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명의 말
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시작하련다. 잠시만 양해해주시길.
이 책의 제목은 ‘위험한 독서의 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걸작 수십 권을(그리고 댄 브라운의 책 두 권을) 읽으면서 보낸 1년간의 진실한 기록이다. 이 1년간의 성과를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로 인해 내 삶에 일어난 변화도. 내 삶은 정말로 크게 달라졌고, 그래서 굳이 수백 쪽에 걸쳐 그 얘기를 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독자가 펼치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이 애초부터 ‘위험한 독서의 해’였던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밀러의 이야기’가 적당해 보였다. 그러다가 잠깐 ‘나태를 벗어나’를 고려해보기도 했다. ‘서재의 인간’★도 괜찮은 듯했다. 그 밖에도 ‘종이호랑이 사냥’ ‘진짜 사나이는 책을 읽지 않는다’ ‘거듭난 비관주의자의 회고록’ ‘죽는 날까지 크로이던에서’ ‘해방된 섬유질Bast unbound’ 등도 후보 명단에 있었다. 5분 정도였지만 ‘아웃라이어Outliars’도 생각해보았다. 그다음에는 ‘거꾸로 2:재발견’, 이어 ‘뭘 그리 꼬나봐?’, 그러고 나선 ‘케빈에 대하여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도. 어느 날 유난히 힘들게 오전을 보낸 후, 나는 표제를 이렇게 수정했다. ‘씨팔, 때려치우자.’ 하지만 결국 애초의 생각으로 돌아가 ‘위험한 독서의 해’, 혹은 부연 설명까지 포함해 ‘위험한 독서의 해, 그리고 5년 후 내 삶은 어떻게 변했나’ 둘 중 하나로 가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 세상에는 앤디 밀러가 많고도 많다. 게다가 그중 몇몇은 작가다. 그래서 본명 대신 필명을 쓸까 생각도 했다. 명확히 밝혀두지만 이 책의 저자는 베스트셀러 소설가 앤드루 밀러가 아니다. 요빌 시詩문학상을 수상한 앤디 밀러도 아니다. 텔레비전 방송작가 앤디 밀러도 아니다. 스릴러 소설 《스노드롭》으로 2011년 맨 부커 상 후보에오른 A. D. 밀러도 아니다(알고 보니 그의 이름도 앤드루였다).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팀의 투수 앤드루 밀러도, 브릿팝 밴드 도지Dodge의 앤드루 밀러도, 엘즈미어포트 및 네스턴 선거구의 노동당 하원의원 앤드루 밀러도, 브루클린에 있는 갈림 무용단 창립자 앤드리아 밀러도 아니다. 페이스북에서 검색되는 수백 명의 앤디 밀러 중 한 사람도(특히 ‘활동과 관심사’로 “나한테 샌드위치를 만들어주는 여자”를 꼽은 앤디 밀러는 절대로) 아니다. 이 모든 앤디 밀러들은 각자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겠지만, 나하고는 다른 사람들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서 앤디 밀러라는 이름을 고수하기로 했다. 그것이 이 책을 쓴 사람의 본명이니까. 나는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37쪽을 참고하시라). 나의 또 다른 ‘활동과 관심사’는 앞으로 충분히 밝혀질 것이다.
반면 이 책의 부제로 말하면 (독자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처음부터 쭉 그대로였다 —어쨌든 간에 내용은 계속 똑같았다. ‘내 삶을 구한 걸작 50권(그리고 그저 그런 2권)’.
《위험한 독서의 해》의 근간이 되는 것은 50권의 도서 목록이다. 처음에는 여남은 권으로 끝내려 했지만, 적다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과잉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목록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소비하고 신속 단호하게 의견을 표명할 것을 요구받는 이 시대에는 이처럼 기본적인 정보 처리 방식이 좋아 보이기 마련이다. 최고와 최악 순위, 톱 100 리스트, 무수한 ‘죽기 전에 해야 할 무엇무엇 1001가지’ 등등. 이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첫 번째 부록을 넘겨봐도 좋다. 410쪽에 있는 ‘인생 개선 도서 목록’, 즉 1년간 내가 읽은 책들 말이다. 그러라고 집어넣은 거니까. 하지만 내 목록은 여타 목록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미리 작성한 처방전도, 순서대로 따라야 할 지시 사항 목록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서술할 내용의 우연한 부산물, 책벌레가 벗어놓은 허물에 가깝다고 할까.
《위험한 독서의 해》는, 제법 문학적이었던 내 인생 37년 동안 예외적으로 (앞으로 낱낱이 밝혀질 이유들로 인하여) 쭉 회피해왔던 책들 수십 권을 읽어보려는 진솔한 시도에서 비롯된 책이다. 목록을 죽 훑어보고 이런저런 작품이나 저자, 혹은 특정 종류의 작품이나 저자가 빠졌다며 놀랄 사람도 있겠지만, 그 경우 내가 이미 그 책들을 읽어봤거나 딱히 읽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고전이라 할 수 없는 특정 작품의 존재에 당황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딱히 이단적이거나 도발적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직관을 따르고 싶었을 뿐이다. 직관적으로, 솔직하게. 문득 《실버 서퍼》나 《길가메시 서사시》, 헨리 제임스나 줄리언 코프나 토니 모리슨의 작품이 읽고 싶어지면 나는 그렇게 했다. 의무 사항 같은 건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의 도서 목록은 결코 계획적인(혹은 대안적인) 고전 편람 같은 것이 아니다. 첫 번째 부록을 훑어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잠깐만, 업다이크나 울프나 트롤로프가 없다고? 마티나 콜이나 쥘 베른은? 나라면 세르반테스의 다른 소설을 골랐을 텐데……. 《율리시스》는 또 어떻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진주 귀고리 소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물론이고, 꼭 있어야 할 작가들도 빠진 이런 목록을 어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 그런 사람은 직접 자신만의 도서 목록을 만들어보기를 정중히 권한다. 당신이 앤디 밀러라고 불리며 이미 그런 목록을 작성한 누군가가 아닌 이상 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부정직함을 최대한 배제하려 애썼다. 우선 이 책에 쓴 내용을 실행했다. 그 내용을 한참 동안 숙고했다. 그런 다음에야 이 책을 써 내려갔다.
따라서 ‘인생 개선 도서 목록’은 강령보다는 일지이고, 안건이 아니라 장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다룬 책들을 전부 읽으라고 강권하는 게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독자의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 자기만의 잠정적인 도서 목록이 존재할 테니까. 내가 아니라 독자 스스로의 호기심, 열정, 혹은 죄책감에서 비롯한 책 제목들이.
《위험한 독서의 해》는 어떤 종류의 책인가? 이 책은 일종의 문학비평서이기에 어느 정도까지 저작권법과 공정 사용 조항을 준수한다. 한편으로 이 책은 회고록이자 고백록이다. 나는 여기서 다룬 책들을 다른 책들과의 관계에 기대어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으려고 했다. 책 한 권 한 권을 평범한 일상에, 점점 더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개인의 생활에 통합하려고(혹은 재통합하려고) 했다. 이 책은 주註, 이메일, 개인적 추억, 블로그 인용문, 요리법, 간략한 인물 소개, 과격한 견해와 농담을 포함하고 있다. 별로 권하고 싶진 않지만, 이 책을 독서모임 참고서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씩 야금야금 읽어가면서 뭔가 기묘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또한 비속어와 트위터 내용도 등장한다. 미리 양해를 구한다(비속어 말고 트위터에 대해).
1945년에 소설가 맬컴 라우리는 막 탈고한 작품 《화산 아래서》(‘인생 개선 도서 목록’ 35번)에 등장하는 기이한 표현들을 해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라우리는 답장으로 40쪽에 이르는 명문장을 써 보냈는데, 자신의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책은 그저 마음대로 건너뛰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 한 편일 수 있습니다. 혹은 건너뛰며 읽지 않는다면 더욱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교향곡이고, 어쩌면 일종의 오페라이며, 심지어 서커스일 수도 있습니다. 유행가이자 시이자 노래이며, 비극이자 희극이자 소극이고 그 밖의 온갖 것입니다. 취향에 따라 피상적이고 심오하며 유쾌하고 지루합니다. 예언이자 정치적 경고, 암호문이자 부조리한 영화, 담벼락에 갈겨쓴 글귀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기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낸바, 이 기계는 제대로 작동합니다. 날 믿어보십시오.
일종의 기계,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모든 책은 일종의 기계이며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이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려면 일단 읽어봐야 할 것이다.
무엇이 걸작을 만드는가? 책에 따라 다르고, 그것을 작동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내 생각에 《화산 아래서》는 걸작이다. 왜냐면 첫째, 내가 그 책을 좋아하고 둘째, 전문 비평가 집단도 나와 의견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작의 의미란 사람마다 다르고 또 책마다 다를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독자에게 ‘걸작’이란 눈부신 문화적 탁월함을 의미할 수 있다. “톨스토이나 플로베르는 ‘걸출한’ 작가지.” 또 다른 독자에게 ‘걸작’이라는 말은 쾌감의 표현이다. “데이비드 니콜스의 《원 데이》는 대단한 걸작이야!” 우리가 말하는 ‘걸작’은 흔히 서구 문학 정전에 속하는 책, 즉 고전1을 의미한다. 이런 유의 ‘걸작’들은 중요하긴 하지만 종종 이해하기 힘들고 별 재미도 없다. 그중 일부, 《화산 아래서》나 《율리시스》 같은 책은 다른 ‘걸작’들을 참고해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일종의 문학적 마조히즘으로 여겨지며 거부감을 준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예술적 천재성의 척도가 된다. 어느 쪽이든 간에, 걸작이 반드시 잘 읽히는 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건 분명하다. 어떤 책들은 대중에게 전적으로 환영받음으로써 걸작이 된다. 어떤 책들은 대중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런 무관심 때문에) 비평가 집단에게 걸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위험한 독서의 해》에는 이 모든 종류의 책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 나오는 작품 하나하나는 어떤 면에서든 ‘걸작’으로 간주될 수 있다. 처음부터 걸작이었거나, 이후에 사람들이 걸작으로 평가했거나 걸작이라고 추켜세웠거나, 오프라 윈프리가 걸작이라고 선언했거나, 《테이크 어 브레이크》나 《리터러리 리뷰》 같은 잡지에서 시행한 ‘역사상 최고의 걸작’ 설문조사에서 33위를 차지했거나. 50권의 걸작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두 권의 그저 그런 책도 마찬가지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최근에 BBC TV에서 <책으로 본 내 인생My life in Books>의 첫 시즌이 방영되었다. 유명 인사들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책 다섯 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화가 방영된 날 나는 어느 중고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러다 우연히 그 프로그램의 제목을 뒤집어놓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내 인생의 책들The Books in My Life》. 물론 순전한 우연이었다. 《내 인생의 책들》은 50년 전에 출간되었고 나는 한 번도 그 책 제목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책으로 본 내 인생>의 제작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내 인생의 책들》은 《위험한 독서의 해》와 많은 점에서 뚜렷하게 비슷했다. 이 책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책들》의 저자는 어릴 때 읽었던 이야기들, 소설이 자신의 상상력에 미친 영향, 개인적 취향의 수수께끼, ‘걸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다. 편지와 일기 인용문들을 본문에 끼워 넣기도 한다. 저자가 좋아하는 책들의 제목이 정리된 부록도 딸려 있다. 심지어 풍자적이지만 완전히 농담조로 읽히진 않는 ‘화장실에서 독서하기’라는 장도 있다. 게다가 이쯤 되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그 책의 저자도 성이 밀러였다. 나는 살짝 겁에 질려 그 책을 구입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의 이름은 앤디가 아니었다.
《내 인생의 책들》은 헨리 밀러의 저서다. 《북회귀선》을 비롯해 에로틱한 실화 소설들을 쓴 작가 말이다. 첫 번째 장에서 그는 평생 자기 곁에 있어왔던 작가와 작품들을 간단한 한마디로 압축한다. “그들은 살아나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걸작’이란 무엇인지를 나로서는 이보다 더 잘 정의할 수 없으며, 따라서 나의 선배이자 같은 성을 지닌 이 작가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의 문구를 빌려오겠다. 이 문구는 ‘위험한 독서의 한 해’ 동안 내가 찾아다녔던 책의 본질을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내가 매일의 삶이라는 시련에 대처해나가는 동안, 출퇴근하고 사무실에서 일하고 초보 아빠가 되고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살아나 내게 말을 걸어오는 책. 따라서 《위험한 독서의 해》는 걸작들에 대한 책이자, 걸작들을 읽고 그것들에 대해 쓰는 동안 인생이 내게 어떻게 딴지를 걸어왔는지를 밝히는 책이라고 하겠다. 이책이 걸작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기계에 발동이 걸릴지, 이 기계가 살아나 독자에게 말을 걸어올 것인지에 달려 있으리라.
21세기의 첫 10년은 표면적으로 보기엔 애서가가 되기에 좋은 시기 같았다. 친구나 텔레비전의 독서 프로그램을 통해서 신간 도서 정보를 얻는다. 온라인 서점의 구매자 서평이 문득 눈길을 끌기도 한다.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도 책을 사고 자동차나 체육관에서도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다. 와인 한 잔을 놓고 친구들끼리 혹은 독서모임 사람들하고 책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책을 읽고 느낌이 어땠는가? 책 내용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가? 그러고 나면 해당 책의 저자가 매진 감사 이벤트나 문학 페스티벌에서 책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도 있다. 당신은 손을 들고 질문을 한다.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게다가 기술적인 방법만 안다면 위의 모든 과정을 가상현실을 통해 경험할 수도 있다. 전자책이나 태블릿 화면으로 작품을 읽고 나의 의견을 인터넷으로 공유한다. 기차 안에서 혹은 산꼭대기에서도 책에 대해 트위터와 블로그에 적는다. 단순히 종이와 풀 뭉치였던 책 한 권이, 그 내용에 기반한 온갖 상호 경험의 세계를 열어주는 만능열쇠가 된다. 그런 경험의 대부분은 다른 독자들의 열띤 참여를 수반한다. 이에 비교하면 전통적인 독서 방법, 혼자 앉아 긴 글을 쭉 따라 읽으며 책장을 끝까지 넘겨가는 방식은 확실히 답답하고 구시대적으로 보인다.
짧게 말하자면, 이 시대엔 ‘좋은 책과 함께라면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희망적인 약속이라기보다 참여를 강요하는 위협에 가깝게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독서 경험이 흥분된 토론, 드라이 화이트 와인, 사인회에 길게 늘어선 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혁신들이 특정한 부류의 독자들을 사로잡는 한편, 도서관과 작은 서점들은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고 있다. 1980년대에 카페와 팔걸이의자를 갖춘 거대 서점 체인이 등장한 이후로 줄곧, 지역 독립 서점들은 그들과 맞서 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서점 체인 쪽이 슈퍼마켓과 인터넷이라는 양대 세력에 의해 시장에서 밀려나는 중이다. 슈퍼마켓은 베스트셀러들을 파격 할인가로 제공하여 출판사들의 중요한 수입원을 앗아간다. 인터넷은 온라인 서점이라는 역할을 통해, 혹은 전자책을 공급하여 소매 서점들의 재고 목록을 초라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서점 한 곳의 재고는 수천 종에 그친다. 인터넷에서는 수천 종뿐만 아니라 서점들이 미처 구비해두지 못한 수백만 종의 책들에도 순식간에 접근할 수 있다. 서점이 얼마나 화려하든, 의자가 얼마나 편안하고 커피가 향긋하든 간에 경쟁이 되지 않는다. 독립 서점이든 대형 서점이든 간에 도서 전문 매장은 대로변에서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다.
한편 공공도서관 지원금은 줄어들고, 관할 지방정부의 예산도 줄어만 간다. 도서 구입에 할당된 금액은 점점 감소한다. 한동안은 도서관이 ‘지역사회의 중추’ 역할을 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도서관에 인터넷 단말기가 설치되었고, 정부 각료들은 미래의 도서관이 ‘3D 페이스북’2과 같을 것이라고 연설하였다. 하지만 신용경제가 파탄 나고 긴축재정이 지속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도서관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일종의 사치 품목으로 간주되었다. 사서들은 자신들의 전문 기술에 대해 인건비를 받을 수 없을 거라는,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이 그들의 역할을 대체할 거라는 통보를 받았다. 점점 더 많은 도서관들이 폐쇄되었다. 이 같은 ‘문화적 테러’에 대한 성토가 넘쳐나자 결국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일부는 성공했지만 일부는 실패했다. 학교 도서관들도 똑같은 운명에 처했다. 파산 상태에 이른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교과서를 폐기하고 전자책과 주립 지식 포털에 접속하는 교육방식을 제안했다. “이처럼 쉽게 전자화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오늘날, 전통적인 양장본 서적에 의지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돈이 너무 많이 드는 일입니다.”3
얼마 전 나는 한동안 가족과 함께 시골 별장에 머물렀다. 오전에는 이 책의 두 번째 교정 작업을 했다(이미 마감 날짜를 넘긴 터였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가족과 함께 주변 시골을 돌아보거나 가까운 마을로 드라이브하여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왔다. 그 별장은 전화도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은 완벽한 은신처였다. 하루는 6장에서 《모비 딕》에 대해 쓴 내용을 확인해보아야 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모비 딕》은 집의 ‘인생 개선 책장’에 꽂혀 있었다. 나는 상관없지 뭐, 오늘 오후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한 권 사서 확인해보자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비 딕》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시내에 있던 서점은 작년에 폐점했고, 도서관에는 그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자원봉사자에게 인터넷 단말기로 도서 검색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서버가 다운되었고 한동안은 복구 계획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결국 나는 외곽순환도로의 슈퍼마켓에서 멜빌의 걸작을 구입해야 했다. 닌텐도 휴대용 게임기의 카트리지 형태로 구입할 수 있는 ‘닌텐도 고전 명작 100선’에 포함되어 있었다. 혹시 《모비 딕》을 테스코 슈퍼마켓의 주차장에 세운 차 안에서 닌텐도 게임기로 읽어본 적이 있는지? (흔한 경험은 아닐 것 같지만) 그리 권하고 싶진 않다. 두 개의 미니 스크린은 슈퍼마리오나 레고 형태로 된 배트맨의 모험을 즐기기엔 딱이지만, 이 신비롭고 오싹한 텍스트를 정독하는 데엔 그리 적합하지 않다. 더구나 뒷좌석의 아이가 자기 게임기를 언제 돌려줄 거냐며 줄곧 소란을 피우는 상황에서는말할 것도 없고.
이 이야기가 대로변에서 《모비 딕》 한 권을 구입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걸 입증하긴 한다. 사실이다. 더 나아가 책이 지닌 유연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이야기는 좋은 책이 미래에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정말이지, 《모비 딕》 같은 책이 화면상의 텍스트 한 줄로 존재할 자격밖에 없는 것인가? 슈퍼마켓에서 맥주 상자나 조개탄처럼 팔레트 위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책들을 볼 때도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다 문득 책이라는 물건에 본질적으로 특별한 점은 없음을 새삼 깨닫고 놀라곤 한다. 우리 스스로 책에 가격value과 다른 가치values를 부여했기 때문에 특별히 책을 위한 장소들을 만들었다는 점만 빼놓고는.
독서는 하나의 종교다. 무척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 종교이긴 하지만.
격렬한 문화 변동의 시대, 앞으로도 격변이 전망되는 상황에서 이 ‘책에 대한 책’을 쓰는 데 열중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혼란스러운 운명이었다. 인터넷과 서점, 도서관과 정부라는 서로 충돌하는 세력들이 독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읽을거리와 읽는 방식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한편으로 지난 10년은 우리에게 블로그, 독서모임, 문학 페스티벌, 소셜 네트워크상의 온갖 잡담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모든 ‘발전’은 실제 진보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로 진보라고 할 순 없다. 그것들은 독서가 아니므로.
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시작했으니, 내 생각을 뚜렷이 표명하며 이 글을 끝내련다. 지금까지는 이 책이 다루지도 않은 내용에 대해 얘기하느라 잉크를 낭비하고 말았다. 1년이 조금 넘는 동안 찬찬히 걸작 50권과 그저 그런 책 두 권을 읽어가면서 나는 인생을 되찾았다. 특정한 책이나 문장에서 비롯되어 이 책에 기록된 나의 행동들은 대부분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나눈 대화의 결과였다. 바로 나 자신이 나의 3D 페이스북이었고 친구 목록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이 책의 내용을 열정적 변호로 이해해주시라. 유행에 따라, 공공연하게, 줄곧 열광적으로 책을 읽으려는 최근 우리의 욕구로 인해 가장 큰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독서의 두 요소, 인내와 고독에 대한 변호로.
잠시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이, 나머지는 그저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앤디 밀러
2013년 여름, 잉글랜드 켄트 주에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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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의 정의: 모든 사람이 읽은 것으로 간주되며, 종종 모든 사람이 스스로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 _ 앨런 베넷,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 1991년 1월 자에서.
2 전前 문화부 장관 앤디 버넘, 2008년 10월 9일 공공도서관협회에서의 연설 중에서.
3 〈새너제이 머큐리 뉴스〉 2009년 6월 7일 자에서.
★ The body in the library.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서재의 시체》의 패러디. (옮긴이)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