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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이미 시작되었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 문제가 지금 보다 더 현실성 있게 대두된 적은 없었다. 이 문제는 히 새로운 이슈로 표현되고 있으며, 또 그만큼 시급하게 제기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바로 발전 자체로 말미암아, 스스로 뛰어넘을 수 없는 내외적 한계에 이르렀다. 결국 자본주의는 기본 범주들인 노동, 가치, 자본의 위기를 맞아 오로지 기만술책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게 된 체제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미시경제와 거시경제 두 차원 모두에서 나타난다. 그 위기는 과학기술의 변동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과학기술의 급변은 종종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 균열을 낸다. 또 과학기술의 영향으로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는 힘과 역량들이 파괴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위기를 우선 거시경제학의 시각에서 분석한 뒤(1), 그 다음에는 이 위기가 기업의 운명과 관리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고 분석할 것이다(2).
1. 전산화와 자동화 덕분에 노동량을 적게 들이면서도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생산단위당 노동비용은 끊임없이 줄어들고 상품가격도 하락하는 추세다. 따라서 일정한 생산을 위한 노동의 양이 줄어들수록, 이윤이 줄어들지 않으려면 노동자에 의해 생산된 가치 즉 노동자의 생산성이 더욱 증가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가 보아도 빤한 역설이 나온다. 즉 한시기에 생산성이 증가하면 할수록 다음 시기에는 생산성이 더욱 더 증가해야만 이윤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산성 경주競走는 더욱 가속화되고, 사용 인원은 줄어들며, 직원들에 대한 압박은 점점 더 심해지고, 월급 수준과 전체 액수는 감소한다. 이러한 체계는 점점 내적 한계에 다다른다. 즉 생산과 생산에 대한 투자가 더 이상 충분한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 필리핀, 수단에서 나온 통계수치를 보면 이미 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산자본의 생산적 축적은 끊임없이 퇴보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스탠더드앤드푸어스 지수의 대상인 500개 회사의 현금 보유량은 6,310억 달러다. 미국 기업들은 이윤의 절반을 금융시장에서 얻는다. 프랑스에서는 CAC40(프랑스 증권거래소협회에서 파리증권거래소에 상장된 40개의 우량종목을 대상으로 산출, 발표하는 주가지수—옮긴이)에 들어가는 기업의 생산적 투자가 그들의 이윤이 폭발적일 때조차도 늘어나지 않고 있다.
생산은 이제 더 이상 축적된 자본 전체의 가치 증식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축적된 자본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금융자본의 형태를 띠게 된다. 오로지 다양한 형태의 돈만을 사고팔면서 돈 버는 기술을 끊임없이 세련화하는 금융산업이 번창한다. 금융산업이 점점 더 무모해지고 점점 더 통제 불가능해지는 금융시장을 조작하여 생산하는 유일한 상품은 바로 돈 자체다. 금융산업이 흡수하고 관리하는 자본 덩어리는 실물경제의 자본 덩어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크다[활성화된 금융시장의 총액은 160조 달러로서, 전 세계 GDP(국내총생산)의 3~4배나 된다]. 이 금융자본의 ‘가치’는 순전히 허구적인데, 이는 대부분 부채와 영업권good will, 즉 앞날에 대한 예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증권시장은 미래의 성장, 기업의 미래 이윤, 부동산 가격의 향후 상승, 구조조정, 합병, 집중 등에서 나올 수 있는 이득을 자본화한다. 주식시세는 자본과 그 자본의 기대 이윤으로 부풀어 오르고, 은행은 각 가정에 (다른 무엇보다도) 주식을 사고 부동산에 투자하라며 재촉한다. 이리하여 주식시장은 점점 더 큰 붐을 일으키고, 허구적 주식자본들이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액수의 은행대출을 받게 된다.
이윤 및 성장 기대치가 갈수록 자본화함에 따라 점점 빚이 늘어나게 된다. 또 은행이 자꾸 허구적 이윤을 재순환시킴에 따라 유동성 경제를 살찌운다. 그 덕분에 미국도‘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이 부채에 기초한 경제성장이 (중국의 성장을 포함한) 세계적 성장에서 단연코 주된 동력이 되고 있다. 실물경제는 금융산업이 먹여 살리는 투기거품에 딸린 부속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부풀어 오른 거품은 터지고, 은행들은 줄줄이 도산하며, 전 세계적 신용체계는 붕괴 위험에 빠진다. 그 결과 실물경제도 오랫동안 극심한 불황의 위협에 빠지고 만다(일본의 불황은 지금 거의 15년째 지속되고 있다)(일본은 1990년대부터 불황에 접어들었고, 이 글은 2005년에 쓰였다—옮긴이).
투기를 비난하고, 조세회피처를 나무라고, 금융산업, 특히 헤지펀드의 불투명성과 규제의 부족을 탓해보아야 소용없다. 불황의 위협, 나아가 세계경제에 무겁게 드리우는 붕괴의 위협은 규제가 없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재생불능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허구적 토대 위에서만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투기거품이 낳는 허구적 이윤을 세금 등을 통해 재분배하려 한다면 이는 오히려 금융산업이 피하고자 하는 바, 즉 막대한 규모의 금융자산의 가치 저하와 은행 체계의 붕괴를 앞당기는 꼴이 될 것이다.
‘생태적 구조 혁신’은 이 체계의 위기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예컨대 150년 전부터 성장 일변도로 달려온 경제논리 및 방식들과 철저하게 결별하지 않는 한, 우리는 기후재앙을 피할 수 없다. 만약 지금의 추세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전 세계GDP는 앞으로 2050년까지 서너 배로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국제연합UN의 기후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온난화의 최대치가 섭씨 2도를 넘지 못하게 제한하려면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발생을 85퍼센트가량 줄여야 한다고 한다. 2도 이상 올라가면 그 결과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탈성장décroissance은 살아남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탈성장에는 다른 경제, 다른 생활방식, 다른 문명, 다른 사회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붕괴를 피할 방도라고는 전시戰時경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당국의 강압적인 자원의 배급, 제한, 할당제 같은 것밖에 없다. 결국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이런 방식으로든 저런 방식으로든, 문명적 방식으로든 야만적 방식으로든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단지 문제는 이러한 이탈이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그리고 어떤 속도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퇴조하면서 드러내는 야만적 형태는 우리에게 이미 낯설지 않다. 전시국가 같은 체제하에서 국가원수가 지배하고, 굶주림 때문에 대량학살과 인신매매가 자행되며, 근대성의 폐허에 약탈이 횡행하는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이미 그런 형태는 두드러지고 있다.
반면 문명적 형태의 퇴조는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을 뿐이다. 위협적인 기후재앙을 환기시키다 보면 보통은 우리에게 필요한 ‘사고방식의 전환’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전환의 성격,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들, 헤쳐가야 할 장애요소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듯하다. 또 다른 경제, 또 다른 사회관계, 또다른 생산양식과 생산방식들, 또 다른 생활양식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진다. 마치 상품, 임금, 화폐 본위의 현 사회를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실 수많은 지표들을 종합해보면 이러한 뛰어넘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또 자본주의를 문명적 방식으로 극복하느냐 못 하느냐는 무엇보다도 그 가능성을 예고하는 경향이나 실천을 우리가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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