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다윗은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을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
고대 팔레스타인의 중심부는 세펠라Shephelah라 알려진 지역으로, 유대 산맥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계곡들이 동쪽에서 뻗어 나와 넓고 광활한 지중해 연안의 평야까지 닿는 곳이다. 포도밭과 밀밭, 플라타너스와 테레빈 나무숲들의 고향으로,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또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수 세기에 걸쳐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지중해 연안의 평야로부터 솟아오른 계곡들이 해안 지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고원에 위치한 헤브론, 베들레헴, 그리고 예루살렘과 같은 도시로 진군할 수 있는 확실한 경로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계곡은 북쪽의 아얄론Aijalon이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은 엘라Elah다. 엘라는 12세기에 이집트의 살라딘 왕이 십자군 기사단에 맞서 대결을 벌였던 곳이다. 그보다 1,0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카베오Maccabean 전쟁에서 시리아와 함께 중심지 구실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약성서 시절 이제 막 발돋움을 시작한 이스라엘 왕국이 블레셋Philistine 군대에 맞서 이곳에서 일전을 벌였던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블레셋 사람들은 크레타 섬 출신이었는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서 해안에 정착한 해양 민족이었다.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 왕의 영도 속에 산악 지대에서 무리를 지어 살았다. 기원전 11세기 후반에 블레셋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엘라 계곡의 아래쪽에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의 목표는 베들레헴 근처 능선을 확보해 사울의 이스라엘 왕국을 둘로 갈라놓는 것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풍부한 전투 경험을 지닌 위험한 종족으로 이스라엘과는 철천지원수였다. 위험을 감지한 사울은 신하들을 모아 서둘러 산에서 내려와 블레셋인들과 맞섰다.
블레셋 군대는 엘라의 남쪽 능선을 따라 진지를 구축했고, 이스라엘 군대는 북쪽 능선을 따라 반대편에 진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두 진영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형세가 됐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섣불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격을 하려면 언덕 아래로 내려가 적군이 진을 친 반대편 능선까지 기어 올라가야 했는데, 이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디어 블레셋인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들은 교착 상태를 일대일 대결로 풀기 위해 가장 뛰어난 전사를 계곡 아래로 내려보냈던 것이다.
청동 투구를 쓰고 전신 갑옷을 두른 그는 키가 210센티미터나 되는 거인이었다. 그는 던지는 창과 찌르는 창, 그리고 칼을 차고 있었다. 또 그의 앞에는 보조병 한 명이 커다란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거인은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해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 나를 쓰러뜨리면 우리가 너희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쓰러뜨리면 너희가 우리의 노예가 되어 우리를 섬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진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누가 그런 무시무시한 상대와 맞서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때 전쟁에 참여한 형제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온 양치기 소년이 자원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사울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넌 저 블레셋 사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너는 아직 어린 사내아이일 뿐이지만 저 사람은 어려서부터 전쟁에 참여한 백전의 용사이지 않느냐!” 그러나 양치기 소년은 단호했다. 자신은 그보다 더 흉악한 상대와도 겨뤄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 무리에서 양 한 마리를 물어 가면, 제가 쫓아가 그것들을 쓰러뜨리고 그 수중에서 양을 구해내었나이다.” 사울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그는 대결을 허락했고, 이 양치기 소년은 계곡에 서 있는 거인을 향해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거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상대를 보자 이렇게 외쳤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점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거인의 이름은 골리앗이었고, 양치기 소년의 이름은 다윗이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승리
『다윗과 골리앗』은 보통사람들이 거인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책이다. 여기에서 ‘거인’이란 군대와 힘센 전사에서부터 장애, 불운, 그리고 압제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강력한 적을 뜻한다. 이 책의 각 장은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평범하든 비범하든,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이에 대응해야 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규칙에 따라 싸워야 할까, 내 직감을 따라야 할까? 굴하지 않고 싸워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당한 만큼 반격해야 할까, 용서해야 할까?’
이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탐구해보려 한다. 첫째,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이런 식의 일방적 우위를 점한 충돌 속에서 나온다는 생각이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맞서는 행동이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항상 이런 종류의 충돌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충돌을 잘못 읽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거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거인에게 힘을 주는 원천인 것처럼 보이는 요소는 종종 커다란 약점을 낳는 원천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이 약자underdog라는 사실은 때때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 약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문을 열어 기회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가르치고 일깨우며,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거인을 마주하기 위한 더 나은 지침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3,000년 전 엘라의 계곡에서 마주한 다윗과 골리앗의 역사적 대결보다 이러한 여정을 시작하기에 더 좋은 사건은 없을 것이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외쳤을 때, 그는 ‘일대일 결투’를 요구했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대결을 벌이는 양측은 전면전으로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각 진영을 대표하는 전사 한 명씩을 뽑아 결투를 벌이게 했다. 예를 들면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퀸투스 클라우디우스 콰드리가리우스Quintus Claudius Quadrigarius가 남긴 역사적 전쟁에 관한 기록에는 갈리아인 전사가 로마 적군을 조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즉각 상류층 집안의 자제였던 티투스 만리우스Titus Manlius라는 젊은이의 분노를 폭발시켰다”고 콰드리가리우스는 썼다. 티투스는 다음과 같이 갈리아 전사와 결투를 벌였다.
그는 앞으로 나섰고, 로마인의 용기가 갈리아인에게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랐다. 로마 군단의 방패와 스페인 검으로 무장한 그는 갈리아 전사와 마주했다. 결투는 아니오Anio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벌어졌는데, 양측 군사들이 엄청난 불안 속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갈리아 전사는 몸에 익힌 전투 방법에 따라 방패를 앞세우고 공격을 기다렸다. 전투 기술보다는 용기에 의존했던 만리우스는 자신의 방패로 상대의 방패를 들이받아 갈리아 전사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갈리아 전사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려 하자, 만리우스는 다시 방패로 방패를 들이받아서 상대방이 위치를 바꾸게 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갈리아 전사의 칼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 가슴에 스페인 검을 꽂았다. …… 갈리아 전사를 죽인 뒤, 만리우스는 그의 목을 베고 혀를 잘라내 피로 범벅이 된 채로 자신의 목에 둘렀다.
골리앗이 예상한 결투도 이런 방식이었다. 자신과 같은 전사가 백병전으로 맞붙으러 나설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어떤 방식의 결투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며, 그런 생각에 맞춰 결투를 준비했다. 그는 몸에 가해질 일격에 대비해 청동 비늘 수백 개를 중첩시켜 만든 정교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 갑옷은 골리앗의 팔을 덮고 무릎에 닿을 정도였으니 그 무게가 45킬로그램은 족히 넘게 나갔을 것이다. 그는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청동으로 된 무릎 보호대를 차고 두 발을 청동 판금으로 둘렀으며, 무거운 금속 투구도 쓰고 있었다. 또 그는 근접 전투에 최적화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전체를 청동으로 만들어 방패는 물론 갑옷까지 한번에 뚫을 수 있는 던지기 창과 옆구리에 찬 칼, 그리고 그가 주로 쓰는 무기인 ‘베틀의 도투마리처럼 굵은’ 금속 손잡이가 달린 특별한 종류의 짧은 찌르기 창이 그것이었다. 그중 찌르기 창은 줄이 달려 있었고, 뛰어난 힘과 정확도로 상대를 찌를 수 있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역사학자 모셰 가르시엘Moshe Garsiel이 썼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저 무거운 손잡이에 길고 묵직한 강철 날이 달린 이 엄청난 창을 골리앗의 힘센 팔로 찌른다면, 청동 방패는 말할 것도 없고 청동 갑옷까지도 한꺼번에 뚫릴 것처럼 보였다”. 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앞으로 나선 이스라엘 사람이 없었는지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나타났다. 사울은 적어도 다윗이 싸워볼 기회라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칼과 갑옷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윗은 거부했다. “익숙하지 않으니 저는 이것을 입고 걷지 못하나이다.” 대신 그는 허리를 구부려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주워 어깨에 멘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양치기 지팡이를 들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골리앗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소년을 보고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노련한 전사와 결투를 벌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가 본 사람은 양치기였다. 모든 직업 중에 가장 천한 일을 하는 소년이 양치기 지팡이를 곤봉처럼 들고 골리앗의 칼과 맞서려는 것처럼 보였다. 골리앗은 그 지팡이를 가리키며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들을 들고 내게로 나아오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전설이 됐다. 다윗은 돌 하나를 가죽 투석 주머니에 넣고 무릿매질로 노출된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날렸다. 이에 골리앗은 그 돌에 맞아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는데, 다윗은 그에게 달려가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누구도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전투에서 한 나약한 소년이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그 이후로 수천 년 동안 이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전해 내려왔다.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표현은 불가능해 보이는 승리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우리의 언어 속에 고착되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건에 대한 이런 식의 설명이 거의 모두 틀렸다는 점이다.
중보병과 투석병의 룰
고대의 군대에는 세 종류의 전사가 있었다. 첫 번째 부류는 기병으로 말 또는 전차를 탄 무장 군인이었다. 두 번째 부류는 보병으로 갑옷을 입고 칼과 방패를 든 군인이었다. 세 번째 부류는 발사병으로 오늘날 개념으로는 포병에 해당하는데, 궁수와 가장 중요한 투석병이 여기에 속했다. 투석병은 긴 밧줄 양쪽 끝에 매어놓은 가죽 물매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물매 안에 돌 또는 납 구슬을 넣고, 이를 휘돌려서 점점 크고 빠른 원을 그렸다. 그리고 밧줄의 한쪽 끝을 놓으면 돌은 앞으로 날아갔다.
투석은 엄청난 기술과 연습을 필요로 했다. 숙련된 병사의 물매는 아주 치명적인 무기였다. 중세 시대의 그림을 보면 투석기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아일랜드의 투석병은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어떤 거리에 있는 동전이든 맞힐 수 있었다고 한다. 구약성서 「심판자들」편(구약성서의 일곱 번째 책-옮긴이)에서는 투석병의 정확도를 ‘머리카락 굵기’ 안이라고 묘사할 정도였다. 숙련된 투석병은 거의 200미터 거리에 있는 목표를 죽이거나 중상을 입힐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심지어 투석기 공격을 받은 가엾은 군인의 몸에서 돌을 제거할 목적으로 만든 집게 도구 세트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머리를 향해 강속구를 던질 메이저리그 투수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라. 투석병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느낌이다. 단지 차이라면 코르크와 가죽으로 만든 공이 아닌 단단한 돌덩이가 날아온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바루크 할펀Baruch Halpern은 투석이 고대 전쟁에서 세 종류의 병사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균형의 한 축을 이룰 만큼 중요했다고 주장한다. 마치 가위바위보와도 같다는 것이다. 보병은 긴 창과 갑옷으로 기병에 맞설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기병은 발사병을 무찌를 수 있었다. 말의 움직임이 빨라서 고대의 포병 부대가 목표를 제대로 조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사병은 보병에게 치명적이었는데, 무거운 갑옷 때문에 움직임이 느릿느릿할 수밖에 없는 보병은 약 100미터 거리에서 공격하는 투석병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인 공격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할펀은 이렇게 쓰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시칠리아 원정을 나간 아테네군이 패배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중보병이 주로 투석기로 무장한 현지의 경보병에게 어떻게 섬멸됐는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골리앗은 중보병이었다. 그는 갈리아 전사와 티투스 만리우스의 대결에서처럼 중보병과 결투를 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점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고 외쳤을 때, 주목할 구절은 ‘내게로 오라’다. 그의 말뜻은 근거리에서 맞붙어 싸울 수 있도록 바로 자기 앞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사울이 다윗에게 갑옷을 입히고 칼을 주려고 했을 때, 그 역시 비슷한 가정을 했던 것이다. 그는 다윗이 골리앗과 백병전으로 싸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윗은 일대일 결투의 관행을 존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사울에게 곰과 사자를 죽인 이야기를 한 이유는 단지 용맹함을 입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는 맹수와 싸우면서 터득한 방식 그대로 투석병으로서 골리앗과 싸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다. 갑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속도와 기동성이 있었다. 그는 물매에 돌을 장전하고 휙휙 돌렸다. 그는 골리앗의 신체에서 유일한 취약 지점인 이마를 노리고 초당 예닐곱 번 회전할 때까지 점점 더 빨리 물매를 돌렸다. 이스라엘 방위군의 탄도학 전문가인 에이탄 허시Eitan Hirsch는 최근 일련의 계산을 통해 전문 투석병이 35미터 거리에서 날린 보통 크기의 돌이 초속 34미터(시속 122.4킬로미터)로 골리앗의 머리를 맞힐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는 골리앗의 두개골을 관통해서 의식불명에 빠뜨리거나, 심지어 죽이고도 남을 만한 위력이었다. 대인 저지력stopping power(저항하는 사람에게 총탄을 쏘았을 때 저항자에게 가해지는 충격-옮긴이) 면에서 이는 중간 크기의 현대 권총과 맞먹는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1초가 조금 넘는 짧은 시간이면 물매를 휘둘러 골리앗을 맞힐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냈다. 사실상 정지 상태에 있던 골리앗이 자신을 방어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고 허시는 쓰고 있다.
골리앗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그는 45킬로그램이 넘는 갑옷을 입고 근접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서서 갑옷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찌르기 창으로 강력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전투 상황 말이다. 그런 골리앗이 다가오는 다윗을 본 순간, 처음에 느꼈던 경멸은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고 그다음에는 공포에 휩싸였다. 자신이 예상했던 결투의 양상이 갑자기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가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벨 것이다. …… 또 주님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은 자신의 전략이 골리앗의 그것과 얼마나 크게 다른지를 강조라도 하듯, 골리앗의 칼과 창에 대해 두 번이나 언급했다. 그러고는 양치기의 가방에서 돌을 꺼냈다. 그때 능선에서 결투를 지켜보던 양측 군사들은 다윗의 승리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윗은 투석병이었고, 투석병은 손쉽게 보병을 쓰러뜨렸다.
역사학자 로버트 도렌웬드Robert Dohrenwend는 “다윗과 맞선 골리앗이 가진 승산은 칼로 무장한 청동기시대의 전사가 45구경 자동 권총을 가진 적과 맞섰을 때와 마찬가지다”라고 쓰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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