아 ‘실험적 아크주쿠’를 개최해 1987년 10월부터 반 년간 약 20평(66. 1㎡) 남짓한 공간에서 7회 연속 강좌를 개설했다. 모리 사장은 그 결과를 보고, 200명 정원으로 수업 기간 반년에 수업료 300만 원인 야간제 사설 아카데미를 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1988년 9월, 아크힐스 지하 4층에 120평(396. 7㎡) 규모의 강의실을 준비해 아크도시주쿠가 문을 열었다.
모임에 참가한 교수들도 각자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반년 정도 강좌를 진행했다. 기업의 문화예술지원 활동 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교육사업에 대한 모리 사장의 의지와 열정에 적잖이 놀랐다. 그는 직접 아크도시주크를 이끌어나갔고, 동시에 모든 강의를 경청하는 열성 학생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시련과 예기치 않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아크도시주크가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하고 발전해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모리 사장의 굳은 의지와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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